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왕하 25:7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 53:6
모두 4차례에 걸친 바벨론의 유다 침공의 마지막 때, 남유다 20대 왕 시드기야가 21세에 즉위하여 유다가 멸망하기까지 11년을 다스렸다(B. C. 597-586년). 저 또한 그 전 여호야김의 행위와 같이 악을 행하였다. 결국 친애굽파 거짓 선지자들의 선동에 중동 국가들(암몬, 페니키아, 모압, 에돔 등)과 연합하여(겔 21:18-22) 바벨론에 대항하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고에도(렘 27:1-22) 시드기야는 이에 반바벨론 국가들과 연합하여 대항하다 B. C. 588년에 전격적으로 유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포위된다. 시드기야는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며 항전하지만 결국 B. C. 586년에 유다는 멸망한다. 그리고 저는 자식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당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유다 사람은 4천6백명이었다(렘 52:28-30).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는 60여 명의 유다의 관리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도한다. 일련의 역사적 사실을 읽으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나 그것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새삼 느낀다. 시드기야에 대한 평가는 저렴하다. 저는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보면 저는 예레미야 선지자와도 가깝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그 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었더라(렘 37:3-4).”
그렇듯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나님의 뜻을 묻기도 하고 이를 듣고 깨달아 알기는 하였던 것 같은데, “모든 고관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물으매 그가 왕이 명령한 모든 말대로 대답하였으므로 일이 탄로되지 아니하였고 그들은 그와 더불어 말하기를 그쳤더라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 뜰에 머물렀더라(38:27-28).” 아는 것과 행하는 일은 별개였다. 듣고 깨닫고 알기는 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아 결국 자기 판단으로 이 모든 일을 다스렸던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알고 그 마음에 주를 생각하는 것과 아는 것이 있다 해도 삶에서 이를 실천하지 못할 때, ‘악을 행하였더라.’ 하는 성경의 평가는 가혹하지 않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나는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눈여겨 찾아보면서 어제 통화한 누구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몇 년 만의 통화였다. 멀리 떨어져 살기도 하나 늘 같은 문제를 안고 씨름하면서도 여전하여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여전하여서 저는 모처럼 통화에서 현재의 사역에 대한 마음의 회의를 털어놓았다. 곧 자신은 말씀을 사모하고 증거하기를 갈망하고, 이를 위해 부르심에 대한 열망이 있는데 몇 년째 묶인 사람처럼 ‘교회 행정 간사’로 일하면서 저의 표현대로 잡다한 일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론 그 일도 주의 일이라 여겨 감사함으로 실천하면 좋을 텐데 저의 속에는 말씀을 증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저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을 직접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주하는 데도 그저 실무적인 일 외에 ‘전도사’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컸다.
여러 말 가운데 ‘은혜가 없어서’란 표현에서 나는 가슴이 아팠다. 속도 모르면서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하고 되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저의 사정과 그 형편은 알 바 아니었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오늘 시드기야 왕의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저 또한 처한 상황이 여의치 않고 ‘어쩔 수 없는’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예레미야와 가까이 할 수 있었고 저에게 하나님의 뜻을 듣고 알고 깨닫기도 하면서 결국은, 악을 행하였다. 곧 은혜란 그런 게 아니다. 은혜가 없다니! 오늘 내가 지금 여기 앉아 이렇게 묵상을 하고 글을 쓰고 누굴 생각하고 주의 생각을 더듬는 게 은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있는 자리에 은혜가 있다. 우리의 모든 게 은혜다. 우린 언제나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런 일’로 늘 마음이 어렵고 그 영혼이 답답하다는 소리를 수년 전에도 들었다. 어쩌면 신대원을 졸업 후 내내 저와의 통화나 그의 사역에서 나는 감사를 듣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 속에 은혜가 없어서’라는 표현에서 나는 허리를 숙이고 전화기에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은혜를 은혜로 삼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어쩌면 늘 돈 문제 때문이고, 또는 살아가는 날들의 형편과 사정 때문이다. 앞서 나는 그러한 일은 알 바 아니란 표현을 쓴 것 같은데, 그런저런 형편을 고려하면 은혜는 없다. 내 주변에도 믿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더 어려움을 겪고 그 형편이 궁색하다. 오히려 적당히 또는 멀찌감치 떨어져 믿는 것도 안 믿는 것도 아닌 상태로 사는 사람들이 룰루랄라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우리의 기준이 이 땅에서의 안위와 평화와 행복으로 측정되는 것인가? 여기서 바울의 고백을 되새겨본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 4:11-13).”
나는 오늘 일부러 이와 같은 구절의 말씀을 문단 밖에 배열하며 글을 쓴다. 한 번 쭉 이어서 읽을 내용이 아니다. 되새기고 또 곱씹어서 입이 헐 정도로 다시 우물거리며 되뇌어 묵상해야 한다. 오늘 시드기야의 최후는 글에 적힌 내용을 읽기에도 참혹하다. 우리는 아는 것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니다. 몰라서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어쩌다 내가 가까이 하게 되는 이들이 사역자들이 많은데 현실에 안주하면서 사역은 희석된다. 또는 염려와 근심으로 늘 사역은 뒷전이거나 그 길을 가긴 가면서도 우회하는 길을 택한다. 혹은 늘 그 자리다. 그 이유는 하나 같이 ‘저마다의 사연’이다. 모두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를 말하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내가 권하고, 말하고 싶은 것이 공중에서 흩어지는 것을 자주 느낀다. 저들 삶에까지 전달이 안 된다. 마치 예레미야의 말이 시드기야에게 들리나 그 삶에까지 닿지는 않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결국은 행함으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거칠 게 표현하면 나는 종종 나에게 ‘닥치고, 해!’ 하고 무작정 끌고 간다. 육체의 약함은 의지로 견딜 수 있다 해도, 이 새벽 이 평온한 시간에도 안정제를 삼키고 가슴을 쓸어가며 빈맥을 진정시킨다. 어떤 불안이 혹은 염려가 나를 쥐고 흔드는 것인가? 나는 더 이상 그 이유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날씨 탓인지 몸이 무겁고, 잠에서 깨면 마음은 저 혼자 힘들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자면 빼곡이 수십 장의 이유도 쓸 수 있다. 그럴 때 내가 내게 하는 말, ‘닥치고 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바울의 표현과 나의 표현은 질적으로 다르지만, 나는 나를 안다. 나를 둘러싼 여러 문제의 것들도 안다. 일일이 반응하고 하나하나 대응하려하면 주의 일은 자꾸 뒤로 미루어야 한다. 가령 누가 온다고 할 때, 내 안은 벌써 방어 상태로 거부감이 먼저 든다. 그럼에도 만나기로 하면 그 뒤로는 거의 나 혼자만의 전쟁이다. 그럴 때 어찌 나를 다스릴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수밖에… 내가 아는 나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한 것 중에 하나가 규칙대로, 정한 대로, 해야 하는 일에 우선하는 것, ‘닥치고 해!’ 하며 자신을 부여잡지 않으면 내가 나로 상투 잡힌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어렵다. 다 아는데, 내 몸도 현실도 그럴 처지가 아니라고 한 발 물러서면 더는 앞으로 갈 수 없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
곧 나는 믿고 붙든 것이, 내가 곧 은혜다. 이는 나를 스스로 높이려는 게 아니라 나로 은혜 안에 살게 하심을 안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1-12).” 이를 위하여 내가 가는 곳에, 하는 일에, 주의 은혜가 항상 함께 하신다. 은혜는 수고하게 한다. 은혜는 복종함으로 무던하게 한다. 왜? 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도 그게 은혜인 것은 안다. 나는 은혜 없이는 단 한 시도 살 수 없다. 그럴 때 정신과 약을 먹든지, 늘 위장약과 진통제를 달고 살든지, 하루도 몸에 파스를 안 붙이고 사는 날이 없다 해도… 그래서 한 발 밀리면 다시 나아가기 위해 두 발을 뗄 수가 없다. 한 발 밀렸다 한 발 나아간들 그 자리가 늘 제자리다. 그러느니 나를 질질 끌고서라도 반 발짝, 반에 반 발짝만이라도, 오늘은 이만큼, 이것까지만… 하는 심정으로.
은혜는 능력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다시 말하지만 내가 은혜다, 하는 것은 능력 주시는 자를 내가 알고 믿고 의지하고 그 안에 거함으로 확신한다. 어찌 나 같은 것을 여기까지 사랑하시고, 교회를 맡기시고 이 귀한 말씀 앞에 앉히시는지. 왜 하필 나 같은 죄인을 굳이 주의 자녀 삼으시려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기까지 하셨는지. 이에 나는 한 영혼, 내 곁에 두시는 저이, 저 심령을 두고 교회를 한다! 교회를 한다? 교회가 된다. 은혜는 이곳에 있다. 나는 감히 말하건대 개척교회 예찬론자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앞서 저이에게도 계속 교회에서 그런 일(?)을 하면서 그 마음에 은혜가 없다 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 가운데 분명히 곁에 두시는 상한 심령이 있을 텐데, 저는 그리 여겨볼 겨를이 없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 문제로 눌렸고, 하나는 ‘그런 일’ 곧 만족함이 없는 데 따른 불평하는 마음 때문이다. 주께 맡기면 주가 하신다. 은혜는 온전히 주를 인정하는 일이다. 은혜는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는 이 말씀에 항복했다. 그런 뒤 나를 다루는 비결은 여러 말 필요 없다. 어쩔 수 없는 이유는 삽시간에 퍼져 나의 영혼을 덮는다. 이에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은혜는 자유다. 아프든지, 일이 안 풀려 사는 게 막막하든지, 내 코가 석 자든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주께 100% 맡기면 주가 100% 책임지신다. 한데 그래도… 하고 이 일 때문에, 저 일은 해야 해서, 누군 그래서 주일을 빼먹는다. 말씀 묵상할 틈이 없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사치다. 당장 먹고 살 궁리로 10, 20, 50% 점점 더 내가 해야 할 몫이 는다. 하나님 앞에 맡겨둘 수 없다. 그러느니 뭐라도 하는 게 나을 듯하여, 싫다면서 몇 년째 그 일을 하면서 신음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28:7).
나는 잘 하고 못 하고를 생각하지 않고 그야말로 닥치고 한다. 공휴일이든 무슨 날씨든 어떤 날이든 더는 의미가 없다. 묵상하고 글쓰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고 이를 위해 저녁 약속을 포기한지 오래다. 낮 동안에는 그렇다고 내가 무슨 프로그램 된 것처럼 성결하고 경건하게 주의 일(?)만 하는 게 아니다. 주의 일인지 아닌지, 나는 그것에서도 자유하다. 김훈의 <하얼빈>을 읽고, 존 파이퍼 목사의 설교 영상을 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재방송으로 본다. 나는 늘 은혜 가운데 산다. 은혜는 수고하게 하면서 자유하게 한다. 은혜는 아무 일에든지 주를 바라게 한다.
오늘 시드기야의 결국과 유다의 결국을 읽으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한 생의 의미를 묵상한다. 누가 어떻게 사는지, 얼마나 사는지, 왜 사는지. 삶의 목적은 다르겠으나 하나다. 은혜로 이를 앎으로 은혜 가운데 들어갈 영생의 나라에서도 은혜로 산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고 은혜로 살다 은혜 가운데 죽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53:1).
어쩌겠나?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세상이 어떠하든지, 오늘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2-3).
이것이 우리 현실이고 나의 실체인데, 왜 나 같은 자에게 이 귀한 사명을 맡기셨나? 하고 생각하다 답은 결국 하나였다. 은혜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하면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4-5).
처한 현실이 감사를 빼앗는다면? 지금 하는 일에서 은혜를 느끼지 못한다면? 성령 충만을 구한다면서, 은혜의 용기가 없이는 어림없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삼상 12:15).” 그러니 오늘의 이 모든 게 나로서는 은혜다. 나는 은혜로 호흡한다. 은혜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고로 오늘이 은혜 받을 만한 때이다. 바로 지금이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이에,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6).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0) | 2022.08.22 |
---|---|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0) | 2022.08.21 |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0) | 2022.08.19 |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0) | 2022.08.18 |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0) | 2022.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