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은 조상들이라
대상 1:1-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 54:4
역대 왕들의 시대가 지나고 포로기에 이르며, 저들 선조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는 것을 본다.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다윗 왕조로 두고 남유다 왕국을 중심으로 정리되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에서부터 선민의 계보를 정리하였다. 후에 바벨론 포로기가 끝나고 귀환한 남유다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록된 족보라 하겠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함께 노아의 혈통으로 이어져 그 가운데 노아의 셋째 아들 야벳의 후손과 둘째의 후손과 장자의 후손이 기록되는 것을 본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10대, 셈에서 아브라함까지 10대로 정리한 게 특색이다.
특히 노아에 이어 세 아들이 모두 언급된다. 이는 홍수 이후 인류의 새로운 지평을 알린다. 그런데 노아의 첫 아들을 나중에 기록하고 있어 축복의 시조인 아브라함으로 연결 짓는다. 곧 온 인류는 한 하나님과 한 조상으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다 선민이 구별되고 인물과 가계가 나뉘어 선민 이스라엘의 시조가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두에게 아브라함은 ‘아버지’로 불렸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24).”
아담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에서 갈리지만 모두의 뿌리는 하나인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인류의 시작은 하나님이시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6-27).” 모든 족속은 한 혈통으로,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으신다. 누가의 기록에서도 그 족보를 아담에서 하나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 3:38).”
바울의 사상도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롬 3:29).” 곧 모두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하여 배타적인 자세로 선민의식이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제한할 수 없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대상이며 이를 우린 복음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데 주목하게 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0:12).”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언제든지 믿음과 신앙의 뿌리를 남겨놓으셨음을 알게 한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 사이에 아벨이 죽고 하나님은 ‘셋’을 더하심으로 그 이름의 뜻도 ‘대신 주셨다’는 의미를 갖는다. 아벨 대신 신앙의 계보를 잇게 하시려고, 이에 오늘에 이르러 교회의 뿌리가 되고 신앙의 혈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온 인류가 멸망당해야 할 죄악 중에도 노아를 세우시고 믿음의 그루터기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 6:13).”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남기심의 원리를 알 때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의 더 큰 그림을 보게 된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는 그 명맥을 이어왔고 믿음의 혈통은 이어져서 면면이 그 시대의 남은 씨로 여겨진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9:29).” 그런 가운데 나는 어제 문득 나의 부친의 대에서 신앙의 뿌리가 더해져 오늘의 대를 이어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물의 길이 끊어졌다 이어져 결국은 바다에 이르기까지,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16:17).
오늘의 나와 우리 가족들을 생각하였다. 끊어질듯 이어져 이미 마른 줄 알았던 내게도 생수의 강은 흐르고 있음을 말이다. 필리핀 동생네 가정이 다시 사역지로 돌아가기 전에 인천으로 모였다. 동생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한두 주 더 남았고, 가족들은 떠나기에 앞서 전날은 매형 교회에서 찬양의 시간들을 가졌다. 각각 찬양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가족 단톡방에 올렸는데, 나는 하나하나 그 찬양을 들으며 새삼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하였다. 지금 다시 사역지로 나가면서 아무런 보장도 없다. 들은 바로는 통장의 잔고로 두어 달 뒤면 바닥이 나서 정리하고 들어와야 한다. 그런 가운데 동생은 어느덧 15년 필리핀 사역지에서의 생활은 늘 그때마다 하나님이 주관하심으로 이어졌음을 고백했다.
곧 우리의 시조는 하나님이시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올해 안에 정리하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고 더 계획하신 바가 있다면… 우리는 알 수 없는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어떻게 될지, 오히려 일련의 사태로 그간의 길목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그때마다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를 고백하는 동생의 말은 진중하였다. 우리의 힘과 영광은 하늘에 감추어져 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셋’의 아들로 에노스를 주셨는데 아담의 손자인 에노스의 이름의 뜻은 ‘연약한 사람’이란 뜻이다. 실제 심신이 연약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기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사람임에도 에노스는 기독교의 큰 공로자로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나는 오늘 본문의 계보에서 부친의 때에 우리 가문에 복음이 깃들면서 그 뿌리가 이어지는 데서 감회가 새롭다. 곧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37:18).
곧 지금의 모든 상황을 주께 놓고 오라, 하시면 오면 되고 더 있으라, 하시면 더 있으면 된다는 동생의 말이 나는 가슴에 남았다. 이는 우리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닐 터,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주가 우릴 위해 일하신다.
전혀 이 길을 가지 않을 것처럼 주를 멀리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나에게도 오늘 이렇게 주의 길을 가게 하심은 전적인 은혜다. 나의 의지나 어떤 노력으로 이른 길이 아니고, 때가 되어 ‘에노스’에 이르러 부친을 전혀 안 믿는 가계(家系)에서 불러내시더니, 이처럼 그 자손들이 모두 주 앞에 세워지게 하심이었다.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는, 나는 각각 찬양을 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신앙이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계통적인 것을 느꼈다. 하나님은 모두의 하나님이시나 전부의 하나님은 아니신 것이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하나님은 모든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뜻한 바 그 신앙의 뿌리를 이어가신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현실은 어떠하고 앞으로의 일은 장담할 수 없으나 우리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그의 뜻을 헤아려 알 수 있다. 이제 그만 한국으로 들어오기도, 필리핀에 남아 더 그 시간을 이어가기도,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겠으나 분명한 사실은 그 신앙이 우리 대를 지나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하심을 믿는다. 아무리 때가 악하다 해도, 2절에서 보이는 이름 ‘마할랄렐’은 아담의 5대 손으로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찬양하라’이다. 곧 불의가 가득하던, 가인의 후예들의 땅에서 마할랄렐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 살았다.
곧 현실이 어떠하든지 주만 바라며 산다는 일은 특권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3-14).” 우리의 가장 값진 소망은 그 믿음의 계열에 있음이고 이를 이어가는 사명이었다. 형편은 여의치 않아 아이들 용돈도 주지 못하고 보냈지만 저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 한편에 뜨거운 감동과 감사가 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마치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주를 인정하고 저의 도우심을 생의 줄기로 삼고 가는 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므두셀라’는 에녹의 아들이고 ‘라멕’은 노아의 아버지다. 한데 저들의 명맥은 끊어질 듯 이어져 ‘므두셀라’의 뜻은 ‘창 던지는 자’이고, ‘라멕’은 ‘강한 자’란 뜻을 갖는다. 앞서 ‘하나님을 찬양하다’는 뜻의 ‘마할랄렐’과 거리가 먼듯하다. 그렇다고 ‘에녹’의 퇴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불의가 관영한 때에도 ‘노아’는 부르심을 입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6, 8).” 곧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에까지 이어져, 부친의 때에 이르러 오늘의 우리들 모습에 나는 감복한다.
모든 걸 차치하고 내가 이처럼 뒤늦게 주 앞에 세워질 줄이야… 자연스럽게 어릴 적 이야기가 나오면서 나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내가 어떠했는가를 인정한다. 그러니 함부로 속단할 일은 없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그러므로 이제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동생은 일련의 상황을 겪으면서도 그 아이와 아이 엄마의 장래를 두고 안타까워하였다. 되받아 몇 배로 갚아줘도 시원찮을 것 같은데, 가만히 이 모든 상황을 주께 맡김으로 주가 이어가실 다음 행보에 소망을 두는 것이다. 곧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곧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인생 문제의 해결책이다.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이를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54:1).
곧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신 33:27).”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본다. 그럴 때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러므로 우리가 누굴 찾겠으며 무엇으로 위로를 얻을 것인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단 7:22).” 이에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결코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겔 36:37).”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2).
우리의 강청은 역사하는 힘이 크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91:5-7).
주가 보호하심은 살아온 날을 돌아볼 때에 더욱 선명하였다. 어떻게 15년의 긴 시간을 필리핀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는지, 동생은 덤덤하게 고백하였고 나는 그 시간을 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결국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곧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3-4).
우리는 이처럼 어려움을 겪으면서 도리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생생하게 더듬을 수 있다. 그 확신은 손끝에 닿는 실질적인 현실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이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118:6-7).
곧 믿음의 눈으로 보면 현실 너머 하나님의 소망이 눈부시다. 우리로 주를 더욱 찬송하게 하시려고, 라멕의 시대에 마할랄렐을 두신다.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이를 앎으로,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5-6).
모든 찬송은 늘 온갖 시달림과 역경 가운데서 빛나는 성도들의 합창이 된다. 이에 우리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나도 내 안에 어떻게 이와 같은 믿음이 가능한지 알지 못한다. 왜 나 같은 죄인도 주가 그토록 사랑하시는지 나는 또한 알지 못한다. 다만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부디 이제 나의 남은 생은 주의 것으로 늘 그러했듯이 주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부디 동생과 그 가족들 또한 지금의 고초로 주의 사랑이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그리하여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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