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전봉석 2022. 8. 11. 05:16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왕하 16:10-11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시 44:20-21

 

 

남유대 12대 왕 아하스가 통치하던 때이다. 저는 북이스라엘 르말랴의 아들 베가 다스린 지 17년에 유다의 왕이 되었다. 아하스가 왕이 될 때의 나이는 20세였다. 16년을 다스렸다. 저에 대한 평가는 간단하다.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였다.’ 먼저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다. 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었다(1-4).

 

이에 하나님은 아람의 왕 르신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의 왕 베가와 연합하여 예루살렘에 올라와 싸우려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참으시고 저들로 아하스를 이기지 못하게 하셨다. 한데 아하스는 잇수르 왕에게 은금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고, 유다를 위기에서 모면하게 하였다. 곧 앗수르가 다메섹을 쳐 르신을 죽였다(7-9). 앗수르의 원군으로 위기를 모면하자 아하스가 앗수르로 갔다가 앗수르 왕의 제단을 보고 그 구조와 모양을 그려서 고국에 있는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고 우리야는 이를 따라 제단을 제작하고, 아하스가 돌아와 그 제단에서 제사를 한다(12-14). 그러느라 여호와의 제단에 있던 기존의 것을 북쪽으로 옮긴다.

 

아하스는 새 제단과 관련하여 새로운 제사 규례를 만들어 우리야로 시행하게 한다(15-16). 성전의 물두멍을 훼손하고 다른 기물을 본래의 자리에서 옮기고, 이는 모두 앗수르 왕의 환심을 사려 충성심을 보이는 일이었다(17-18). 결국 아하스가 죽고 히스기야가 새로이 왕이 된다(19-20).

 

아하스도 문제지만 이를 그대로 따르는 제사장 우리야의 작태가 더 한심하다. 왕이나 제사장이나 타락에 무뎌져 그리 행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제사장은 선지자와 더불어 여호와의 신앙을 사수해야 할 최후의 보루다. 아하스도 아하스지만 우리야의 이와 같은 무기력함이 더는 소망이 없음을 보여준다. 고작 그 한 순간 전쟁의 위기에서 도와 자신들을 모면하게 한 사실을 두고 앗수르를 의식하고 저들의 제단을 본떠서 주의 성전을 함부로 훼손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숙이게 된다.

 

우리는 먼저 된 자로 나중 된 자들을 이끌고 주 앞에 세워야 할 사명을 갖는다. 이는 목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께서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바, 우리의 신분은 내남없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평신도니 직분자니 사역자니 하는 직분의 문제는 교회 질서와 제도적인 의미 외에 그 사명은 동일하다. 내가 누굴 만난다는 것, 어디에 속하고, 어느 교회를 다닌다는 일은 단지 수동적으로 ‘속함’에 그치는 게 아니다. 더불어 나로 누군가의 무엇이 되길, 곧 주가 하실 일을 행하는 사명자로 그 사람을 또는 그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어제 친구와의 긴 대화에서 나는 이 부분을 강조하였고 더욱이 저들이 세운 대안학교가 교회에, 그 사역의 중심이 ‘기독교 교육’에서 ‘하나님’으로 그 기준을 삼게 되기를. 그것이 법적으로 막혀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의 활동으로 제한한다면 모를까… 우리가 교회를 이룬다는 일은 가정 교회, 직장 교회, 사업체서의 교회가 이루어져 가는 일. 곧 주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을 뜻한다. 수많은 기독교 대안학교 가운데 하나가 더 세워져 굳건하게 성장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교회로서의 예배와 학교에서의 예배는 같을 수 없다. 마치 앗수르의 제단을 본떠서 주의 성전을 개조하고 거기서 예배하려 하는 아하스와 우리야의 시도가 무엇이 문제인가?

 

중심이다. 우리가 홀로 기도하는 것, 나 혼자 묵상하며 말씀으로 황홀경에 빠지듯 기쁨을 누리는 것, 그에 따른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식의 태도는 태만이고 교만이고 자기만족에 겨운, 하나님을 능멸하는 일과 같다. 혼자 살 수 없다는 말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고 그와 같다면, 나를 또한 누군가를 위해 보내시고 그곳에 두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한데 교회는 다니면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그저 자기만족으로 말씀에, 찬양으로 만족함을 느낀다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즉 손은 손으로써 만족한다. 발이 아프든지, 눈이 안 보이든지, 어디 다른 지체가 어떠하든지 관심이 없는 손은 오히려 손 자체가 문제다.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7).” 이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12).” 이는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자세다. 이를 좀 더 옮겨보면,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20-25).”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 ‘부족한 지체를 귀중함을 더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먼저 우린 저에게 ‘사랑의 빚’을 지는 셈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가령 친구가 속한 구역의 한 사람이 폐 이식을 기다리며 시한부를 선고받고 이를 간증한다. 서로가 저를 두고 중보 기도한다. 중보의 놀라운 효력은 저가 날 위해 고통 중에 있음을 알게 한다. 나의 아룀과 간구가 저에 비해 사소한 것을 알게 한다. 잊고 있던 감사를 알게 한다. 주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한다. 중보는 나의 문제를 가볍게 한다. 예수님의 설교 중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다시 돌려보면, 왜 사는 게 그토록 버겁고 어렵기만 할까? 하는 일이나 맡은 바 사명이 왜 고역으로 여겨져 힘에 겨운가? 이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 저를 위해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팔자소관으로 여기듯 억지로 감당하려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주를 따르는, 곧 천국백성으로의 기본적인 자질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는 ‘누구든지’가 ‘제자’ 중에 국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결코 안 믿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 아니다. 믿는다며 따르는 자들로 향하신 말씀이다. 심지어 저들에게 일러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눅 17:22).” 이는 그야말로 뼈를 때리는 말씀으로,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23).”

 

다시 말하지만 이 말씀을 당부하심은 여느 모든 사람들을 향하신 게 아니다. 노아의 때와 소돔과 고모라의 시절을 상기시킨 후에 “롯의 처를 기억하라(32).” 하고 엄히 경고하신다. 믿는다고 믿고, 제자라고 여기며 따랐는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34-35).” 저들은 한 교회에 있었고, 함께 믿음 안에서 산다고 살던 이들이다. 한데 어쩌자고 예수님은 이와 같은 경고를 더하신 것일까?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33).” 스스로 자기 문제로 시달리면 소용없다. 남의 문제로 같이 씨름하고 저를 '내 몸 같이 사랑하라.' 하신 데 따른 중보와 관심이 내 문제를 헐겁게 한다. 다시,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면 잃고, 잃은 듯 주의 사랑으로 남을 위한다면 오히려 자기가 산다.  

 

실은 중보 기도가 안 나오는 사람도 자기 기도로는 열을 올린다. 늘 자기 문제로 시달린다. 내 코가 석 자다. 예수께서 그 멍에가 가벼울 거라 하신 말씀은 도무지 현실과 상관없는 듯하다. 사느라 늘 사는 데 지쳐 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나, 가족, 내 일, 내 처지가 기도의 전부일 때 천사의 향로에는 담을 기도가 없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계 8:3).” 누구나 자기 말, 자기 사연에 함몰된 듯 자기 문제로 기도를 부탁한다. 그러면서 교회의 어려움이나 상대의 처지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개척교회’ 시대는 지났다고 말하는 현상은 그래서다. 온통 자기 좋을 대로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믿고 자기만족으로 주를 믿는 자로 여긴다. 그런데 보면 늘 ‘자기 십자가’가 너무 버겁다. 대체 주님은 악의적으로 그러신 것도 아닐 텐데, 왜 굳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 하셨을까?

 

먼저는 자기 십자가에 대한 오해다.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정의하였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바탕으로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란 사느라 기를 쓰고 사는 팔자소관의 각자 문제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거였으면 안 믿는 무리와 대중들도 포함하여 그 설교 대상을 넓혀 말씀하셨을 것이다. 지금 예수 앞에 모인 자들은 소수의 사람들로 이미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앞에 모였다. 하면 바울의 진술과 같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즉 지금, 여기가, 예수가 계실 곳으로 나를 대신 두신 곳이다. 성도의 교제는 그렇듯 서로서로 예수가 되어 같이 모인 것이다. 할 때, 저의 아픔이 나에게 크게 와 닿지 않는다면, 누구의 사연이 그저 ‘내 코가 석 자’라는 이유로 묵살된다면, 이는 결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게 아니다.

 

어쩌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으나 나는 개척교회 옹호자이다. 신대원 동기들과 만나면 개척을 해! 하고 권한다. 누가 그 인생을 허비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면 신학을 해! 하고 말한다. 설마 목회나 교회사역을,  주의 일을 가벼이 여겨서 그리 말하는 게 아니다. 먼저는 주의 은혜가 다르다. 다음은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뭘 하면서 사는 게 가장 하나님과 밀접하게 사는 것일까? 실은 우리가 이미 다, 개개인의 교회다. 자신을 돌보는 일-건강은 물론 영적인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도 중요하다. 내 몸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다. 주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이를 안다면 내 안에 ‘저’가, ‘그’가 들어와야 한다. 교회에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나아오듯이 내 안에 나랑 상관없는, 상한 심령의 사람이 들어와 거한다. 이는 참 골치 아픈 일이기는 하다. 아, 그렇다고 나는 무교회주의자는 아니다. 이런 미친 소리에는 아예 관심도 없다. 

 

내가 저에게 학교법에 위배되는 게 아니라면, 교회를 먼저 이뤄가기를 권하였다. 물론 기독교 대안학교로 이미 프로그램 가운데 예배가 있다. 또 나름의 어떤 기도모임도 있겠다. 하지만 내 말은 주의 제단을 쌓는, 교회 본연의 말씀 선포가 이루어져야 한다. 여러 취지의 다양한 교육기관들도 있고, 그 가운데 기독교 대안학교로 바로 세워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안 되면 모를까, 가능하다면 먼저 나는 저들 부부가 먼저 예배를 시작함으로 주일에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로 거듭난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한결 수월할 것이다. 왜냐하면 (물론 모든 게 그렇다지만)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장이다. 더는 내 책임이 아니다. 주가 알아서 하신다. 이루어 우리가 할 일은 참여다. 지체로서의 하나되는 것뿐이다. 큰 교회를 선호하든지 작은 교회를 선호하든지, 우리가 교회를 이룬다는 것은 매우 개별적이다.

 

물론 교회도 숱하다. 아브라함도 있고 야곱도 있고 이삭도 있고 모세도 있고 다윗도 있고…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구분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었다. 여기서 하나님이 모세를 세우실 때 저를 보내시며 자신을 일컬어,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5).” 이는 교회가 더, 더 많아도 교회는 독립되고 개별적이다. 경쟁관계도 서로 연합하여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고 이삭은 이삭이고 야곱은 야곱이다. 하나님은 '~의' 하나님이라 강조하신다.  교회도 많은데 굳이 또, 그것도 기독교 교회에서 굳이 그럴 게 있나 싶지만, 마치 성소 안에 지성소를 두었던 것 같이,  그 안에 교회의 사명은 구심점이 된다. 

 

다니는 교회에서 자기 역할이 손인지, 발인지, 약한 지체인지, 조금은 강한 지체인지… 것조차 관심 없이 오간다면, 교회로서의 사명을 저버린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하건대 그런 교회를 다니는 것이라면 차라리 안 다니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무신론자가 예수를 영접하는 일보다 다니는 혹은 다녔던 자들이 예수를 영접하는 게 훨씬 어려운 이유다. 이는 멀찍이 서서 예수를 따르고 그가 행하시는 ‘이 표적’을 구경하며 탄성하고 박수치고 환호하던 무리들 중 하나일 뿐이다. 스스로는 신자로 여겼을지 모르나 저들이 결국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자들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사람은 열두 제가 가운데 있었다. 

 

나는 오늘 말씀에서 아하스 왕과 우리야 제사장의 한심한 꼴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 나도 뭐라도 할까? 누가 그러던데… 글방으로 다시 운영하며 교회는 덤으로 할까? 카페 교회는 어떨까? 하는 살 궁리를 종종 한다. 별의 별 생각이 아하스의 지시와 같이 내게로 온다. 우리야의 대책 없는 실행처럼 나도 종종 구체적을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한다. 저들은 주의 나라-이스라엘의 왕이면서 또한 제사장이었다. 나름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려고(?) 제단을 그 꼴로 만든 것이다!? 이방인들이 하던 대로 자기 자식도 불에 던지면서? 뭐 그리 성스럽게 종교인으로 살려하는지 모르겠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7-28).”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44:4-5).

 

오늘도 시편으로 기도한다. 분명한 것은,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149:4-5).

 

내가 주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이미 주의 기쁨인 것을 알고 이를 누리며 주가 두시는 자리에서 주가 하시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는 여전히 안 믿는 자나 어려움을 겪는 이와 함께 하는 것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나는 어제 친구에게도, 그러하여 이제 나는 참 다행이라 고백하였다. 더는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데서, 주의 것이라는 데서, 더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없다. 다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게 하는 일,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6).

 

곧 내가 내 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가 아니다. 주를 바람으로 누가 자꾸 밟힌다. 마음이 쓰인다. 매일 기도를 부탁하던 친구가 요즘은 뜸하다. 그럼 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먼저 문자를 해본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아픈 아이’에게도 문자도 전화 한 통도 없었다. 요즘 상태가 안 좋은가? 하고 갑자기 신경이 쓰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늘 말하듯 내 한 몸 추스르며 건사하는 것도 죽겠는데… 그런데 희한하지? 중보란 이처럼 내 문제는 점점 가벼워서 감옥에 갇혀서도(바울이나 사도들과 같이 존 번연처럼), 딸 넷이 모두 항해에 배가 침몰하여 죽었어도(‘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찬송가를 지은이), 당장 지금 자기 앞가림도 못할 지경인데 그건 그리 무겁지가 않다. 어째서?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89:6).

 

곧 “여호와여 주와 같은 이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크시니이다(렘 10:6).” 그러니 나의 문제는 더 이상 나를 짓누르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8).

 

오늘 시인의 고백이 감미롭다. 한참을 입에 물고 삼키지 않는다. 내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한다. 그 이름으로 감사하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이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말이다(17). 어떻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그야말로 ‘우린 다 이루었다’ 하신대로 다 이루어진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20-21).

 

내 마음의 비밀, 그 은밀한 죄까지도 주는 다 해결하셨다. 그것도 모르고 쩔쩔매듯 혼자 씨름하고 숨 죽이고 죄책으로 시달리며 산다면 주는 얼마나 안타까우실까? 곧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은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하여 그저 주 앞에 아뢰기를,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