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있는 왕에게로 나아가니 헤브론에서 다윗이 그들과 여호와 앞에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
대상 11:3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시 64:9
오늘 말씀은 사무엘하 5:1-10절의 말씀과 병행한다. 다윗이 사울을 이어 왕이 되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대상 11:3).” 말씀대로 되었다는 것. 사무엘이 다윗의 머리에 기름 부을 때의 나이가 대략 15세였다. 저는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어렸고, 하는 일도 목동에 불과하였다. 그런 다윗을 무슨 기준으로 하나님이 왕으로 삼으셨는지 본인은 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가 결국 왕위에 오르기까지 다시 15년의 시간이 지났고, 그 기간에 겪은 일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비춰 거리가 먼 듯하였다.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성경은 확언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고로 우리의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중에 믿는 것으로 거듭남의 초자연적인 은사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이 또한 주가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마음으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23:5).
믿음이란 주를 바람으로 주어진 환경이나 상황이 어떠하든지 굳건함이다. 곧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그러므로 나는 가끔 내 안에 어찌 주를 바라고 주의 말씀을 믿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것인데, 이를 ‘예’로 받으며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필리핀 동생이 겪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더해 딸애 또한 회사에서 어떤 시달림을 당하는 모양이었다. 새로 온 디자인실 팀장으로 인해 몇몇은 불화가 생겨 벌써 퇴사를 했고, 서로의 감정의 골은 깊어져서 다소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내가 어찌 나설 수 없는 일을 두고 나는 시름할 뿐 모르는 척 주께 고하기만 하는데… 이게 참, 머리로는 주의 선하심을 믿고 모두 맡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어서인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만 끓인다. 그러다 보니 본래 심약하여 병적인 사람인데 더욱이 그러하여 이런 상태가 못 견디겠는가보다. 그럴 때 말씀에서 답을 얻는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
때론 무엇이 또는 어떤 일이 답답할 정도이나 ‘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셨다.’ 왜 그러신가 했더니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으로 ‘믿는 자에게 주려 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인지, 다윗은 왕위에 오르기까지 15년의 시간 동안 알 길이 없었고, 저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때로 너무 가혹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로 인하여 저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고, 시편을 묵상할 때마다 알게 되는 저의 영성은 가히 모두의 것이 아니었다. 곧 우리로 정복해야 할 것을 두심으로 그 믿음의 진가를 확인시키신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2:12).”
보면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더 잘 되는 것 같다. 저들은 늘 하는 일에 배가 주어지는 영광을 얻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 시편에서도,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64:6-7).
그러니 사람 속을 누가 알겠으며 저의 오늘이 전부는 아닐 것이어서,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8).
이에 우리는 믿음으로 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16).”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복이다. 그것이 어떤 어려움으로 인함이든, 고통 중에 겪는 일이었든, 믿음의 보장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이길 수 있는 힘도 주가 주신 믿음으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잠잠히 말씀 앞에 앉는 것. 어떠하든지 주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일. 나는 일련의 사건을 두고 어쩌다 몇몇 친구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야기 중에 깨닫는 것은 저의 신앙과 믿음이었다. 보통 세 부류로 나뉘는 것을 느꼈다. 하나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이를 대응하고 맞서 우리도 준비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러려니 하고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태도이다. 곧 자기 문제 외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이다. 한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일까? 그의 뜻을 알고자 함께 기도하며 주의 뜻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니 이와 같은 마음의 일을 누가 뭐라 한들 지우거나 고칠 수 있는 문제이겠나?
어제도 무심히 통화하다 일련의 상황을 말하다 그만 말해야겠다, 하는 상대가 있었다. 저의 말은 매우 이성적이었고 현실 타당하였으며 훨씬 논리적이었다. 그럼에도 내 안에 어떤 불편함이 보호막을 치듯 하던 말을 더는 끊게 하였는데,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와 같은 말씀을 나는 나의 이성으로 구술하여 저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주가 하신다. 어째서 왜 하나님은 나의 편이신지, 나는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다만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4, 6).”
나는 나의 허약함으로도 주만 바라게 한다. 특히 심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머리로는 다 알겠다. 누구에게 권면하는 일이면 아주 태연하게 말해줄 수도 있다. 정작 믿음으로는 알겠는데 육신은 이에 못 미쳐 마음은 저 혼자 요동치고 가슴은 짓눌리고 어떤 불편함이 나의 목을 조이는 것이어서… 누구의 어떤 위로인들 나도 모를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 어제 그 친구와의 통화를 서둘러 끊고, 며칠째 평소보다 많은 약물로 나의 감정조차 진정시키지 못하고 쩔쩔매면서 알았다. 왜 말씀은,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하고 여러 번 되새기게 하셨는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3:5).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2:1, 5).
왜냐하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러니 이를 친구에게 또는 세상 어느 전문가에게 묻고 의지하며 저의 대비책을 따르겠다고 한들? 우리가 세상을 상대하여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6).” 그러므로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3:5).
이것으로 하나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결국 나의 의, 나의 주장, 나의 판단을 모두 주 앞에 내려놓지 않는 이상은 별 수 없는 노릇인가보다. 그래서도 바울은 믿음을 잃지 않으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또한 히브리서 기자도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5).”
주가 이루신다는 것, 오늘 시편은 이를 찬송하고 있다. 헤브론에서 왕이 된 다윗의 시이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64:10).
우리에겐 남이 빼앗을 수 없는 자랑이 있다. 물론 두려움은 가장 먼저 달려와 나를 엄습하고 위협하지만,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1).
우리는 안다.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2).
예수님은 다음 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아시고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다시 붙들려 주의 길을 가게 되었을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신없이 나의 모든 옛 생활이 무너져 내리고, 나는 매일 울면서 신대원을 끌려가듯 가면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하시는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을 그렇게 되뇌었다. 두려움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함인데 또한 주밖에 의지할 이가 없음을 알게 하는 계기도 된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하여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1).
이와 같은 고백이 어쩌다 우연히 생겨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곁에서 특히 가까운 이의 말이 날카로운 칼 같이 화살 같이 나를 겨누고 쏘아댈 때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3-4).
그러나 그와 같은 말이 도리어 주만 바라게 한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9-10).” 우리의 이 모순된 삶에서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이는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하여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나를 붙들어 앉히시는 것이 은혜였다. 내가 안달복달한다고 나아질 게 아니라면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이에 우리 주님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자신도 기도에 힘쓰셨다. 훗날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아이러니하지만 고난으로 우리는 주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안다. 반드시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하여 서로 권면하고,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행 15:32).” 권함으로 자신을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이었으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롬 15:14).” 그러므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이것이 우리에게 두신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의 이유였다. 하면,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9).
우리는 이미 다 이긴 세상을 상대하는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아무리 요지경으로 난리를 친다 해도,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그리하여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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