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왕하 18:5-6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46:1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유다의 잔존시기에 열왕들의 통치가 이어진다. 남유다 13대 왕 히스기야의 내용이다. 저의 이야기는 앞으로 세 장에 걸쳐 꽤 많은 지면을 차지한다. 남북 분열 이후 가장 온전한 왕으로 평가 된다. 29년간 남유다를 다스렸다(B. C. 715-687년). 앞서 729-716년까지는 히스기야가 부친 아하스와 공동으로 통치하던 시기이다.
히스기야는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었다. 또한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숭배하는 것을 알고 그것도 부수었다. 이처럼 히스기야는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3-5).’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6).” 당연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하는 설명은 모처럼 기운이 난다(7).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 일로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하는 배경이 된다(13절 이하). 저는 하나님만 의지하였다. 글의 구조상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는 기사를 다시 언급한다(9-12). 그러나 남유다는 대조적으로 두 차례의 저들 침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정직히 행하였다. 당시 앗수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평정하고 남하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이에 남유다도 앗수르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히스기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부친 아하스로 인해 폐쇄되었던 성전을 열고 성전을 정화하였다(대하 29:3-19). 또한 남북 분열 이후 처음으로 유월절을 준수하였다(32:1-21). 저의 개혁은 온전히 여호와를 경외하고 의뢰함으로 정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남유다는 이후 140년을 더 지속되는 발판을 삼았다.
무엇보다 저의 개인적인 신앙이 본이 된다. 저는 부친의 통치를 따르지 않았다. 부친 아하스는 남유다의 악명 높은 폭정을 자행하였다. 이방의 풍습을 본받고, 우상숭배에 앞장서며, 산당과 작은 산 위 푸른 나무 아래서 이방 신을 섬겼다. 그러므로 더욱 히스기야의 신앙은 돋보인다. 부친의 부패한 신앙과는 별개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앞에 정직히 행하였다. 대체로 죄는 유전적인 계통을 밟아서 그 영향으로 자식의 문제가 발생하고 재생산되는데, 히스기야는 이를 단절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후일에 저가 얻은 다음 왕 므낫세는 또 히스기야와 같지 않았고 조부 아하스를 따라 역대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된다(왕하 21:2-9).
곧 하나님의 섭리는 계통발생을 초월하고 개체발생으로 개인적이다. 이는 엄연한 성경의 원리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 24:6).” 나의 조부는 하나님을 배척하고 그 시대의 여느 가정사가 그렇듯 두 집 살림을 차리고 평창 노론리 일대의 대대로 물려오던 땅과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 앞서 일제강점기와 남북전쟁을 치르며 술주정뱅이로 전락하여 저의 생은 물론 가문의 영광도 몰락하였다. 그런 중에 부친은 고등학교 때 고향마을 작은 예배당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하고 회심하여 부모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14:20).” 그야말로 모진 가난과 전투적인 목회는 고단하였으나 그것으로 우리 형제들이 모두 주의 사역으로 헌신하게 된 것은 전적인 주의 은혜요, 부친의 여호와 경외함에 기반이 있다. 이에 말씀은 분명히 밝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18:20).” 즉 신앙은 전적으로 개별적이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히스기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주를 의지하는 데 사용하였다. 부친 아하스의 행적이나 아들 므낫세의 악행과는 별개다. 이에 시인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90:12).
즉 인생에 주어진 시간은 각자의 것이고, 이를 주 앞에서 사용하는 일은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이에 바울은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1).” 곧 주어진 시간, 세상 물건을 쓰는 데 있어 그 지나감을 명심하게 한다. 솔로몬은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시간이 무한한 듯 겁 없이 사는 젊음의 날에 그 시간의 주인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게 한다. 고로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 4:5).”
주어진 인생을 사는 데 있어 우리 주님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자기를 부인한다하심은 자신조차 주의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 가능하다. 누가 어떤 일로 기도부탁을 한다. 목사가 되고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나 역시 누구 일을 듣고 위로할 때면, 기도할게! 하는 말로 응대한다. 하면 저의 기도내용을 곧이곧대로 주께 아뢰되 저의 바람대로 구하지는 않는다. 병 낫기를 원하거나, 자식문제, 돈 문제, 얽힌 그 사연을 두고 나는 그 일이 주의 섭리가운데 저의 삶에 역사하시기를 빈다. 어제도 누가 구구절절하게 어떤 사연을 보냈다. 미진한지 주말에 더 말하겠다, 하고 일단락 지었다. 나는 이제 말한다. 그로 인해 주가 원하시는 바,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기를. 자기 생각이나 납득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무엇이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있는지를….
모호한 것 같아 나는 구체적으로 개인적인 신앙을 요구했다. 주일을 섬기며 예배를 드리는 일과 말씀을 토대로 하는 기도가 이루러지기를 설명하였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꾸지 못한다. 그럼에도 기도를 쉬지 않는 것은 어느 순간 자신의 기도 내용이 바뀌어 ‘주의 이름과 영광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마치 현미경의 초점이나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듯이 말이다. 당장은 어려움을 호소하느라 덮어놓고 머리를 숙이지만 현미경과 같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망원경과 같이 저 멀리 하나님의 더 큰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을 비로소 확인하게 된다.
곧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이는 C. S. 루이스가 무신론적인 학자에서 복음의 변증가로 살며 독실한 신앙을 더욱이 깊게 한 계기가 있다. 비혼주의에 가까웠던 그는 나이 들어 한 미망인을 사랑한다. 저에게는 전남편의 아들이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데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채 6, 7년쯤 그녀는 골수암으로 죽고 저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저의 저서 <헤아려본 슬픔>을 통해 또한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다(홍상사).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3-15).”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주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문제는 점점 가벼워지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는 주의 마음으로의 주의 사랑에 빠지는 일이다. 누구 일로 마음 쓰이고 저의 사연이 내 가족의 문제보다 비중이 더 커져, 주께 아뢰고 씨름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대로인 듯 한 나의 문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30).” 하신 말씀을 이루심이다.
곧 자기부인으로 자기문제에서 자유로워지는 비결은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주의 뜻을 알면서부터다. 내 의지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어라 하고 내 건강, 내 육신의 고달픔을 두고 씨름하듯 주께 기도한다. 내 가족들, 내가 사는 나의 행동반경의 모든 문제들을 놓고 마치 하나님을 괴롭히듯 울고불고 아뢰고 고하며 온통 그 일에만 신경을 쓴다. 이때 현미경도 망원경도 그 초점이 엉망인 것을 모른다. 그저 내가 고달픈 내 문제로 그 원인이 뭔지, 초점을 바로 하지 못하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느라 정신이 없을 뿐이다. 한데 구해도 듣지 않으시고, 찾아도 찾을 길은 없고, 아무리 두드려도 열릴 기미가 없다. 이는 이미 내 손에 들린 열쇠를 들고도 씨름하는 꼴이다. 실은 내 손에 답이 있었다. 심리학에서도 이를 알고 부모 자식, 부부 간의 건전한 분리단계를 강조한다. 또는 프로이드식으로 몸에 밴 어린아이의 일을 지적한다. 보면 문제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셈이다.
결국 나와 하나님,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를 설명하시면서 매우 강경한 어조로 설교하신 바 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나의 오른 눈, 오른 손이 무얼 곁눈질하고 무얼 붙들고 놓지 못하나? 그저 자식 일, 또는 자신이 건강, 앞날에 대한 불안, 돈 문제, 얽히고설킨 사람 관계 등등.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마치 가정을 버리라 하시는 말씀 같은데, 그리 오른 눈이, 오른 손이 가서 나로 자꾸 실족하게 한다면 ‘찍어 내버리라.’ 나는 이를 나의 부모의 모진 결단에서 보았다. 당시 부친은 사업의 실패로 빚더미에 있었고 자식은 넷이고, 어려서 부군께 버림받은 모친과 두 남동생이 한데 있었다. 더욱이 큰 아들은 또 생후 6개월에 소아마비라, 이를 어찌 고쳐보겠다고 사방과 팔방을 뛰며 용한 의원을 찾아다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1년 천호동 일대 홍수가 나서 모든 공장과 사업체가 물에 쓸려가기까지… 더는 살 용기도 버틸 힘도 없을 때, 우리 주님의 황당한 부르심.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이러할 때의 개인적인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혜다. 조상대대로 물려온 모든 우상과 제사와 말씀을 거스르는 모든 것은 ‘찍어 내버림’으로,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하여 나는 나의 유년의 기억으로 부친의 사역은 전투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덩그러니 교회만 얻고 사택이 없어 옥상에 엉기성기 천막을 짓고 살았고, 문제 많은 어디 교회로는 갔으나 사택은 단칸방이라 오늘 같은 여름날이면 교회 마당에다 천막도 아닌 비닐을 천장으로 가리고 비박을 했다. 추운 겨울이면 예배당 마룻바닥에서 질식할 정도로 서로 들러붙어 잠을 청하곤 하였다. 나환자촌이든, 당장 갈 데 없어 남의 건물 옥상에 거주하기를 수차례… 그때 나는 그 모든 게 너무 지긋지긋하였는데 그런 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기도뿐이었다. 나의 기도는 늘 투덜거리며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었다!
새삼 지나온 시간이 귀하고 복되다 여기는 까닭은, 히스기야가 주를 경외함으로 남유다가 그나마 140년을 더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 엄히 일러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러니 저마다 믿는 자는 어느 때보다 많고 자유로운데 그리 절실한 건 자기문제뿐이다. 하나님의 뜻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나는 가정예배 때 늘 마지막 기도를 하는데, 특히 회계사 준비를 하는 아들을 두고 주의 뜻이 우선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어쨌든 돈을 다루는 일이라, 저의 뜻이 이루어진다 해도 온갖 유혹이 쉴 새 없이 닥쳐올 텐데… 말씀이 저를 붙드시고, 주의 영이 늘 주관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되고 안 되고는 솔직히 크게 관심이 없다. 그 과정에서 주를 더욱 바라는 주의 자녀로 삼아주시기를.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5-6).” 우리가 바로 사는 길은 ‘지금 당장이 연결되지 않는 말씀’, ‘일상과 무관한 하나님의 뜻’, ‘오늘의 현실이 배제된 영원’이 다 무슨 소용이겠나? 우린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 장담할 수 없어 허공을 딛는 것 같을 때 성경이 디딤판이 되고, 주의 권능이 내 발의 힘이 되어야 한다. 말씀은 결코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말씀은 오늘을 거쳐 영생으로 이끄신다. 히스기야의 신앙은 실제의 것이다. 성경에 생략된 내용으로 그의 정화와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어찌 없었겠나? 여러 산당으로 이득을 보던 권세 잡은 자들의 저항이 어찌 없었겠나? 우리 안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그 속이 들들 볶이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작동을 멈췄거나 어디가 이상한 게 틀림없다.
오른 눈과 오른 손을 찍어 내버린다는 게 그저 이상론자의 허황된 주장이 아니라면, 죽을 맛이다. 해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왜 자꾸 벼랑 끝으로 밀리기만 하는가 했더니, 우리에게는 날개가 있었다. 왜 자꾸 현실과 이론, 성경과 삶은 다른가 했더니 그 싸움이 우리의 속사람을 날로 새로워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에 성경은 늘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데,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선과 악은 뚜렷하다. 모호한 시점은 없다. 애매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을 수가 없어서이다. 그럼 어쩌겠나? 쥔 걸 붙들고 사는 데까지 살아보는 수밖에,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부디 그 어디쯤에서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랄 뿐.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7-8).”
하여 내가 주를 의뢰함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46:1).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또 있겠나?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0).
주가 이루신다. 하여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33:20).
이는 매우 확실하여서,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에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곧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46:2-4).
오늘 시인은 우리에게 능치 못함이 없음을 알린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주가 더하신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5).
어쩌면 나는 기를 쓰고 새벽에 일어나 주 앞에 앉힌다. 나의 나 된 것을 주께 아뢰고, 나의 형편없는 사실을 주께 고한다. 이는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하물며 누구보다 약하고 악하고 미련하고 아둔하여 죄로 어그러진 삶을 살아왔던 나로서는, 주만 바랄 때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이를 히스기야도 붙들었던 것이다.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대하 32:7-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57:8).
곧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그러할 때,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7-8).
내가 겁낼 땅이 아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이제 나의 남은 생이 주만 바람으로,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2).” 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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