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왕하 17:33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시 45:1
악이 더하여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다. 마지막 왕이자 19대 북이스라엘의 왕 호세아의 때이다. 그는 즉위하여 9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B. C. 731-722).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침공하여 그에게 조공을 바치다, 애굽과 결탁하여 앗수르를 치려하였으나 결국 호세아는 붙들려 옥에 갇히고 사마리아는 포위되어 백성들이 앗수르로 강제 이주된다. 호세아는 친 앗수르 정책을 펼치다 앗수르를 배반하면서 파국을 맞는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B. C. 722년에 멸망한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오늘의 모습이 그와 다르지 않아서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22).” 이를 오늘 본문으로 읽으면 이런 내용이다.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왕하 17:33).”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산당은 산당대로 경외하고 섬기며 그 근간에는 ‘자신을 위하여’ 그리한다. 그러니 가만히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우리의 완전하지 못함을 두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이 필요하겠다. 한데 그게 그런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4-16).” 성경의 여러 경고를 무시하는 삶의 종국은 같다.
분명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이는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식으로 자기들 좋을 대로 행함인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더욱 알고자 하는 게 마땅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은 중보에 있어 남에 대한 관심을 보면 알 수 있다. 남의 이야기에는 시큰둥하다. 오늘, 지금,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여 굳이 누구에 대해 관심을 두려하지 않는다. 설령 관심을 둔다 해도 당장, 나와 상관있는 누구가로 제한된다.
한데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고 연이어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다. 나와 상관없는데 누구 이야기, 남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저를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 하면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이와 같은 삶이 가능하다. 하나님을 가까이함은 하나님의 관심에 관여하는 것으로 주의 기쁨을 같이 하는데,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이를 위해서도 우린 믿음 위에 서야 한다. “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나를 주께서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확신,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한데 어쩌다 이스라엘의 결국은 이리 된 것일까?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만을 경외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셨으나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전 풍속대로 행하였느니라(왕하 17:39-40).” 그들은 주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자기들 좋을 대로 “이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니 그들의 자자 손손이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대로 그들도 오늘까지 행하니라(41).”
결국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결국 저들이 지금 자처한 일은 그리 정해진 것으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
<고난이 주는 유익>을 두고 설교원고를 준비하다, 마음이 어려운 만큼 소망도 커졌다. 곧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하여 하나님은 오롯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5-6).” 이를 알고 묵묵히 주만 바라며 살 수 있다면….
성경은 이와 같이 멸망으로 끝맺는 자에 대하여 오늘도 경고하신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19).” 결국의 마침이 멸망이라는 데서 숨이 턱, 막혀야 한다. 저들을 위해 운다. 누구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주목해야 한다. 그저 자기 이야기에 빠져 있는 사람은 중보가 없다. 실은 남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마음이 안 간다. 그런데 중보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외눈박이의 사랑’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즉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섬긴다. 필요하면 여느 종교의 좋은 교훈도 취한다. 혼합한 술 같다. 안 믿는 자들과 어울리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때론 저들의 삶이 본보기가 된다. 중보를 잃으면 이처럼 자신을 망친다.
실은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나는 말씀을 권하고 주의 사랑을 말하는데 저는 자신의 일로 그 말에 귀를 기울일 겨를이 없다. 누구의 사연이 저의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일찍이 나는 중보의 힘으로 오늘까지 살고 있음을 인정한다. 몇 번 고백한 것인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6개월 남짓 입원하여 수술한 곳이 여수 애양원병원으로 애양원교회가 있던 곳이다. 깁스를 하고 있어 퇴원 후에도 근처에 세를 얻고, 애양원 나환자촌에서의 생활이었다. 나병으로 인해 소경이 된 장로님들이 성경 66권을 암송하고 이를 가지고 늘 찾아오던 지장로라는 분을 기억한다. 그곳에 있을 때야 그러려니 하였다. 퇴원하고 몇 년이 지난 뒤, 아마도 고1 혹은 중3 때였을까? 혼자 여행 삼아 밤기차를 타고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간 적이 있다. 너무 이른 새벽에 도착하여 애양원교회로 올라가 눈에 익은 교회 뒷자리에서 눈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저만치서 서로 돌아가며 기도회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소경 장로님들의 새벽기도 모임이었다. 그런가보다 하고 한껏 움츠려 의자에 몸을 기대려는 때 누구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고, 나의 부친과 교회 이름이 지목되면서 아주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주께 아뢰는 것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연출이다. 거짓말 같은 기억이다. 마침 그 시간에, 하필 그 자리에, 아직 어렸던 내게 혼자 새벽기차를 타고 병원진료로 여수까지 다녀오게 한 부모도, 그 시간에 도착해서 교회로 간 것도, 한데 딱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큐' 사인을 하고 동시에 전우주적인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일제히 모든 순간이 그 때를 예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나의 기억은 선명하고 소름이 돋고 이상하다. 끝나고 지장로님께 인사를 하고 저의 손에 이끌려 저의 집으로 가서 혼자 사는 소경의 아침 상을 받은 일까지. 대체 이와 같은 우연이 오늘에 이르러 나의 기도에 중심이 될 줄 알기나 했을까? 저들이 뭔데 날 위해 기도하였을까? 그저 몇 개월, 잠시 병원에 있던 아이로 인사를 나눈 게 다인데, 물론 부친은 몇 번 지장로님의 권유로 새벽예배나 수요예배 강단에서 아가서를 가지고 설교를 하셨다. 그런 인연이야 해마다 수련회로 오는 여러 교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일 텐데….
중보는 나에게 불가사의한 일이다. 오늘의 나는 누군가의 기도로 살았고, 이 길을 간다. 잊었었다고 해도 기도는 주의 제단에 올려졌다. 내가 누굴 위해 기도할 때 나는 그리고 또 까먹기도 한다. 그러나 중보는 성령으로 일하시게 한다. 놀라운 역사다. 정작 기도를 한 사람이나 받은 사람은 그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해도, 우린 그저 그러려니 할 것을 하나님은 끝까지 기억하고 응답하신다. 저들은 얼마나 더 날 위해 기도하다 하늘나라로 가셨을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7-18).” 분명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이를 앎으로 우린 주께 아뢴다.
나는 오늘 본문을 읽으며, 새삼 저들의 멸망이 예상대로 이루어졌다는 데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뭐라 일러 누구에게 주를 전하고 말씀을 권할 때, 가령 아이는 ‘또 그 타령인가?’ 하는 투로 ‘네, 네’ 하면서 히히거렸다. 일용직으로 당장 돈을 벌어야 했고, 이는 마치 밑 빠진 독처럼 끝도 없는 일인데, 그래서 어디 취직이라도 한다고 한 것이 2백도 안 되는 월급이라 저는 그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직 서른 전의 나이라, 나는 무언가 준비하는 게 낫지 않겠나? 염치없지만 아직 부모에게 등 비빌 수 있으니, 알바로 전환하여 자기 시간을 좀 만들어서 하다못해 무슨 자격증이라도 따면 어떨까? 하고 권하다, 주일을 다시 권하고 주 안에서 함께 믿음생활을 하기를 말하려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말을 흐리다 전화를 끊었다.
한 영혼을 주 앞으로 이끈다는 일, 저 애도 글방의 역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초등학교 때 글방에 오면서 여기까지 우리가 함께 해온 것인데, 쉽지 않다. 내 맘 같지 않다. 어쩔 땐 괘씸하다. 아랑곳하지 않고 나 몰라라 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한데 자꾸 마음에 걸리고, 때론 신경이 쓰여 속을 볶으니까… 중보란 다소 강제적이다. 하나님이 두시는 마음으로 내 의지나 성향과는 상관이 없다. 저를 어지럽히는 것,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저와 이야기하거나 위해 기도할 때면 그것이 내게도 주의를 주는 것이다.
왕의 축혼가로 불리는 오늘 시편의 의미는 사랑의 노래다. 시편의 아가서로 솔로몬과 술람미를 연상케 한다. 사랑의 묘약은 좋은 말만 끌어올리는 샘물 같다.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45:1).
말 곧 혀의 일로 마음에 담은 것이 입 밖으로 나온다. 악한 자는 선한 말을 할 수 없다고,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이는 당연한 이치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그러니 말과 혀는 마음의 일로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나는 이 수련이 중보로 이뤄진다고 본다. 주 앞에 누구를 두고 아뢸 때 평소 나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떤 선한 생각을 주께 부탁한다. 부디 저 아이로 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그리하여 주신 날의 시간을 보다 건강하고 감사하게 살 수 있기를. 너무 일찍 돈돈거리며 살아야 하는 저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나는 이 마음의 출처가 내 것이 아닌 것을 안다.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2).
이는 곧 나이면서 너이다. 우리,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들이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하여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전 10:12).” 알면서도 어떤 불평이 또는 원망이 말로 나올 때, 순간 입을 다물고 남을 위해 기도한다. 물론 자신을 위한 기도는 본능적인 것이겠으나 중보는 의도적이다. 이로써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이에 주의 복은 자연스럽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
이를 저버린 북이스라엘의 결말은 경고다. 오늘 내게 주목하게 하시는 표지다. 이에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이처럼 말씀으로 나의 마음을 씻어내고 또 채워가는데도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 결국은 나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주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중보이고 누구로 인한 마음씀이며 속끓임이다.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4).
주의 병거에 올라 주의 검을 들고,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6).
하는 고백을 내 것으로 삼고 사는 일,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곧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그리하여,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그러할 때,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17).
곧 나의 왕 나의 영광은 주만이 되심을.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4-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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