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왕하 24:3-4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시 52:8
결국 바벨론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이 일이 일어나고 오늘 본문은 남유다 여호야김 시대의 이야기다.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 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 오늘 시작은 우울하다(1). B. C. 605-562년 바벨론 느브갓네살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 느고를 치고 여세를 몰아 당시 애굽을 의존하던 유다를 쳤다. 여호야김은 즉시 항복하고 느부갓네살을 섬겼다. 이때 바벨론은 다니엘을 위시하여 그의 세 친구와 유다 귀족과 왕족들 자제를 포로로 끌고 갔다(단 1:1-7).
기록에 보면 이때 여호야김도 포로로 끌려갔다고도 하나(대하 5-7) 위협에 그친 듯하다. 여호야김이 3년을 바벨론을 섬기다 배반하자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였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았다(2). B. C. 602년의 일이다.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한 것은 애굽을 등에 업고 버린 것으로 친 애굽 정책은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왔다(렘 27:7-11).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두 가지 내용이 있다. 하나는, 이미 앞서 여러 번 선지자들을 통해 이와 같은 일을 경고하셨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자 하나님의 선민답게 돌이켜 여호와를 찾지 못하고 애굽을 의존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3).” 하고 ‘므낫세의 죄 때문’으로 돌린다. 이는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4).”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하기보다 애굽에 의탁하여 바벨론의 통치를 물리고 독립하려 하는 여호야김의 선택도 한심하다. 그를 이어 여호야긴이 즉위하자 바벨론의 3차 침공이 일어나고 유다를 완전히 유린한다. B. C. 597년의 일이다. 성경은 오늘도 일러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하고 엄히 경고한다. 앞서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하였던 유다와 같이 이를 또한 무시한다면 저들의 종말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는 과정이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146:3-4).
이 일은 이미 작정된 일이다.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사 10:23).” 한데도 우리 역시 오늘도 다르지 않다. 무슨 일로 주일을 지키지 못한다 하고, 누굴 모시고 어느 사찰을 갔다 왔단 소리도 들리고, 그러한 일에 대해 뭐라 이른들 소용이 없어 나는 입을 다문다. 그럼에도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왕하 18:21).” 오늘 우리의 애굽은 무엇일까?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신앙적인 양심을 저버리고 당장의 안위를 위해 모색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형편과 사정이 실제 우리의 믿음 위에 있다. 그러니 늘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은 그게 아니라.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사 36:6).” 수천 년 전 저들이 그러했듯 오늘도 우린 ‘애굽’을 믿는다. 그것이 돈이거나 사람 관계다. 자기 신념이나 스스로 구하는 보람이다. 그러나 알게 될 것이다.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겔 29:6).”
누가 죽었다. 며칠째 설사를 하다 장염인가 하고 입원을 했다가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칠 일만에 죽었다. 저의 소식을 알리는 누구에게 그와 같은 일은 경고임을, 하나님이 우리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할 따름인가를 알게 하심인 것을 말해주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
성경은 여전한 말씀이다. 오늘도 이런저런 입을 통해 주의 뜻을 전한다. 이를 귀 기울여 듣기에는 세상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모든 게 잘만 돌아가서 성경은 유물이나 고전, 전래동화 수준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또는 말씀은 듣되 이를 삶으로 받을 능력이 없다. 심리학이 신학을 밀어내고, 유명인의 조언 한 마디가 성경 어느 구절을 다루는 설교보다 크게 다가온다. 며칠 전 누구에게도 또는 아내에게도 ‘오은영’이 대신하는 상담의 위험성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저의 방송을 새겨듣고 이를 삶에 적용하는 일이 오늘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보다 우선되고 있다. 점점 사람들이 만든 세상은 강해지고 사람들은 나약해진다. 특히 믿는 자로 안 믿는 자와의 상담으로 자신을 회복할까 하는 일이 가소롭다. 오늘의 ‘애굽’은 그뿐 아니다.
그나마 이념과 가치는 사라지고 돈과 안위만이 우선이다. 뭐라 꾸며 자신을 과대 포장하지만 결국은 돈 때문에 점점 개인방송이 늘고, 세를 넓히려 막말과 거친 언행도 서슴지 않는다. 그나마 상식도 철학도 잃어가는 시대다. 이에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롬 9:28).”
말씀 앞에 두려움이 들지 않을 때 신앙을 저버렸다는 뼈저린 자각이 있어야 하는데, 저마다의 논리가 저를 삼킨다. 어떤 이는 퇴임한 대통령 집 앞에 진을 치고 욕지기를 일삼는다. 각 가정은 부모의 권위를 상실한 지 오래고, 아버지 부재의 가정은 날로 늘어난다. 권위적이란 말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권면은 사사로운 꼰대로 취급당하는 시대다. 이는 결국 오늘의 문제로, 곧 자기 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 자식이 이를 보고 따르고 자식에 자식이 더한 욕구로 망가진다. 게임에 빠진 아이는 생명을 경시하고 거짓말에 능숙하다. 어느 아이는 가상세계에서 만난 사람과 가상결혼을 하고 성관계를 맺다 실제 현실에서 순결을 잃기도 하였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10).”
결국 오늘에 겪는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무시한 데서 오는 결과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뭐라 이른들 이를 듣기 싫어하면 별 수 없다. 나는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난다.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 사사로운 부부의 문제로 전락한 것에 대하여, 아이의 영혼을 두고 주 앞에 구하여야 할 일이 심리적인 치료를 강구함으로 여느 ‘그럴 수도 있는 일’이 되어 허공을 떠돈다. ‘다 그래’ 하는 말 앞에서 성경의 어떤 권면도 경고도 면구스러워진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우리는 죽는 날까지 씨름하는 게 일이다. 특히 목사로 사명을 다한다는 것은 이 길이 맞나? 하는 갈등에서부터 굳이 이렇게 참고 견뎌야 할 가치가 있나? 하는 데까지 끝이 없다. 이번 주 필리핀 동생 목사 가족이 다시 사역지로 들어간다. 이번 주 토요일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에 들러 점심이라도 먹기로 했다. 혹시 몰라 나는 두 달 치 위장약과 진통제를 처방 받아왔다. 가지고 있는 마스크를 모아 줄 수 있는 만큼 챙겼다. 한 끼 밥이라도 사야 하는데, 이번 달은 어쩐 일인지 월초에 주곤 하던 ‘목회자 사례비’ 50만원도 아내에게 주지 못했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와 우울감으로 주의 이름만 되뇌고 있을 때, 뜬금없이 누가 얼마를 보내왔다. 아내 카드로 우선 밥이라도 한 끼 사야겠다 하고 있던 것이 딱 그만큼, 하나님은 또 나를 웃게 하신다.
저는 무슨 병일까 하여 검사를 받고 치료를 하였는데, 결과는 우려했던 일이 없었고 오히려 뜻하지 않게 병원비가 환급되어 나왔다며 돈의 출처를 설명하였다. 나나 저나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글방이 교회되고 나의 모든 수입원을 주 앞에 맡기면서 생기는 일들이라, 나야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을 두고 더는 씨름하지 않는다.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평소 먹는 약을 더 챙기고 가지고 있는 마스크를 우선 덜어주는 것뿐인데… 나의 실전은 이처럼 생생하고, 그때마다 주의 자비하심은 허상이 아니라 실제적이어서 구체적인 내 삶의 증거가 나로 이 길이 맞다,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 거 보면 나는 늘 주의 긍휼하심으로 보호를 받는다. 09학번 신대원 때도 아니 더 이전 97학번 신학부 때도, 뒤늦은 신학에 망설이고 있을 때 실제 저들이 왜 그러는가 싶을 정도로 나는 한 번도 학비를 한 번도 내 돈으로 낸 적이 없다.
그러니 지금도 종종 돈 벌 궁리를 하다가도 나의 남은 생을 목사로 세우신 이에게 나의 수입원을 맡긴다. 다만 나는 말씀 가지고 씨름하고, ‘나처럼’ 고집불통에 상한 영혼을 가지고 사는 이를 보내시면 이를 붙들고 다투는 게 이제 내 일이다. 어제도 오전에 정신과에 들러 먹는 안정제를 타는데, 저는 말하길 본인도 어려운데 왜 그런 일(?)을 하는가? 하고 물었다. 대답을 안 하자,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을 덧붙였다. 저의 말은 이게 다 스트레스 때문이고 긴장감 때문인데, 남보다 예민하여 그 수밖에 없다고 하는 소리였다. 그런 그에게 나는, 환자인 게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나의 말을 저는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상관없는 일이다. 약을 처방하며 굳이 저의 위로는, 그럼 긴장을 좀 풀 수 있는 취미나 여유를 권하는 게 전부였다. 나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감추고 돌아서 나왔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90:12).
이를 안다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그 때를 행여 잃을까 하는 것이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이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와 같은 인생을 두고 아등바등 기를 쓰고 산다고 사느라, 정작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려하기보다 저마다의 ‘애굽’에 기대 의존하려는 바가 너무 크다. 그것이 보편적가치가 되어 모두는 옭아맨 듯하다. 한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을 알면서도 오늘 저 감정에 끌려가는 셈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나는 점점 옥좨 오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슬프다. 하나님의 격노하심이 두렵다. 그럼에도 저들은 ‘애굽’에 의탁한다. 자신들 나름의 보람을 두고 씨름한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5-16).” 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이와 같은 감격이 나로 다시 한 걸음, ‘아직도 가야 할 길’을 가게 하신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52:1).
세상은 ‘애굽’을 자랑하나 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심을 느낀다. 포악한 자 ‘도엑’의 밀고로 인해 주의 선지 생도들 85명이 학살당했다. 그러할 때 다윗은,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18:29).
곧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고 교묘하게 자기만족으로 부유하게 산다 해도,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7-8).” 그러니 누가 뭐라 한들 악을 악이라 여기지 않고 저마다의 ‘애굽’을 마땅한 권리로 삼는 데야 더는 뭐라 하겠나? 저들은 다만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 가운데에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미 7:3-4).” 말씀의 경고가 실은 저들을 향한 말이 아니라 이를 새겨 듣는 자의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03:18-19)
묵묵히 더하신 바 이 길을 간다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심지어 내 안의 갈등이 나로 들들볶아 ‘차라리 다른 일을 하시라’ 하는 정신과 의사의 말을 듣는다 해도, 나는 저를 말로 어찌 이해시킬 수 없어서 ‘나는 내가 환자인 것이 다행이다.’ 하였는데, 저는 어찌 들었을지.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이 시대의 ‘오은영’과 ‘개는 훌륭하다’는 프로가 나는 중첩되어 슬프다. 그야말로 점점 더 개만도 못한 사람들로 살면서 개처럼 목줄을 하고 끌려 다니는 신세로 산다. 그리 살면서도 정작 한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64:3-4).
곧 오늘 시인은,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3-4).
하고 우리 시대의 ‘도엑’들을 향해 소리친다.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4).
어릴 적, 악다구니를 써가면서도 부모의 사랑과 이웃의 정을 느끼며 살았다. 오늘은 서로 다만 ‘친절한 타인’으로 존중과 배려를 우선하며 담장을 높이 쌓고 산다. 온갖 개인방송이 난무하고 정제되지 않은 말들이 돈이 되어 담장을 더욱 높이 쌓을 뿐이다.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 59:3).” 이는 시대를 지나 신약에 이르러서도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하여 오늘에도 다르지 않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5).
저들의 결국이 우리에게 향하신 메시지다. 그러므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저들이 아니다. 내 안의 ‘도엑’이고, 내가 지향하고 의지하려는 ‘애굽’이다. 이를 알고 두려워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5-16).” 저들은 저들의 길로 가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뿐이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7-8).
역설적이게도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가야 할 길의 불빛은 더욱 빛난다. 이번에 필리핀 동생이 겪은 일로 우리는 오히려 아직 아이인 저와 그 엄마를 안타까워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저들의 어쩔 수 없음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푸른 감람나무라.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될 뿐이다. 세상은 점점 더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2-3).”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이 글을 쓰고 있었을 모습을 상상하며,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9-11).”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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