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나이가 많아 늙으매 아들 솔로몬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았더라
대상 23:1-2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다윗이 나이 들어 솔로몬에게 왕위를 이양한다. 이를 간단히 언급한 후 레위인을 계수하여 3만 8천 명 가운데 2만 4천 명에게 성전 일을 맡긴다. 6천 명에게는 서기관과 재판관 일을, 4천 명에게는 문지기를, 4천 명은 찬양단원으로 세운다. 역대기는 무엇보다 신앙의 회복이 우선 되어야 함을 의도적으로 유도한다. 열왕기서는 왕위 계승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 본서는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축소한다. 여하튼 다윗은 죽음을 대비하듯 자신의 마지막 때를 대비한다. 저는 늙어서도 맡은 과업에 충실하였고 가치 있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삶은 순간이다. 언제 우리에게 죽음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성경에서 부자와 나사로를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부자는 때를 알지 못하고 호의호식하며 연락을 즐기다 하루아침에 죽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눅 16:22).” 죽음은 간소하고 이후는 영원하다. 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 거지 나사로가 있었음을 알았다. 저는 고통 중에서 나사로의 이름을 기억하였다. 제 집 문 앞에 엎드려 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며 구걸하던 때는 아는 체도 할 겨를이 없었다. 부자의 특징을 성경은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하였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12:20-21).”
다윗은 그의 생이 왕으로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한데 저는 늙어서도 허투루 생을 허비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다윗의 행정과 종교 재편을 보며 저의 열심이 주를 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부자로 살고 있는 자로 누릴 게 많은 사람은 위태롭다. 죽음이 닥치기 전까지 모두는 설마, 하고 산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그래서도 나는 늘 의식하고 또 신경 쓰는 것은 가령 이와 같이 묵상글을 쓰는 게 오늘로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 어디 자리를 뜰 때면 이 길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한다. 해서도 자리를 치우고 점검한다. 사람과의 일도 자신을 향한 마음도 같다. 그리 의식을 하려 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종종 누가 기도부탁을 할 때 열에 아홉은 뜻하지 않은 일로 고통당하면서이다. 누군 갑자기 백혈병을 얻어 하루하루 생명을 연명하며 생을 이어간다. 누군 느닷없이 유학 보낸 아들이 반산불구가 된 소식을 전하며 슬픔을 이겨내려 기도를 부탁한다. 저마다 언제 어떤 일로 시름에 젖을 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를 다윗과 같이 준비하고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고, 끝까지 미루고 설마하며 자신의 나이를, 건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자도 있다. 보면 생의 마지막을 준비한다는 일은 노인이어서가 아니라 평소 우리 모두의 자세이어야 하고 특히 성도는 ‘예수 재림 사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특히 바울은 이를 대비하라 누누이 강조하고 바라던 사람이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오늘 이 시점에 주가 오신다면 우린 무얼 하다 주를 맞이할까? 이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할 때에 나는 어느 쪽인지?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3).”
나는 오늘 다윗이 일련의 생을 마무리하면서 레위인들의 사역과 그 역할을 구분하여 주의 전에 봉사하게 하는 것을 생각하였다. 솔로몬을 왕으로 세운 것을 보면 저는 노인으로 그 기력이 다하여 갈 때이다. 이를 특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여러 번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5:15).” 이는 주님 곧 오실 것을 기대하고 준비하나 낙심하게 되는 것은 누구는 고난 중에, 누군 주로 인하여 역경 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낙심한다.
이에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살후 2:1-2).” 주를 믿으면서 주로 흔들릴 때는 세상을 바라볼 때이다. 저들은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사는 것 같은데, 믿는 자들은 마치 로이노제환자들 같이 굳이 죽음과 영생을 운운하며 겁에 질려 사는 듯하다. 특히 믿음이 좋으면 좋아서 기다림에 지치는 성도들을 향해 바울은 글을 쓴다.
이를 이사야의 시점으로 읽으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곧 우리가 움킨 것, 나에게는 이 시간과 같이 말씀을 붙들고 으르렁거리며 잡은 것을 놓지 않으려는 먹잇감처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 우리 주님도 결코 그 때를 놓치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은,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3-24).” 주의 재림의 때는 어김없는 죽음의 날과 같다. 순식간에 일어나고 더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전 3:1-3).”
우리가 살아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일은 우울한 게 아니라 지혜다. 정말 우울한 일은,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전 6:2).” 기껏 죽어라 하고 살다 이제 좀 살만하다 싶을 때 죽음이 그를 데려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므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7:2).” 우린 끝을 준비하며 사는 삶이 복되다. 이는 결코 우울하고 염세적인 의미가 아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3).” 어찌 그런가?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그 차이는 확연하여서 세상은 자꾸 ‘괜찮아, 훌훌 털어버리고 좋은 일만 생각해!’ 하고 부추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5).” 그런데 점점 누가 그런가? 요즘은 섣불리 누구더러 뭐라 이르면 졸지에 고소당하기 십상이다. 선생은 점점 사라지고 직업적인 교사만 늘어난다. 가르치는 일이 사무적인 것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스승을 바라는 일은 사치가 되었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 이르셨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도 있다는 소리다. 죽은 자는 후회도 없다. 회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바울은 애타는 심정으로 가르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나의 오늘 하루, 이 순간은 의식하는 동시에 과거가 된다. 엄밀하게 따져 현재는 없고 과거와 미래만이 공존한다. 이에 야고보는 강한 어조로 설교한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행여 아직 때가 오래 남았다고 생각하여, 누구는 더러 ‘나중에’를 입에 달고 산다. 예수 믿읍시다. 함께 신앙생활하며 우리 함께 예배하며 삽시다. 하고 권하면 돌아오는 말은 ‘다음에’이다. 누가 늘 이런저런 어려움을 호소하며 기도를 부탁한다. 나는 저의 생을 생각할 때면 마음이 어렵다. 차마 말로 옮길 수도 없는 역경을 견뎌왔고, 오늘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저에게 몇 차례 우리 함께 예배드리자, 하고 권하였으나 돌아오는 말은 ‘나중에’였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실은 우리가 아직 해야 한다는 일이란,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8-20).” 저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누군 애들 좀 더 키워놓고, 누군 지금 벌인 이 일만 수습하고… 하다가 때를 놓친다. 것도 그럴 것이 세상 일은 세상을 사는 동안에 끝이 날 리 없다. 그러니 결국 잔치에 들어갈 때를 놓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계획의 주님이시다. 어쩌다 태어나고, 어른이 되고, 살다 죽는 인생은 없다. 이를 알 때 참 고백도 나온다.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시 144:2).
그러므로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잠 2:7-8).” 어느 훗날 우리가 모여 다윗을 마주하였을 때, 오늘 내가 저의 이야기로 묵상하며 돌아보았던 이 순간의 말들도 서로가 나누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18:10).” 이를 오늘 시편으로 가져오면,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셀라)
(76:2-3).
곧 우리 신앙은 각자의 체험과 신앙고백으로 채워져 간다. 우리는 항상 진보하고 성장해야 한다. 그래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어제 주일 설교 중에 고난으로 우리가 달라지는 성품을 알아보았다. 잠시 언급하면, 하나는 주의 인자하심을 고난으로 배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이와 같은 고백이 고난이 아니면 어찌 알 수 있을까? 어찌 나의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둘, 그리하여 고난 중에 주를 신뢰하는 법을 익힌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 것이라 해도 나는 주를 신뢰함으로 아뢴다! 어떻게? 셋,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도우심 보다 더 크 확실하다.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단 3:17-18).”
넷,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더 좋은 것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조금 더 덧붙이자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다섯, 하여 우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기꺼이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어, 여섯,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일곱, 하면 오늘 시편의 노래처럼 나의 슬픔, 나의 노여움으로도 나는 주를 찬송할 수 있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그러므로 여덟, 주신 곳에서 묵묵히 순종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왜냐하면 아홉,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나도 즐거워할 줄 알면서이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가끔 언급하였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지겹도록 듣던 소리가 ‘하나님이 널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부친의 말이었다. 그땐 그 말이 참 싫었는데, 이제는 주의 은혜를 누구보다 깊이 넓게 누리며 살 수 있는 ‘특별한 사랑’임을 인정한다.
열, 그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곧 나의 영광으로 덧입혀진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14).” 이상의 내용은 설교 중에 주의 영이 강제로 유도하신 언급이었다. 사는 날 동안 고통 없이 사는 삶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4-5).
세상을 어디를 뒤져본들 죽음을 이겨낸 자는 없다. 결국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두려운 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내가 구원할 것임이라(사 49:25).” 하면 주를 신뢰하고 의뢰할 줄 아는 것보다 나은 삶은 없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12:2).” 이를 자신의 확신으로 가지고 사는 것이 복이다.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7-9).
곧 있으면 알 수 있다. 지금은 저마다 제각각이나 모두가 죽음 너머에 이르러 서면 확실해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2).” 아, 이 확연한 차이를 그때서야 누가 번복할 수 있을까? 그러니 명심해야 할 것은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이에 온유함은 구원을 입은 자의 여유로움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세상에서는 누추하고 남루하여 비루하기까지 해보일지 모르나 이를 개의치 않는 것은 ‘그들이 영원한 땅을 기업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곧 들어가 영원한 나라에서 우리는 이미 주의 영광을 함께 누릴 자로 살고 있으니, 비록 여기서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강남의 수십 억 아파트? 어디 땅을 두고 경치 좋은 전원주택에서 사는 일? 돈 걱정 없이 가진 것으로 충분히 누리며 사는 ‘욜로족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러니 그런 안개를 붙들고 유유자적한들?
우린 이를 앎으로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그러므로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 하여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그러할 때에,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10-13).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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