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 22:2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시 50:21
므낫세 뒤를 이어 요시야가 남유다 16대 왕이 된다. 저는 31년간(B. C. 640-609)을 다스렸다. 저에 대한 평가는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2).” 하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악명 높은 므낫세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서기관 사반에게 일러 제사장 힐기야로 하여 성전을 보수하게 한다. 그러다 성전 보수 중에 율법을 발견하여 이를 읽고 ‘옷을 찢는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11).” 회개가 이뤄진 것이다.
므낫세와 아몬의 치하에서 우상 숭배로 더럽혀진 성전을 보수하는 과정이었다. 유다 왕국이 여호와의 신앙을 회복하는 계기가 된다. 대대적인 종교개혁의 근간이 된다. 이것은 모세오경의 하나로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 31:26).” 므낫세와 아몬의 극성에 극적으로 숨겨졌던 책이다.
말씀 없이 저의 삶이 개선될 수 없다. 훼파된 신앙은 이상하리만치 이를 유지하려는 죄의 속성을 갖는다. 곁에서 봐도 그럼 안 되는데, 싶은 악을 굴레를 자처한다. 결국 우리에게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바른 믿음과 신앙을 위한 말씀이 중요하다. 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 겨우 여덟 살이었다. 아이가 뭘 알겠나 싶지만 어른보다 낫다. 므낫세와 아몬의 악행은 지나간 것이다. 저들의 성년은 12세로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눅 2:42).” 자기 의지로 걸어서 성전을 오르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는 22세 나이면 성인이다.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민 1:3).” 공직을 맡는 나이는 30세로 “곧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4:3).” 가장 이상적인 나이는 다윗이 왕이 된 나이로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의 때이다.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삼하 5:4).”,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눅 3:23).”
이처럼 나이를 두고 살펴본 것은 요시야의 왕위는 8세면 너무 이른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사야는 간주하였다. “그가 또 소년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 아이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 내 백성이여 네 인도자들이 너를 유혹하여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사 3:4, 12).” 그러니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하나님을 마음에 품었다. 그리하여 “아직도 어렸을 때 곧 왕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제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여 그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거하여 버리매(대하 34:3).”
곧 하나님의 일은 환경과 나이와 어떤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깬다. 도리어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비로소 뜻을 나타내신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고후 7:5).” 이때 저가 그 환경과 조건을 들어 주의 이를 미루었더라면 어땠을까? 흔히 우리로 못하겠다고 하게 하는 경우는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그 마음이 말씀과 멀어졌기 때문이다. 다 이루었다, 하고 외치신 예수님의 생애가 이를 증거한다. 어제 읽고, 듣고, 묵상하였던 우리 구원의 놀라운 자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서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면 오늘의 우리의 어떤 고난도 우리의 가는 길을 막아설 수 없음을 재확인하게 한다. 하여 예닐곱 가지로 찾아보았는데, 우리가 고난을 통해 얻은 축복이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진노늘 당하신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을 받고 알고 누리며 살 수 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우리는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 용서함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벧전 2:24, 사 53:5).”
셋째,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온전하신 의를 우리에게 덧입히시고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게 하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넷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다섯째,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사탄은 더 이상 우리를 공격할 무기를 잃었다. 곧 사탄은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로 자신은 물론 우리로도 정죄하는 것이 저의 무기인데 더는 효력을 내지 못한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15).” 이후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정죄하여도 저만 책망을 당한다(슥 3:1-5, 참고).
여섯째,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완전히 치유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일곱째,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우리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하고 언제든지, 영원하도록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 앞을 마음껏 활보하며 주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한 마디로 정리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하여 전우주적인 활동을 체험하고 목격하게 되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 그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하심을 선포하게 된다. 곧 주의 은혜의 영광의 위대하심을 삶으로 체험하고 나타내는 사명으로 남은 생을 산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오후께 누구의 전화를 받고 나는 슬펐다. 여전히 문제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것을 두고 씨름하고 다투고 서로 언쟁하는 어느 부부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마음 아프게 한다. 저들은 누구보다 주의 부르심과 그 맡기신 사명을 감격하며 실천하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다. 한데 어쩌다 발견한 ‘건담’을 버리네 마네, 너 때문이네 누구 때문이네 하면서, 아이 앞에서 보이는 추태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나는 듣다 속상하여 ‘그냥 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한들 저들이 몰라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 주를 경외하는 마음이 1도 없는 것 같아, 참 겁더 없이 산다 싶었다. 어쩌겠나? 살아봐야 하는 일이면 살아서 나이 들 때까지 살다 그 하찮음에 치를 떨고 뒤늦은 후회를 한들. ‘인생 다 그렇지 뭐’ 하고 자신을 회유하든지 한을 가지고 있다 죽든지. 문젠 지금의 시간이 그 젊음이 아까워서 나는 울었다.
대체 왜 목사로 사모로 산다고 살려하는 것일까? 전혀 상관없는 문제로 서로 감정소모를 일삼으며 여전히 게임에 빠지고 무슨 장난감을 두고 서로를 탓하는 것이니, 당장 자식이 보는 데도 서로 비아냥거리고 비난하고 돌아서서 자신을 비하한들… 나는 저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나?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하나?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삿 6:15).” 성경의 어느 인물이 그럴 자격이 되고 힘과 능력을 갖춰 하나님께 뽑혀 그 능력발휘로 주의 일을 감당하였던가?
오죽하니 바울도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고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런데 뻑, 하면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고 용기도 없고, 하는 말에 곁에서 나 같은 자를 보고도 느끼는 게 없다면 더 무얼 말해도 소용이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능력이 되고 힘이 있어 이 길을 갔나? 질그릇의 비유를 못 알아듣는 것일까? 관심이 없는 것일까? 나는 그 말도 했다. 매일 그 타령, 자기 신세에 빠져 있으니 남의 일이나 처지에 감동이 있겠나? 남을 위해 기도하겠나? 매일 자기 입에 물린 공갈 젖꼭지나 빨고 있는데.
돈이 좀 더 있으면 잘할 것 같나? 능력이 좀 나으면 주의 사역을 감당할 거라 여기나? 여기 여덟 살짜리 아이 요시야가 있다. 저는 일찍이 그 부친과 조부의 악행을 따르지 않았다. 어린 게 뭘 안다고 성전을 보수하게 하고, 발견한 성경으로 자신을 회개하고 통회하였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기를,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결론은 자신을 못하겠다 하는 것만큼 교만도 없다. 스스로 그리 여기는, 거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만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지금의 사역도 한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해야 할 것 같은 자가당착에 의한 것이다. 그게 아니면 언제까지 그런 일(!)로 서로 다투고 싸우느라 정작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있을 텐가? 서로 자기주장으로 씨름하느라 도저히 안 되겠으면, 감히 말하건대 이혼하시라! 어림없는 일이다. 그래도 거기에 등비비고 살고 싶은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이는 자신을 드러내려는 바울의 화법이 아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우릴 위해 예수께서 어떤 고난과 고초를 겪으셨는가를 생각하면, 언제까지 그런 일로 다투고 씨름하고 자기열패감에 빠져 비루하게 돼지 여물통지나 뒤지고 살 것인가?
곧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오늘 이와 같은 축복을 누리며 산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이를 알면 알수록 주 앞에 옷을 찢고 자신을 뒤집어 더는 내세울 게 없어야 마땅할 텐데… 그게 결국 우리 임의로 안 되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다들 저마다의 관심으로 살다 가는 것이다. 어쩌겠나? 나는 누구와의 대화에서, 저의 여전한 분탕과 싸움과 내분을 보면서 더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저들 부부가 화합하여 잘 살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자기 문제를 잘 극복하여 여느 가정처럼 단란하게 살기를 위해 기도하지도 않는다. 그게 목적이면 굳이 사명을 운운하고 주의 사랑을 떠벌일 게 없다. 저들이 아는 주의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 달콤한 은혜와 넘치는 긍휼로 낭만적인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놀라운 축복은 예수가 살이 찢기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옆구리와 팔다리에 창과 못이 박히는 끔찍한 고난의 값이다. 그의 십자가를 묵상하면 할수록 룰루랄라 그저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나는 말을 하다 얼른 멈추었다. 그러다 행여 나는 저들보다 나은 것처럼 굴까 하여 두려움이 또한 동시에 들어서이다. 이에 늘 기도하기를, 누구와의 대화에서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기를.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141:3).
나는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으로 두렵다. 하여 약물을 먹기도 하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장하고 괴로워도 하나 그와 같은 고통이 오히려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필요로 하게 한다. 부디 오늘의 문제로 저들 가정이,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기신 사명이 끝내 완수되기를.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50:1).
오늘 우리는 표본이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의 결실이라. 저는 전능하신 이시다. 우리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2).” 이는, 하나님의 임재 저가 계신 곳을 사모함이니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
(2-6).
내가 누구인지, 어째서 오늘 나로 여기에 두셨는지, 나 같은 죄인으로 주를 사랑할 수 있게 하셨는지… 이를 위하여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온갖 고난을 겪으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우린 주의 절대값이다. 한데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0-11).” 대체 우린 무얼 바라고 사는 것일까?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7).
하여,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4-15).
이 놀라운 축복 앞에 다른 무엇으로 견주고 다투고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아갈 것인지.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5-6).” 성경이 주시는 확신이다. 말씀의 보증이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34:7).
언제까지 주를 멸시하고 경멸하며 능욕할 것인지?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21).
두렵고 부끄럽고 송구하여 감히 얼굴도 들 수 없는 죄인인데, 그런 나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면…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주를 경외함,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없다면 더는 가망이 없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그래도 그럭저럭 살만하고 적당하니까 여전히 그러고 살아도 되는 줄 아는 것보다 미련한 삶은 없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2).
이를 듣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 앞에 옷을 찢지 않는다면, 회개가 없다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8).” 이제 부디 우리의 남은 생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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