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전봉석 2022. 8. 15. 05:09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왕하 20:2-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 48:1, 14

 

 

히스기야는 신앙과 축복, 불신앙과 징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이다. 연대기를 정리해보면 히스기야 29년 통치를 놓고, 발병 후 15년 생명 연장과 저의 성전 기물과 모든 것을 산헤립에게 조공을 바치고 기둥의 금과 은을 벗겨주어 위기를 모면하기까지 저에게는 아직 은금이 많았다. 즉 18:13-20:25에 연급된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보면 <발병--> 실수--> 앗수르의 1차 침공--> 2차 침공>으로 볼 수 있다. 단 성경에 기술되는 이야기의 의도는 축복과 불신앙으로 말미암은 징계를 의도적으로 대비하기 한다.

 

오늘 본문은 저가 죽을병에 걸려 이사야가 저로 생을 정리하라 알린다. 저는 자신이 행한 선행을 주께 아뢰며 은총을 구한다. 하나님은 저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주신다. 물론 예루살렘도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하신다. 이사야가 무화과 반죽으로 저의 환부에 바르고 치료할 때 생명 연장에 대한 하나님의 징조를 구하고 해 그림자를 15도 뒤로 물린다. 당시 무자하던 저에게 아들 므낫세도 주신다. 후계자도 없이 죽을 뻔했던 저에게 이와 같은 은총은 분명 크고 위대하다. 그런데 저의 사후 오늘까지 쌓았던 모든 게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는 예언을 두고도 저는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19)” 하고 이를 기뻐한다.

 

이를 두고 여러 생각에 젖게 한다. 순리에 따라 병에 들고 죽었으면 어땠을까? ‘히스기야의 기도’와 그에 따른 응답을 축복이라 할 수 있을까? 이후 저가 보인 모습은 의아할 따름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우린 듣는 입장이라 이런저런 생각도 가능하지만 저로서는 뜻하지 않은 발병으로 그와 같은 기도와 소원을 주께 아룀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로 한창이었다! 당시는 그는 후사도 없었다. 나름 주 앞에서 선을 행하며 살았던 날들이 주께 호소하는 근거가 될 만하다. 그런데 저는 너무 자신을 몰랐던 것은 아닐까?

 

주께 호소하여 병 낫기를 간구하며 생명 연장을 구한 뒤 이사야가 그리 행하실 것을 알릴 때, 저는 어째서 이적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시험한 것일까? 하여 또 병이 나았을 때 어찌하여 자신의 곳간과 성전 문을 개방하여 이방에 과신한 것일까? 이후 이를 지적하며 사후 벌어질 일에 대해 저는 정말 그리 돼도 상관없다고도 선히 여긴 것일까?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전 9:12).”

 

나는 히스기야의 기도(사 38:9-20)와 응답을 볼 때면 늘 마음이 어려워진다. 물론 우리 누구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고 자신을 장담할 수 없다. 사람은 본래 ‘그때’가 되어 일이 닥치기 전까지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서로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누가 스스로를 장담하겠나?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40-41).” 그때 이후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고 장담할 수 없다. 하여 주님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42).” 우리로 깨어 있으라 하심으로 주의 뜻을 늘 살펴 신중하기를 강조하신다.

 

히스기야가 비록 39세로 아직 무자식으로 죽어야 할 때, 그와 같이 ‘됨’을 순응하였으면 어땠을까? 자신이 행한 선행을 의로 여겨 주께 아뢰고 더 살기를 구하기보다 그 자체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였더라면 말이다. 물론 누구라도 그리 받아들이고 주께 아뢰어 평안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어제 같이 나누었던 설교 본문에서도,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102:23-24).

 

하는 기도는 어쩌면 자연스럽다. 한데 이후 자신이 교만하여 있는 것을 과신하며 이방과 결탁할 줄은… 히스기야는 이를 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인생의 위기는 누구라도 예상하지 못한 때에 닥친다. 하면,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이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다. 곧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하면 이후에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9:9-11).”

 

즉 그 남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더욱 의뢰하고 겸손히 주 앞에 세워지는 날의 수고가 따라야 하지 않을까? 주님은 언제나 내편이시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한데 히스기야의 이후 행함은 예측하지 못했다. 저가 병 나은 것에만 정신이 팔려 왕국과 곳간을 개방하고 내보인 것은 위세였다. 교만함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어쨌든 저의 결국이 닥쳐왔고, 그 일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므낫세와 그의 행적이 악의 악으로 더하여질 줄은 저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무엇을 간구하는 데 있어 주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장담하고 호언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것까지도 주의 선하심으로 인정하는 것이 낫다. 물론 이는 이상적이지 내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다. 이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감사함으로 아뢸 때 더는 바랄 게 없는 것이 복이다. 올바른 기도에 대하여,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5:1-3).

 

묵상은 여러 생각으로 오래 머물게 한다. 특히 죽음을 앞에 두고 주께 아뢸 때 더 살기를 구하고 병 낫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일까지도 주의 때가 이름에 주가 어련히 선을 이루어가실까, 하는 믿음으로 순응할 수는 없는 일일까?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주를 인정하는 일, 그 훈련이 ‘아침마다’ 내게 이루어지게 하심을 감사한다. 나는 무엇도 자신할 수 없어 히스기야의 기도를 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단 9:17-18).” 이와 같이 성경의 곳곳에서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닥쳤을 때 어찌 기도하는 게 옳은가를 살피게 된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6:6-7).

 

나는 자신할 수 없다. 다만 주께 아뢰고 고할 때, 나의 연약함을 두고 인정함으로 주는 어떠하든지 선하시다는 것을 붙들고 그 어떤 결과나 사정을 두고 주 앞에 흥정하듯 아뢰지만은 않기를. 이는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무엇을 구하고 바라셨던가?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고 본연의 자세로 그 와중에도 제자들을 돌보셨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40-41).” 다시 주 앞에 엎드려 아뢸 때에는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42).” 순종하셨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기도의 필수다. 들숨과 날숨으로 숨을 쉬는 과정 그 자체로 사는 일이 연장되듯 기도는 성도로서의 삶을 유지한다. 다만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능히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 내가 돌이켜 주를 영접하게 하신 것도, 믿음으로 이 길을 가게 하신 일도… 그 사이에 말할 수 없는 시행착오와 과오와 잦은 죄악 중에도 주가 다 이루시고 붙드시고 용서하시며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하면 남은 모든 것도 주가 가장 선히 다루실 것을 믿는다.

 

이와 같은 믿음이 의다. 이 의도 주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주 앞에 누가 감히 경건을 자처하고 의를 행할 것을 장담할 수 있겠나? 새삼 나는 오늘 히스기야의 기도와 그 결과를 보며, 나 또한 그와 같다면 ‘더는 바라지 않는 것’도 신앙의 값진 일이 아닐까, 묵상하게 된다. 더는 바라지 않는다 함은 주를 경배하고 찬송하는 일 외에 병 낫기를, 어떤 문제가 해결되기를, 심지어 나의 생명이 더 연장되기를… 하여 다음의 행보를 나는 장담할 수 없다. 내가 나 된 것을 나는 모두 주의 은혜인 것을 인정한다. 나의 자식들이 이만큼 반듯하니 자란 것도, ‘나 같은 죄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자녀로 돌이켜 이 귀한 사명의 길을 걷게 하신 것도. 이런저런 어려움이 중첩될 때 마음은 어지러워 여러 생각이 많아질 때면 오직 주만을 바라고 주께로만 영광이 돌려지기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이에 오늘의 시편으로 기도를 삼으면,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48:1).

 

다른 어떤 군더더기가 필요없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14).

 

이 하나의 믿음으로 아직도 가야 할 나의 남은 생이 채워지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대상 16:25-26).”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선과 의는 없다. 다만 우리의 그러한 주를 찬양하는 것으로,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145:3).

 

나는 시를 분절로 나눠 오래도록 입에 머금는다. 삼키기 전에 이를 음미하고 그 맛을 기억하고 싶다. 하여 뜻하지 않은 순간에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때에 앞서 믿음의 사람들이 붙들었던 단 한 가지,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2).

 

주가 머무시는 시간, 장소, 그 위치를 따로 특정할 수는 없으나 이와 같은 시간에 또는 나 홀로 머물게 하시는 교회에서 주가 허락하시는 행동반경과 사람들과 저들 심령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행여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8).” 그러므로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나의 주름이나 티나 그 어떤 허물도 주께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실 것을 믿으며,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 (셀라)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8-9).

 

하여 더더욱 나의 남은 생에서 주의 전을 멀리하지 않고 떠나지 않기를. 아내는 날 위해 기도할 때 그 앞에 수식어를 하나 붙이는데 ‘늘 교회를 지키는’이란 표현을 쓴다. 나는 어떤 다른 말보다 이 말이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뭔가 좀 남다른 은총이나 은혜를 구할 수도 있을 텐데, 늘 교회를 지킨다는 말…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삼상 2:10).” 실은 내가 교회를 지킴이 아니요 교회가 나를 지키게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눅 9:3).” 이는 주께서 다 책임지시는 것으로,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이에 나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10-11).

 

하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오늘이 아닌 영생을 바라며,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하여 나는 누구에게 보이려고, 오늘 내게 어떤 보람을 갖게 하려고, 앞으로 어떠한 포부로 살 것을 감히 장담하지 않음으로, 매순간으로 감사하고 또 찬송하는 삶이기를.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12-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