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이 모든 일의 설계를 그려 나에게 알려 주셨느니라
대상 28:19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시 81:9
다윗의 유훈이다. 저는 성전건축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하나님이 불허하신 뒤 저는 낙담하여 아무 것도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여 이를 백성들에게 남기고 있다 이를 솔로몬이 이어 준행할 것을,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구하고 지킬 것을 당부한다(1-8). 이어서 후반부는 솔로몬을 향한 다윗의 권면과 격려가 기록되고 있다(9-21).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여 성전건축을 맡기신 것에 힘쓸 것을, 그에 따른 설계와 기물들을 준비하여 전달한다. 하고 “또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게 이 일을 행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여호와의 성전 공사의 모든 일을 마치기까지 여호와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사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당부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이 있으니 하나님의 성전의 모든 공사를 도울 것이요 또 모든 공사에 유능한 기술자가 기쁜 마음으로 너와 함께 할 것이요 또 모든 지휘관과 백성이 온전히 네 명령 아래에 있으리라(20, 21).”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한다.
우리가 주의 일을 실행하는 데 있어 이를 순순히 받드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의 자아는 이상과 이성이 따로 하고 머리와 몸이 따로 한다. 이에 하나님은 그 명령을 준행하게 하시는 데 있어 때론 우리로 너무 힘든 상황에 놓이게 하신다. 가령 존 번연에게 오랜 세월 감옥에 있지 않았더라면 저는 <천로역정>을 위시하여 <경외함의 진수>, <기도> 등 다수의 주옥같은 글들을 쓸 수 있었을까? 노년에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지 않았으면 신약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여러 서신들을 교회 앞으로 쓸 수 있었을까? 그것도 실질적인 구원의 진리를 토대로 말씀의 초석이 될 기독교 교리를 말이다. 다윗에게 광야 시절이 없었더라면 저의 영성이 오늘과 같이 주의 마음이 합한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었을까?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들어가 노예 생활과 억울한 옥살이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주를 의뢰하는 사람으로 이방나라의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예수님의 이와 같은 기도가 우리 삶의 실제가 된다는 일은 많은 것을 잃고도 포기하면서 주의 일을 감당하고 교회를 이루는 여정이 된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단 3:18).” 하는 신앙이 우리 안에 세워지기까지 노예로 끌려오고 이국땅 우상의 나라에서 주를 경외하는 단단함이 필요하다. 곧 우리가 우리의 길을 준비하고 그 마음의 계획을 세우는 것 같으나 그 말의 응답이 주의 것임을,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단 16:1).”
회개하며 고백하건대 나는 이런 상황이 싫다. 하나님이 미울 때도 있고, 사람에 대한 환멸로 치가 떨리기도 한다. 결국 필리핀 동생은 출국금지가 연장되어 검찰로 넘어가 조사를 받아야 한다. 한 아이의 거짓말이 빚어낸 파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현실인데, 그 너머에 주의 섭리가 있음을 머리로는 안다. 오후께 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는 울었다. 나의 믿음과 신앙이 부족하여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일처리를 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싫었다. 늘 그런 식이었다. 모든 것을 한순간에 날리는 것은 물론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로 몰아세우더니 결국은 자식 넷을 두고 나의 부친은 목사가 되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현실이, 하나님이 너무 싫었다. 말도 안 되고 부당하고 저는 폭군과 같았다.
나에게 두 아이가 생겼을 때 부친이 세운 교회 건물은 결국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모든 걸 털고 빈손으로 인천을 떠나야 했다. 어쩌면 내 인생에 그때가 가장 악에 받친 시간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의 두 아이가 자라났다. 건물 5층으로 지하에 성전을 깊이 넣고 이제 곧 역이 건설될 몫이었는데 하나님은 그 교회를 부친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덩달아 그 건물에 들어가 살게 되면서 나는 8년을 같이 시달렸다. 멋대로 굴며 함부로 행동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5백에 40짜리 초라한 단칸방으로 몰렸던 부친은 이내 다시 개척교회의 발판을 놓고 미국 어디 한인 교회로 초빙을 받아 나가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렇게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하여 끝내 신대원을 마쳤고 오늘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를 고통 가운데 이끄심으로 주의 길을 걷게 하신다. 필리핀 동생에게 있어 15년의 타국 생활이 그렇게 지나갔다. 한국에서 힘겨워하고 적응하지 못하던 아이들이 들어가 올바른 신앙과 좋은 대학 성적으로 한국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다 맨 마지막에 들어온 아이가 이런 사달을 낸 것이다. 저의 악의적인 거짓말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동생은 이를 주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만 바라보며 필리핀 사역을 정리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의 어설픈 어법으로는 ‘늘 이런 식이시다!’ 나의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시는 데 있어 때론 가혹하시다. 자식을 장애로 두어 일생을 꼼짝 못하게 하심으로 주만 바라게 하시는가 하면 애써 일구어놓은 텃밭을 휘저어서 졸지에 터전을 옮기게도 하신다. 동생은 덤덤하게 말하였지만 나는 그 속이 읽히는 듯하였고, 예전의 기억들이 중첩되면서 어떤 서러움, 고단함이 순간 눈물로 흘러내리기도 하였다. 생각 같으면 같이 대응하여 저들을 보란듯 응징하고 싶지만 우린 주 앞에 아뢰며 애통해할 따름이다. 솔직히 나는 그리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가 보다. ‘이런 하나님의 방식’에 의연할 수가 없다. 한데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말씀 앞에 승복할 수밖에 없다.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여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평소보다 안정제를 더 삼켰고 어떤 억울함에 우울함에 누워있다 잠이 들었다. 돌아누웠는데 순간 나의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신앙을 두고 주 앞에 부끄러워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안다, 나도 안다. 내 일생에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와 긍휼하심이 죽어 마땅한 자인데도 이처럼 귀한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음을. 또한 그로 인하여 나의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주의 길을 걷게 하심은 주의 무궁하신 은총인 것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아는데… 알겠는데…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도 큰데… 순전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감사하기는 쉽지가 않다. 나는 병적으로 눈물을 흘리며 주를 원망하고 주께 따지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둘째 조카아이가 ‘그 애’를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는 데서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교회건축 자금을 들고 떠난 자를 죽이고 싶었다. 믿는다고 함께 하였던 이들이 그런저런 핑계로 교회를 떠날 때 저들에게 분노했다. 나로 돌이켜 다시 주 앞에 세우시려고 부모를 미국으로, 아들을 필리핀을 떨어뜨리듯 멀리두신 상황에서 오롯이 혼자 감당하게 하시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나는 안 하면 안 되냐고 하면서 매일 울면서 신대원을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우면서도 순수하였다. 이제는 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주의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 좌절은 필수고 실망과 원망은 부수적이다. 이를 주께 쏟아내도 된다. 시편을 내가 사랑하는 것은 주 앞에 못할 말이 없다. 또한 이를 사람에게 쏟아내지 못하게 하시려고 모든 길을 차단하신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이를 누구에게 말로다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는 말은 자신도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훗날에 이르시기를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우리로 더욱 주께 감사와 영광을 올리게 한다. 나는 어제 속상하였고 많이도 울었다. 그러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내 모습을 두고 주 앞에 부끄러워 송구하였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그렇게 원하던 성전건축을 아들 솔로몬에게 돌리며 주의 뜻을 전하고, 모든 것을 준비하는 것이 눈물겹다. 성도의 삶이란 본디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이를 통하여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자식들에게 미안함이 앞서고 아내에게 늘 빚진 마음으로 산다. 그럼에도 우리 부모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나와 나의 형제들은 일찍이 어려서부터 보았고, 그 때문에 특히 나는 하나님을 향해 억하심정을 갖고 살았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이 은총인데…. 나는 동생에게 어떤 말을 해주지 못하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숨기느라 말이 없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주가 아신다는 것, 주만 바란다는 것. 이는 마치 이상과 현실의 괴리 같고, 머리와 가슴의 간극 같다. 아니 가슴으로도 알고 벅차오르는 감격도 있으나 현실은 전혀 별개의 것처럼 고단한 것이다. 동생은 당장 모 회사 택배 일을 맡아하며 숨고르기를 하듯 한국에 정착하여 교회 개척자금을 마련할 생각이라 말하였다. 나는 속상해서 하나님을 향해 서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15년 필리핀 사역이 고작 이게 다인가? 싶은 것이 화가 또 눈물이 나기도 했다. 한데 주가 하시는 일은 우리의 완고함과 비례한다. 벌써 뜻을 굽히고 이제 그만 들어와야 할 시기인데 동생은 2, 3년만 2, 3년만 하고 연장하기를 몇 차례였다.
하긴 나 역시 숱하게 주가 부르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외면하고 살기를 수십 년이었고, 오히려 요나와 같이 다른 쪽으로 도망치려 하기를 몇 번인지. 그러는 동안 두 아이는 장성하였고, 나는 신앙으로나 인성으로도 떳떳하지 못한데 주께서 저 아이들을 주 앞에서 바르게 자라게 하심이 복되고 귀할 따름이다. 일련의 사태가 우리 온 가족에게는 주의 은혜를 더욱 실감하게 한다. 곧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이 모든 일의 설계를 그려 나에게 알려 주셨느니라(대상 28:19).”
이와 같은 감사와 축복으로 주께 영광이 된다는 것,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81:1-2).
오늘 아삽의 시는 더욱 나로 주 앞에 부복시킨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성장하기까지 나는 얼마나 더 무너지고 꺾이고 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가장 무서운 신은 자신(自神)이다. 스스로의 아집과 고집을 신으로 세워 우상화할 때 하나님은 기어이 이 완고함을 허무신다. 우리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대상 16:29).” 그러하기까지 우리의 아집은 끝이 없다. 계속 부대끼고 속끓이고 애타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저의 이와 같은 권면이 어디 머리에서 나온 것이겠나? 실질적인 자기 삶을 토대로 그 역경과 고난이 낳은 진리다. 그러므로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47:1).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149:3).
그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축복인지.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81:6-7).
주의 시험이 우리를 좌절하게 하나 낙심하지는 않게 하시고, 실망하여 슬퍼하게는 하시나 기뻐 뛰며 주를 찬송하게도 하신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주가 나의 죄로 당하신 모욕과 고통을 생각하면 감히 머리를 들 수 없는 일이었으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하여 오늘 우리로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소망을 알게 하신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어제는 우울감으로 땅으로 꺼지는 줄 알았다. 몸은 무겁고 마음은 서러워서 만사가 귀찮고 지겨웠다. 심지어 주의 뜻과 사랑도 지겨워서 이게 뭔가? 싶은 심정으로 원망이 가득한 날이기도 하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응징하고 보복하고 싶은 심정인데, 결국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내가 계속 미루기만 하니까 꺾으시려는 것이겠지! 하고 이를 순응하는 동생의 말이 더 서러웠다. 할 때에 오늘 시편은 내게,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8-9).
내 안에 여전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안다. 때론 건강이고 돈이고 자식이고 편안하고 안락함이다. 한데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그러므로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13-15).
곧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6:1).” 내가 누구의 것인지, 우리로 주의 영광을 누리게 하려 하심을. 하여 이는 만고의 진리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곧,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119:67).
우리로 바른 길 가게 하시려고,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그러므로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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