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대상 10:13-14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시 63:7
앞서 9장까지 아담 이후 선민의 계보를 정리하였다. 이제 10-20장까지는 다윗 왕조 중심의 이스라엘 왕국 시대사로 들어간다. 오늘은 특히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즉위를 다루고 있다.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이 어째서 일어났는지, 그 원인과 결과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대상 10:13-14).” 마치 저의 묘비명을 보는 듯하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른 범죄는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였다는 것.’ 하여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다는 것.’ 이는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즉 말씀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다른 미신적인 것에 의존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모든 죄의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엄연히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우리는 이를 알면 알수록 죄를 멀리하고 죄가 되는 것을 피하고 싸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 12:4).”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 죄를 짓지 말라 하신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그러니 우리가 어찌 죄 없이 살 있나?
죄는 분명 하나님을 멀리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 시늉이라도 해선 안 된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그럼 죄란 무엇일까?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3:24).” 사울의 죽음의 이유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여호와께 정죄하였기 때문이다.’ 죄란 어느 하나로 전부를 잃는 것과 같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결국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게 죄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4:17).”
이를 우리가 예민하게 느끼고 다룰 수 있는 길은 성경을 가까이 함으로 가능하다. 한데 그 말씀을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하나님이 알지 못하게 하신 사람들이 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2).” 저들은 누구인가? 바래새인들로 평생 말씀을 연구하고 읽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저들에게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5).” 하고 되물으신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5:37).” 더하여 여러 부연 설명이 있는 것도 악하다.
곧 영적으로 막힌 눈과 귀를 가진 사람들이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3).” 자연을 보고 그 일어날 현상을 알면서 정작 말씀의 의미는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에 저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14).” 뭐라 더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 저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막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4).” 저들은 돈 외에 말씀의 의미에는 관심이 없다. 나름 종교적이라 해도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저들의 한 가지 특징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데 있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5-7).”
사울의 죄의 결과와 예수님이 설교 하시는 저들의 특징을 연결 지음으로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왜들 저리 주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을까 하고 보면,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마 5:43).” 왜 그런가?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들의 영광을 소중히 함인데,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19-20).” 즉 빛 되신 하나님, 진리를 원하지 않고 악을 원함으로 어둠을 따른다. 그러나 우리,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21).” 저들과 우리의 차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 이를 위해 주께 구하여야 한다. 나는 늘 나의 무지를 한탄하며 주가 주시는 지혜를 구한다. 아침마다 말씀 앞에 앉으면서 오늘은 어떤 세계를 열어 보이실까, 하고 기대한다. 내 생각이나 요구를 먼저 접는 일, 여러 근심과 걱정이 나를 휘두르고 못살게 굴지만 그럴수록 나는 주의 도우심을 구한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63:7).
시편을 여러 성경과 같이 읽는 것은 때론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시편이 축약하고 있어서다. 아, 하고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날 위한 모든 것은 쓸모없음을 단도직입적으로 알게 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가끔 생각나는 친구가 있는데 저는 시인이었다. 시를 쓰기 위해 저는 잠잘 때나 밥 먹을 때나 똥 쌀 때나 사람을 만날 때나 어떤 때든지 시를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말씀에서 저를 떠올리는 것은 하물며 문학을 하고 시인으로 살면서 이를 위해 온 마음과 온 생각을 다한다는 것인데, 과연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엇을 하든지 주를 생각하는지?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일은 기적이다. 모든 시작과 끝은 같다. 사울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삼상 9:17).” 저는 겸손하였고,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21).”
뿐만 아니라 약자를 돌볼 줄 아는 자였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11:1, 6).”
그런데 이런 저의 모습이 지속되지 못한 것은 결국 사람들의 시선과 저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보복심리였다.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고 다시 죄로 돌아갔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 2:20-21).” 하고 베드로는 덧붙여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22).”
우리가 주의 영광을 맛보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학식과 이론을 가졌다고 해도 허사다. 마치 좋은 꿀을 그 상표와 재료와 원산지를 확인하고 확신한다 해도, 심지어 손으로 찍어서 점도를 확인하고 색깔을 보고 구분한다 해도 맛보지 않으면 모두 헛되다. 먼저는 알아야 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우리 안에 빛을 비추시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다. 고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셔야 보인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그래서도 나는 이처럼 말씀 앞에서는 눈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지혜를 달라고 구한다.
그리고는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이는 곧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줄 알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결국 믿음이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먹고 마심으로 맛보는 그 이상으로 우리의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새 힘을 얻는 것이다.
맛보기는 본 음식을 마주하고 앉는 잔치 자리 전에 알 수 있다. 음식을 하다 그 맛을 보게 함으로 장차 누리게 될 풍미와 식감과 그 즐거움을 짐작할 수 있다. 말씀은 마치 그런 것이어서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이 모든 문제가 비로소 이해가 된다. 왜 쓴 마늘을 넣는지, 왜 뜨거운 불로 끓이고 볶고 데치는지… 우리 삶에 현재 일어나는 일이 우리 이해로는 납득이 안 간다 해도, 맛보아 알 수 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2:3).”
오늘 시편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신다. 이는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지은 시이다. 광야의 표징은 고난의 극단이다. 추위와 더위는 물론 외롭고 두려운 가운데 언제든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그러할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63:1).
우리로 주를 더욱 갈망하게 하는 것은 광야다. 물이 마르고 곤핍함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더욱이 나의 육체 이 연약한 몸이 주를 앙모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42:1).
그 시점은 괴로울 따름이나 그 기회가 주를 간절히 바랄 수 있는 복된 자리이기도 하여서,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143:6).
살려주세요, 하는 곡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처럼… 나는 말씀 앞에 앉을 때마다 나의 무지함을 두고 주의 지혜와 인자하심을 구한다. 그러할 때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63:2).
성전에서 주를 바라본다. 우리가 함께 하고 모일 곳은 성전으로,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주의 음성을 듣길 원한다. 할 때,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그러므로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3-4).
내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더 귀하였다는 사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저가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를 신뢰하고 믿는다는 고백.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러므로 주의 사랑은 한 번 맛보면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5-7).
이것이 신앙이다. 신앙의 사람들은 이를 모두 공통적으로 외투처럼 두르고 살았다.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단 2:23).” 곧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28:7).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77:6-9).
우리가 저들과 달리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119:55).
밤에, 광야에서, 삶에 지치고 신앙에 회의가 밀려올 때, 행여 주를 잊을까 하여 두렵다. 육신의 고통으로 주를 욕되게 할까 무섭다. 부디 나의 남은 날이 온전하여 끝까지 주만 바랄 수 있기를.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63:8, 11).
오늘 시편은 요즘 나를 쥐고 흔드는 여러 염려와 근심이 무엇인지 아시고, 사울의 결국을 다시 보이시며 주의 언약의 말씀만을 붙들게 하신다. 그럴 때 성경은 일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0) | 2022.09.01 |
---|---|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0) | 2022.08.31 |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0) | 2022.08.29 |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0) | 2022.08.28 |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0) | 2022.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