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전봉석 2022. 9. 14. 04:31

 

다윗이 군대 지휘관들과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는 이러하니라

대상 25:1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72

 

 

다윗은 찬양의 능력을 잘 알던 사람이다. 그 뛰어난 가치와 구별을 일찍이 다윗은 광야에서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해진 것이다. 하나님의 신령한 노래 곧 우리의 찬송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주를 섬기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이 즐거움에 참예하게 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신령한 노래, 찬송은 우리를 구별한다. 우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한다. 이 노래는 우리 삶을 가득 채워 하나님 앞에 귀히 세운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19).” 찬미는 감사할 수 있게 하고, 감사는 우리로 피차 복종하게 한다. 복종은 우리로 피차 가르치게 하고 권면하며 하나님을 우러르게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이것이 우리의 예배가 되고 삶에 있어 입술의 열매가 되게 하신다. 이는 장차 도래할 영구한 나라, 하나님의 도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골 3:14-15).”

 

다윗은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로 찬송하는 사람들을 세웠다.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주어진 이 은사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곧 우린 모두 이와 같아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보내심을 입었다는 것으로 소명과 사명은 분리될 수 없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이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서로의 직분은 다르나 목적은 하나이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이는 우리에게 두신 지상명령으로 어떤 일을 어디서 어떻게 준행하든지 우리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곧 우리가 주를 바라는 데 있어 특징은, 스스로 이를 자부하게 않는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6-9).”

 

그러므로 주를 바란다는 것은 온전하게 살고자 함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이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곧 육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이에 우리 삶은 의도하든지 안 하든지 감출 수 없는 것으로 빛과 소금과 산 위의 동네에 등불이 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3-15).”

 

이처럼 본문을 읽고 묵상하며 관련된 성구를 찾아가다보면 내게 바라시는 주의 뜻을 더욱 갈망하게 한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삶을 두고 주께 고하며 도우심을 바라게 한다. 상대적으로 이를 외면하는 자의 특징을 굳이 꼽으라면, 저는 입 안에 모래가 가득한 사람 같다.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잠 20:17).” 즉 그 속에 늘 거짓이 있어 자신을 합리화하고 외면하며 방치한다. 그러다 어떤 일, 뭔가 한 탕을 노리는 데 혈안이 된다. 그러나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26:20).” 하여,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 94:9-11).

 

우리 생활에 찬양이 끼치는 영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다. 가령 오늘 4절에 소개되는, “헤만에게 이르러는 그의 아들들 북기야와 맛다냐와 웃시엘과 스브엘과 여리못과 하나냐와 하나니와 엘리아다와 깃달디와 로맘디에셀과 요스브가사와 말로디와 호딜과 마하시옷이라.” 열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이름은 각각 은혜롭다. 그 이름을 연결하여 그 뜻을 한 편의 시로 옮긴다면,

 

자비로우신 여호와여

은혜를 베푸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찬양하나이다

내가 하나님의 크고 높으신

이름과 말씀을 선포하나이다

 

하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한다. 나는 그때 하나님을 멀리하며 산다고 살면서도 아이 둘을 낳고 하나는 주의 이름을 전하는 자로, 하나는 주의 백성이란 이름으로 그 뜻을 삼았다. 곧 헤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뜻으로 자녀의 이름을 지은 것은 지금에 와서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찬양이란 생활 속에 있고 그 입술과 온 마음이 드려지는 일이다. 특정한 시간에 형식적으로 읊조리는 감정의 표현이 아니다. 곧 삶 자체가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그때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모습뿐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주가 나를 인도하심이었으니, 찬송은 슬픔과 노여움 가운데서도 피어난다. 어떻게 슬픔 중에 찬송이 가능할까? 노여움 속에서 찬송이 될까? 우리의 슬픔은 다른 게 아니라 주를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영혼이 어둠에 속할 때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곧 바울은 자신의 백성, 골육과 친척이 주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일도 주 안에서 기쁨이 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일찍이 나는 은혜 가운데 믿는 가족들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안 믿는 가족들 사이에서 홀로 믿는 이의 처지를 미처 다 알지 못한다. 늘 그 부모와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누구와 아이와 안 믿는 처와 자식들을 위해 애간장을 태우며 기도하는 어떤 이의 슬픔을 위해 나는 함께 기도한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바울은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 그런데 이것이 저로 환난 중에서 소망을 갖게 하였다. 평소 나 역시 즐겨 암송하고 되새기는 말씀으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어찌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을까? 그 환난이 인내를 만들고 있음을 알면서이다. 인내는 연단이 되어 자신을 속사람을 날로 새롭게 하였고, 그와 같은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고 있었다.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 찬송이다. 우리는 이에 익숙한 자들이 되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그들과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팔십팔 명이라.” 그들로 인하여 그들 자손들도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가 되었다. 찬양은 능력이다. 은혜가 능력인 것과 같이 찬송은 아무나 어쩌다 따라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63:3-4).

 

나는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할 때 시편을 꼭 같이 두고 묵상하는 까닭이 있다. 함축된 시의 의미어와 시어가 갖는 놀라운 속뜻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른 저녁이면 잠이 들어 밤 시간을 생략한다. 늦게까지 있어봐야 특별히 하는 일도 없다. 예전처럼 친구들을 만나 밤거리를 배회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른 아침에 눈을 뜨고 말씀 앞에 앉기 위해서도 특별한 경우 아니면 의식적으로 잠을 청한다. 오늘 시편은 마스길이다. 교훈을 담았다. 곧 우리로 하나님 사랑에 대한 경험으로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소망하게 한다. 현실은 어떠해도 주를 바라고 찬송함으로 하루가 늘 새로이 열린다.

 

오늘 시편은 선민의 역사를 회고하고(1-8),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반복적인 불순종의 삶을 돌아보며(9-53),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에브라임 지파를 기점으로 우상숭배와 온갖 죄를 지은 결과를 회상하고(54-64),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 결과를… 그러나 그 중에도 유다 지파를 택하시고 선민 이스라엘을 양육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65-72).

 

종종 나는 나와 같지 않기를 공공연하게 바란다. 내가 얼마나 함부로 주를 멀리하고 살았는지를 숨기지 않고 밝힌다. 이는 실패 가운데서도 주의 은총을 드높이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시고 돌보시고 함께 하셨는지를, 하여 ‘역사를 아는 자는 무너지는 담장 앞에 서지 않는다.’ 이 말은 중국 속담이다. 누구의 어리석음과 그의 완고함이 큰 교훈이 될 때도 있다.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4).” 우리도 회개치 않으면 다를 게 없다.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신 30:8).” 곧 누구에게 권면할 때에 안 믿는 가족들로 인하여 근심하고 슬퍼하는 자 같으나,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우리는 저들에게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또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8).” 곧 주를 믿고 아는 것으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린다.

 

이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오늘 우리가 겪는 그 어떤 슬픔도, 어려움도 모두 다 지나간다. 하여 저녁에는 슬퍼하나 아침에는 기쁨으로 충만하여진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30:5).

 

하여 우리에게 찬송이 되는 것은,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애 1:2).” 어떤 이의 깊은 터널은 끝이 없을 것 같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16).” 그러나 우리의 찬송은 이를 변하여,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 30:11, 126:5).

 

반드시 우리 삶의 반전은 기쁨의 참 맛을 알게 할 것이다. 하여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전 9:7).” 주가 나의 찬송을 받으심으로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이는 엄연한 약속이고 주가 보장하신 일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로 말씀으로 살게 하려 하심이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그러므로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78:1-3).

 

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우리가 어찌 오늘에 두시는 어떤 슬픔의 목적을 알겠나? 어려움의 숨은 의도를 다 깨달을 수 있겠나? 다만 한 가지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으로,

 

그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그들을 지나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으며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14-16).

 

아, 우리의 어리석음이여!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17).

 

행여 나의 하루가 여전하여 날마다 주께 범죄하기를 지존자를 배반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자식들에게 수십 채의 집을 남겨주고 넉넉한 생활을 물려준다 해도 저가 끝내 주를 알지 못한다면… 주를 거역하며 그 조상의 길로 나아간다면… 부디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신 11:19-20).”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

(33).

 

그러니 무엇이 참된 복락인지. 단 7분을 호의호식하고 살든지 70년을 허랑방탕하며 세상 즐거움으로 살든지, 이를 영원한 시간에 놓으면 7분이나 70년이나 그 복락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친구는 남은 3, 40년의 노후를 걱정하며 온갖 보험에 적금에 어디 부동산을 사두고 주식에 투자하느라 밤낮이 따로 없다. 부디 그 수고와 노력이 헛됨을.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34-35).

 

부디 아직 우리가 산 것은 기회가 있다. 은혜를 더하심이다. 돌이켜 주를 간절히 찾을 수 있는,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36-37).

 

하여 바울의 간곡한 바람,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