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은 직무에 따라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그의 아버지 아론을 도왔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더라
대상 24:19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시 77:1-2
아론의 아들 중에 엘르아살의 자손과 사독과 이다말의 자손 아히멜렉을 중심으로 24반열을 나누어 제사장 직무를 수행한다. 인구에 비례하여 엘르아살 계열이 16반열을, 이다말 계열이 8반열을 차지하고 있다. 보면 그 쓰임은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따른 것이다. 아론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와 둘째가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사용하여 성소에서 죽는다. 남은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 둘이 아론을 도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였다. 할 때 저들은 역할은 능력에 따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인 선택에 의한 일이다. 가령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40일을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동요한다. 술렁거리는 저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론은 금송아지를 신상으로 만들어 이를 하나님이라 한 바 있다. 저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 역시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 죽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저들은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자격이나 능력도 없다. 그럼에도 저들에게 제사장 직분을 맡기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 은혜와 사랑의 까닭을 알 수 없다.
기드온이 사사로 부르심을 받고 삼백 명의 군사로 십삼만 오천 명의 미디안 연합군을 물리친 것도 저의 타고난 능력으로가 아니었다. 오직 사사로 세우시고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더하심으로 이를 감당할 따름이다. 어부 베드로가 오천 명을 회개시킨 대사도가 된 것도,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행 4:4).” 주가 하신 일이다.
오늘 아론의 후손들이 나뉘고 성전의 제사장 직분을 맡은 것에 주의 남다른 은혜를 생각하게 된다. 앞서 모세는 주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출 4:10-11).” 이 일의 주권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하신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2).”
가끔 내 안에 이는 어떤 어려움, 부담감 같은 두려움이 앞설 때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나의 약함이 오히려 힘이 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이에 하나님의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방식에 의존하게 한다. 나의 약함이 나로 주만 의지하게 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오늘 본문 2절에 “나답과 아비후가 그들의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하는 표현이 있다. 이는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대로 행함은 주를 거역함이다.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16:12-13)” 이를 보면 대제사장은 불과 향을 그 성소 안에 가지고 들어가서 주 앞에서 분향해야 한다. ‘다른 불’을 가지고, 그 규정을 어기며 자신들 좋을 대로 행하다 그리 된 것은 그 일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이어서 보면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10:9).” 이를 보면 저들은 술에 취해 주의 법을 어긴 것으로 짐작된다. 술과 우상은 우리로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또한 오늘의 교회가 문화에 뒤처지지 않게 따르고, 그로 인해 세속화되는 것에 우려가 깊다. 우리는 계시의 종교다. 하나님의 말씀이 ‘열어 보이시는 것’ 외에 다른 무엇으로 희석할 수 없다. 한데 종교적 외식주의가 팽배하고 의식 자체가 무질서하여 ‘자신들 좋을 대로’ 행하는 데는 심각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를 방지하려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출 18:20).”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수행해야 한다.
이는 이제 구약시대와 같이 제사장이란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만이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린 모두 제사장이요 왕 같은 선지자의 직분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 하여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그러므로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신 26:16).” 이는 오늘도 동일하다.
하면 우리의 죄가 우리의 얼굴을 가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 자칫 이 사명을 소홀히 할 때 나 개인의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저마다 부르심의 자리나 그 역할은 다를 수 있으나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여기에는 부지런함과 즐거움이 같이 한다.
이는 궁극적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하여 우린 불행을 통해서도 주의 뜻을 배우고 교훈을 익힌다. 가령 엘르아살과 이다말은 앞서 두 형의 죽음이 충격적이었고 큰 교훈이었을 것이다.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 우두머리가 이다말의 자손보다 많으므로 나눈 것이 이러하니 엘르아살 자손의 우두머리가 열여섯 명이요 이다말 자손은 그 조상들의 가문을 따라 여덟 명이라(대상 24:4).” 어떤 불행은 우리로 바른 교훈에 서게 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 요셉이 얻은 교훈은 그로 이방나라에서 이방의 총리로 그 역할을 수행할 때 주를 온전히 그 마음에 모시게 하였다. 시인은 표현하기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119:67).
이는 나의 지난날에 있어서도 생생하다. 때론 마음이 심란할 때 ‘목사 안수패’를 가만히 바라보고 선다.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인지 때론 까마득한데 그 된 일이 모두 은혜였음을 함축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물론 연단이나 징계가 좋을 리 없지만 그것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 또한 없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강하게 몰아치시는 주의 손길 앞에서 나는 두 손 들고 항복하였다. 내가 어떤 아집과 완고함으로 그릇 되게 살았는지 새삼 말할 것은 없다. 다만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4).” 어떤 일에서든 나의 생각과 의견이 앞서지 못하게 한다.
오늘 시편은 이를 돌아보아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77:1).
내 음성, 나의 기도로 주를 부를 때 하나님은 마음을 기울이신다. 남의 이야기가 아무리 감동적이고 감격스러우면 무엇하나? 오늘 7절의 내용을 먼저 되새기면,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7-9).
이보다 더 두려울 때가 있을까? 곧 나의 음성으로 주께 부르짖음은 나로 끈질긴 기도와 그 간절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 15:27).”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저를 무시하시며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6).” 하실 때 여자는 그만큼 절실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8).” 만일 거기서 자존심이 상해 돌아갔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우리의 간구가 성가실 정도로 주 앞에 부르짖는 것에 대해,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13).” 이와 같은 비유의 말씀이 하나님의 성품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2).
다른 어떤 위로를 거절한다. 실은 널린 게 위로다. 여러 도움의 손길이 많은 시절이다. 이를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다만 그 가운데 위장하여 이단들도 득세한다. 절박함은 우리로 주를 바라게도 하지만 세상을 구하게도 한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우리가 그 대상을 바로 알지 못할 때 금송아지로 하나님이라 부르짖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성전에서, 교회 안에서 말씀 가운데,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삼하 22:7).”
할 때 문제가 우선이면 도움의 손길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게 된다. 문제가 문제로 지속적인 까닭은 그 문제만 해결하려는 게 문제여서이다. 모든 문제에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숨겨져 있다. 이를 알고자 하면 우리의 간절함도 절박함도 필요하지만 ‘가만히 주를 바라는’ 참 신앙의 인내도 필요하다. 전적인 신뢰, 믿음이 우선인 것은 그래서다. 문제에 함몰되면 금송아지면 어떻겠나?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이에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86:17).
표징은 나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굳이 우리에겐 표징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 안의 믿음보다 신기하고 기이한 표징은 없다. 나는 가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그래도 나름 논술을 평생 가르쳤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논술은 그 주장에 따른 근거가 타당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막연한 구호나 상징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의심은 신앙과 삶을 위태롭게 한다. 종종 이를 경험하면서 동시에 내 안에 가득한 주를 신뢰함이 때론 의아하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3).
오늘 시인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한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마음이 안정되고 그 심령이 평안해야 하는데, 이는 그만큼 고난으로 일그러진 영혼이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소란하고, 동요되는 것은 하나님의 침묵까지도 주의 귀한 섭리로 다 받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우리로 그 마음에 확신을 흔드는 것은 고난이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은 우리 기도 때문이다. 이러한 심령은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게도 한다.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4).
예수님이 함께 계신데도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 8:26).” 거센 바람과 바다에 시달리는데 주님은 주무시니, 우리 생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느껴지는 순간에는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도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결국 우리로 그와 같은 주의 침묵 속에서 믿음으로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의 성장을 기대하신다. 그럴 때 좋은 해결방법으로,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5-9).
오히려 우리 안에 이는 회의와 갈등까지도 끌어안고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이때 그 발동은,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곧 지난날 나와 어찌 함께 하셨는지, 그때 나는 어느 정도로 함부로 주를 멀리하며 외면하고 살았었는지를. 그럼에도 주님이야말로 참고 또 기다리시며 어떻게 나를 도우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감싸고 계셨는지를. 생각하고 기억하여 그 심령으로 간구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나는 이런 구절에서 목울대를 치는 어떤 감격이 있다. 내가 어떤 자이고, 어떠했는지 나는 잘 안다. 그런 내가 여전히 어떤 의심과 불안을 안고도 주 앞에 서게 하심이 그 자체로 은혜인 것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11).
내 안에 이는 불안은 아주 작은 의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어서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신 1:28-29).” 그럼에도 저들은 돌아섰고 기어이 광야 40년의 배회를 자초하였다. 그뿐인가? 천하의 엘리야도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4).” 그 큰 주의 역사를 행하였으면서 고작 이사벨을 피해 저리 또한 낙심할 수 있는 게 우리의 본 모습이다. 그럼에도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5).” 주가 돌보시었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10-11).
오늘 시편과 같이 인정하고 회개하고 주가 행하신 기이한 일, 나 같은 자로 주를 믿게 하시고 나아가 이와 같은 귀한 자리에 두심을.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곧 오늘의 문제, 어떤 어려움은 우리의 영광이 되게 하려 하신다. 또한 우리의 열매가 되게 하신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그러므로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12-13).
이 귀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자리가 고난의 자리였다. 그러므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 무엇도 주의 사랑을 끊을 수 없음을. 이에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
(14-15).
그뿐이신가?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16-18).
우리의 모든 환경도 주가 조성하신다.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내시는 이가 하나님 우리 구주이시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19-20).
곧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 이런저런 여러 우려와 염려가 끊임없이 우릴 괴롭히지만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바울은 덧붙였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14).”
곧 내가 어찌 해보려 하는 ‘아론의 금송아지’와 같은 우리 안의 의존성,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는 마음을. 해서 우린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살아야 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0) | 2022.09.15 |
---|---|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0) | 2022.09.14 |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0) | 2022.09.12 |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0) | 2022.09.11 |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0) | 2022.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