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전봉석 2022. 8. 28. 04:39

 

베냐민이 낳은 자는 맏아들 벨라와 둘째 아스벨과 셋째 아하라와 째 노하와 다섯째 라바이며…

대상 8:1-2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 61:2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을 배출한 베냐민 지파의 기록이다. 앞에 7장에서 북이스라엘의 계보를 정리하면서 언급하였는데 이어 이 한 장에서 베냐민 지파에 대해 다룬다. 레위, 유다 지파 다음으로 베냐민 지파에게 이만큼의 지면을 할애하는 까닭은 초대 왕을 배출한 지파이고, 남북이 갈리면서 일부가 다윗 왕조를 지지하였다는 것,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 후 이스라엘에서 베냐민 지파의 비중이 커졌다는 점이다(느 11:4, 7).

 

오늘 본문 1, 2절에서 베냐민 직계 다섯 아들의 이름이 기록된다. 그리고 3-28절까지 장자 벨라와 에훗 계열의 주요 족장들의 계보이다. 에훗은 사사시대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다. 29-40절에서는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왕권을 빼앗겼지만 그 계보를 열거, 징계와 회복은 소망을 가진다는 데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우린 나중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처음과 나중에 한결같으면 좋지만 베냐민 지파의 경우 처음은 비록 좋지 못했다 해도 나중은 북방의 어느 지파보다 나았다. 성경은 베냐민을 ‘큰 용사’라 부른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여디아엘 세 사람이며 벨라의 아들들은 에스본과 우시와 웃시엘과 여리못과 이리 다섯 사람이니 다 그 집의 우두머리요 큰 용사라 그 계보대로 계수하면 이만 이천삼십사 명이며… 이 여디아엘의 아들들은 모두 그 집의 우두머리요 큰 용사라 그들의 자손 중에 능히 출전할 만한 자가 만 칠천이백 명이며(7:6-7, 11).”

 

성경은 나에게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눅 13:30).” 하는 말씀으로 그 중심을 잡게 한다. 가벼운 예로 나는 신대원 때 가장 늦깎이로 나이가 많고 늦었지만 목사 안수를 받는 데는, 두 번씩이나 떨어지면서도 여느 동기들보다 가장 빨랐다. 글방을 교회로 등록하여 개척을 시작한 것부터 말이다. 가까이 지내던 교수는 그런 내게 이 말씀을 가지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됐다’고 하였는데, 그 축하의 말에 늘 가슴에 얹힌 듯 무게감을 준다. 오늘 베냐민의 계보를 보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9).” 하는 말씀이 어느 훗날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이에 믿는 자와 함께 하고 남은 길을 같이 가는 게 중요하다. 특히 결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한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사실 이 땅에 살면서 결혼뿐 아니라 어떤 일을 같이 도모하는 데 있어서도 안 믿는 자와 아예 같이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의 경고는 엄연하심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곧 우리가 죄에 물들기는 쉽다. 이는 본성이 죄악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점점 겁 없는 시대를 사는 까닭은 그 부모의 애매한 태도 때문이다. 안 믿는 부모는 말할 것도 없지만 믿는다는 가정에서조차 세상을 추구하는 데 있어 안 믿는 자들과 다를 게 없어서 그 아이들이 신앙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엄연히 하나님의 나라는 믿는 자들의 나라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누굴 사귀고 같이 하는 데 있어 믿음을 따지면 고리타분한 줄 안다. 특히 친구나 배우자의 경우 안 믿는 자와의 동행은 그 길을 멀리 돌게 한다는 것을 나는 뼈저리게 체험한 바 있다. 아내도 그랬고 친구들도 그러했다. 특히 한동안 같이 어울릴 때 어쩜 그렇게 애매한 경우의 친구들만 사귀게 되는지. 믿기는 믿는 것 같은데 당시의 나처럼, 한쪽 다리는 교회에 다른 쪽 다리는 세상에 두고 사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서로 느끼는 죄의식이 애매했고, 추구하는 바는 같았다. 다들 사회적으로 자기 몫을 하는 의사나 기자도 있고 선생이나 작가도 있었지만… 지금에서는 저들이 가장 먼 지점에 서있다. 그땐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사이였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29).”

 

그리고 하나 더 오늘 본문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아낌없이 주는 사랑에 대해, 29절 이하 사울과 요나단의 족보가 나온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했다. 이 사랑은 굳건한 우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어 저의 관심과 신뢰가 아니었다면 다윗이 다윗으로 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함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삼상 19:4).”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20:15-16).”

 

믿음 안에서 신앙으로 이처럼 우정을 다하고 사랑을 더하는 관계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예수님도 일러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곧 그런 사이, 나아가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예수님의 사랑이 귀하다. 바울도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갈 4:15).” 하며 저들의 헌신과 봉사를 칭찬하고 있다. 곧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오늘 베냐민 지파의 족보에서 나는 세 가지 나의 축복을 떠올렸는데, 하나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처럼 처음보다 나중이 좋은 결과로 나의 생이 드려지기를 바라고, 둘째는 안 믿는 자와의 거리두기는 단지 저들을 따돌리고 무시하는 의미이기보다 같이 멍에를 메지 않는 것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자리가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리고 하나는 주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에 있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이를 붙들면서 오늘 시편을 보면 그 의미는 새롭다. 이는 다윗의 시로 B. C. 979년 아들 압살롬에 의해 왕권을 잃고 쫓겨 황급히 도망치며 지은 시로 추정된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1-2).

 

기도의 절실함은 ‘땅 끝에서’ 부르짖을 때이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그렇다고 맞서 대응할 수도 그렇다고 언제까지 당하기만 할 수도 없는… 그럴 때 우린 누굴 찾을 것인가? 나는 자주 와 울며 하소연하는 누구에게 이를 내 앞에 백날 토로하며 운들 무슨 소용이겠나? 하고 자조 섞인 말을 하곤 한다. 물론 그것으로 위로를 삼을 수는 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주 앞에서다. 솔직히 아직 누구에게 토로하며 씩씩거릴 때는 그만큼 여력이 있단 소리다. 민망하지만 나는 그러한 저의 말머리를 돌려 주께 향하도록 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이면 족하다. 우리가 어찌 주의 높은 뜻을 알 수 있겠나?

 

결국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애간장이 다 타고 녹아나 결국은 오라비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서야 오셨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인데, 구심점은 ‘죽어야 산다’는 원리다. 여지가 남아 누굴 찾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여력이 된다는 데는 아직 때가 아닌 경우가 있다. 오직 주의 이름만 부를 수밖에, 달리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어 주님, 하고 주를 찾을 때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사 58:9).” 주는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렘 16:19-20).”

 

이는 모든 성경의 공통된 주장으로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그러므로 우리의 위기, 절박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로 설정하게 한다. 그동안 애매하던 관계가 확실해진다. 막연하던 사이가 더는 주 없이 살 수 없는 사이로 된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하는 것도 가만히 입에 머금고 있으면 저절로 눈물이 고인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차마 염치가 없어 주의 이름조차 부르기에도 민망하고 속상한… 그러할 때에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때론 이와 같은 기도의 지점이 내 문제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저의 처지와 상황을 두고 그 영혼을 중보 할 때에 놀라운 체험을 한다.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보고 가만있는 것도 문제고 그 문제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문제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16).” 이를 분별할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는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때론 냉정할 필요도 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살후 3:14-15).” 이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3).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확신이 우선이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없이는 누구를 멀리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다. 누구도 우릴 주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9).” 나는 이 확신을 얻고부터 사람도 돈도 미래에 대한 어떤 보장도 크게 나를 부여잡지 않는다. 전에는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간쓸개 다 빼고 저들을 가까이 했었는지 모른다. 돈을 추구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데 있어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을 허비하고 산다는 생각을 못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심지어 나의 그 어떤 죄악도 더는 주의 사랑에서 나를 떼어 놓을 수 없다. 하여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5).” 이와 같은 평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겠다. 지금은 희미하고 일시적으로 맛을 보지만 언젠가 나는 주 앞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한 식탁에 앉아 즐길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4-5).

 

주실 것이라 하지 않는다. 이미 얻었다. 이를 붙들지 못하는 까닭은 현실의 여러 문제들과 어려움으로,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나 겨나 다를 바 없이 요동치듯 날리지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3-4).

 

그 차이는 엄연한 결국으로 증명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얻었고’, ‘옮겼다.’ 즉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얻은 바이고 옮겨진 상태인데 그럼 어째서 안 그런 자들과 다를 게 없을까? 생각하면 여전히 우린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결국 ‘죽어야 산다’는 원리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2:21).” 이러한 결론을 어찌 감당할까?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그러므로 내가 사나 내가 사는 게 아닌 것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놀라운 진리 앞에 마음의 갈망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조급할 정도로 이를 얼른 맛보며 살고 싶다.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6-7).

 

이는 우리의 소망으로 내가 의도하여 구하는 게 아니라 구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얻고자 하는 기도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하여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이에,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6-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