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왕하 23:25-26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유월절 준수는 앞서 요담과 므낫세와 달랐음을 분명히 한다. 사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유월절을 준수하고 히스기야 때를 제외하고 유월절을 준수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솔로몬 때에 무교절과 각종 절기를 준수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대하 8:12-13) 유월절의 의미를 생각할 때 그리 간단하게 언급할 문제는 아니다. 히스기야 때도 유월절을 지키기는 하였다지만 1월이 아닌 2월에, 또 백성들 가운데 규례를 어긴 자가 많았다는 데서 온전히 준수한 것 같지는 않다(대하 30:1-27).
그런데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왕하 23:23).” 하는 오늘 본문의 내용이 눈에 띈다. 이는 이어지는 말씀으로도 볼 수 있듯이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곧 말씀을 철저히 준행하려 하였고 그에 따른 평가는,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24-25).” 그만큼 그의 신앙은 하나님 중심으로 온전하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26).” 하나님의 진노는 뜨거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27).” 이것으로 나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늘 회의적이다. 저의 연장된 생명 15년에 얻은 므낫세의 악행이 그만큼 무겁다. 결국 요시야는 앗수르의 북상을 막다가 바로느고와 므깃도에서 죽는다. 므깃도 전투는 B. C. 612년에 치러졌다. 애굽 왕 느고와 앗수르의 재기를 막으려 애굽의 북상을 저지하려는 요시야와 충돌하였고 느고에 의해 죽는다.
역사적인 사실과 성경에서 묘사되는 요시야의 모습을 살피면서 저의 철저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된다. 곧 자기 생각을 버릴 때 말씀에 집중할 수 있다. 21-23절에서 웃시야가 유월절을 준수하였던 보도가 나온다. 요시야는 이를 보고 유월절을 지키도록 한다. 사사시대 이후 유월절 준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덧붙는다. 이는 요시야가 가장 철저하게 말씀 중심으로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래저래 구색을 갖추는 정도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말씀대로 순종하는 데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유교절은 단 하루지만 7일간 지켜야 하는 무교절과 연결된 것으로 엄밀히 8일을 지키는 셈이다. 이를 20세 이상의 남자면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야 했다. 지금의 태양력으로는 농사철인 3, 4월에 해당된다. 사사시대는 특히 외세의 침략이 잦았다. 이를 고려할 때, 것도 농사철에 말씀을 준행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집중하게 되는 것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말씀은 때로 현실을 고려하지 않으신다. 형편과 사정을 일부러 그리 난처하게 하시는 것도 같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귀한 것은 저가 ‘말씀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저들이 모두가 아니라 할 때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신 1:35-36).” 이를 예수님으로 대비하는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 이해가 좀 더 수월하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곧 ‘자기를 비운다’는 말… 나는 요즘 김훈의 <하얼빈>을 읽고 있다. 작가는 이를 50년 동안 가슴에 품고 있다 더 늙기 전에 썼다고 방송에 나와 말했다. 덧붙여 설명하기를 젊은 나이에 안중근은 오로지 자기를 비움으로 이토의 세상을 끊을 수 있었다. 하물며 하나님의 세상을 마음에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자신을 비운다’는 일은 기타 여러 상황을 고려하고서는 불가능하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으로서’의 명분과 당위로는 번번이 막히는 게 실천이다.
제정신이 아니고서 아브라함이 일흔일곱의 나이에 것도 평생 일가를 이뤄 살던 우르를 떠나 막연하기 짝이 없는 말씀을 따라 갔다가는 게 말이 안 된다. 자신들도 눈으로 보고 불가능하겠다는 판단을 갈렙이라고 하지 못했겠나?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약속을 우선하였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는 저의 말에 출처는 하나님이심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하고 바로 그 말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교회를 이뤄간다는 일은 말의 온전함이다. 말씀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실천도 업적도 헛되다. 말씀에 중심을 두지 않으면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고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 성경 66권의 말씀은 오로지 하나님을 알린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16).” 이것이 오늘에도 교회이고 예전에서 모든 신앙의 중심이었다.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말씀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덧붙여 여러 사연과 고려해야 할 문제와 현실적인 어려움을 감안해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환경과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안중근이 이토를 죽일 때도 저의 일념은 오로지 다른 무엇도 그려하지 않았다. ‘하얼빈’으로 그의 아내와 자식이 하루 뒤에 도착한다. 이토를 실은 열차가 하루 전에 도착하였다. 앞서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거사를 치를 준비가 끝난 뒤였다. 저가 고려해야 했을 심정을 작가는 방송에서 덧붙였고, 나는 <하얼빈>을 읽으며 교차하는 여러 생각으로 마음이 벅차기도 하였다. 자신이 돌봐야 할 가족들이 온다. 거사를 치른 뒤 자신의 퇴로를 고려해야 한다. 실패나 성공도 따져야 했다. 그러나 저는 오로지 이토의 세상을 끝내야 했다.
요시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 말씀을 준행하는 과정에서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예수님은 일러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그럴 수 없는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을 고려하여 안 믿는 사람과도 뜻을 같이 하고, 앞서 자녀를 돌보고, 자신의 할 일을 확장함으로 말씀을 잠시 뒤로 미루기도 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만일 그러했다면 안중근의 거사는 미뤄졌을 것이고 끝내 실행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저는 퇴로를 염두에 두지 않았고, 아내와 자식이 하얼빈으로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한 마음’을 지켰다. 한 발이 남은 저의 권총을 두고 후에 일본의 재판정에서 자결하려 하였나? 하고 물었을 때 안중근은 오로지 이토를 죽이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김훈의 소설을 통해 안중근을 읽으면서, 오늘 요시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을 연관지어 생각한다. 곧이곧대로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24).” 요시야의 뜻은 오로지 ‘말씀을 이루려 함이었다.’
주의 말씀을 꺼려하는 모세를 향해 하나님은 되물으신 바 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출 4:10-11).” 어쩜 우린 너무 많은 상황을 고려한다. ‘사람이 다 그렇지 뭐’ 하는 심정으로 말씀은 말씀으로 놓고 삶은 삶대로 산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정도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히 11:17).”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말씀이 원하실 때,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11).” 이와 같은 말씀을 기준으로 모든 선택과 행함이 이루어진다면 어떨까? 나는 친구에게 안 믿는 자와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도의적인 관계로 손위 어른을 모시고 무슨 절에 모시고 갔다는 누구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자신을 두고 뭐라 하는 말을 꺼려하는 것에 나는 이해한다. 굳이 내 말을 들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누구라도 ‘자신이 알아서’ 하고 있는 일에 말씀을 운운하며 뭐라 이르는 소리를 달가워할 리 없다. 다만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누구에겐 말을 하다 말고, 누구에게는 침묵함으로 나의 소심함은 좋은 관계라는 배려로 탈을 쓴다. 그래놓고는 혼자 마음이 안 좋다. 싫어할 걸 알고, 그래서 곧 전화하겠다 하고 전화가 없나? 하루 종일 누구의 연락을 기다리기도 하고… 친구인데도 말을 하다 쭈뼛거리고는 내내 신경이 쓰이고… 손위 사람이라 그렇기는 하지만 뭐라 말도 않고 침묵하는 것을… 나는 주 앞에 고한다. 조금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도 싫어하고 그러든가 말든가 내심 상관도 않는 것으로 존중을 가장하고 살아왔던 것을 인정한다. 목사로서 말씀을 가지고 때론 어떤 말을 전하는 데 있어 주저해도, 침묵해도, 말을 하고도 혼자 또 어려운 마음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오늘 시편,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0).
정하고 새롭게 하지 않으시면 나야말로 단 한 시도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아신다. 다윗은 죄를 짓고 이를 먼저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1).
주의 인자와 긍휼하심이 아니면 우린 무엇으로 살 수 있을까? 결국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사 29:15).”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슨 환경과 조건을 들먹이며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내세울 수 있을까? 이어지는 말씀으로도 알듯이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16).” 저는 나를 속속들이 지으셨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내 속을 나만 모르고 사는 게 너무 많다. 한데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과연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은 그래서 충고하신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무엇보다 우리로 다행한 일은, 나의 죄가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더 크고 넓고 깊고 높으시다. 그런 주 앞에 오늘도 아뢴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88:15-16).
할 때에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하여,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3).
주 앞에 나를 인정하는 것.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이에,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32:5).
다윗도 이를 다시 되새기며,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1:4).
이는 죄의 특성으로 나는 담당할 수 없음을. 나의 속성이나 갈등을 모두 주가 아심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5-6).
곧 우리의 어쩔 수 없음도 주 앞에 내어놓아야 한다. 자신을 비워낸다는 것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3-14).” 그러니까 백날 괴로워한들 소용없다. 주저하고 미적거리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결국은, 총을 쏘아야 하고 가지고 있는 총알을 다 퍼부어야 한다. 다음 일은 고려하지 않고 말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0).
이는 결국 하나님이 아니면 해결이 안 된다는 소리다. 말씀이 아니면 간다고 열심히 가는데도 허사일 뿐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로 산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를 중심에 두고 살 수만 있다면! 이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하여,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4-15).
고로 나는 이제 무엇으로 사는가?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말씀을 되뇌고 되새김질하며 그럴 수 없는 나와 다투며 싸우는 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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