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 사람들의 문지기 반들은 이러하니라 아삽의 가문 중 고레의 아들 므셀레먀라
대상 26:1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 79:13
성전 문지기 24반열의 대표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고라 족속 아삽의 자손 므셀라먀 계열에서 7반열, 고라 족속 그핫 가문의 오벤에돔 계열에서 6반열, 므라리 자손 호사의 반열에서 4반열을 차지하고 있다(1-12절). 성전 문지기들의 담당구역을 제비뽑기를 통해 공평하게 선정한다(13-19절). 성전 동쪽에 여섯, 북쪽에 넷, 남쪽에 넷, 곳간에 둘, 낭실 서편에 넷, 낭실에 둘씩 배치한다. 성전 문지기의 직무는 성전과 세상을 구별하고 그 처소로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거룩한 장소로 보존하는 일이다. 가령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나 죄인들의 출입을 막았다.
여기서 눈에 띄는 이름은 오벧에돔이다. 주의 언약궤를 3개월간 보관하여 늘 복이 따르던 그 가문의 사람들이 문지기들 가운데 3분의 2를 차지한다.
이들은 오늘 우리의 역할을 돌아보게 하는데,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진리를 수호하는 문지기와 같은 사명을 갖는다. 부정함을 통제하고 죄를 멀리한다. 인본주의, 이성주의, 합리주의, 실용주의를 배격하고 그릇된 사상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바울의 때에도 그와 같은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방어책을 내어놓았다. 첫째,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과 둘째, 범사에 오래 참음으로 가르침으로 경책하라는 것이다. 이에 경계할 것을 권하였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이는 특히 오늘 날과 같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3-4).”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예언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른다. 스승을 많이 두어 이 말 저 말 허탄한 이야기에 잡다한 관심을 두고 따른다. 그러나 우린 성전 문지기 맡은 자들과 같이 이를 경계하고 신중하며 이에 따른 고난도 감수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함으로 우리에게 맡기신 직무를 잘 수호해야 한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5).”
내가 누구인지, 지금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우리의 사명을 망각하는 순간 진리와 비진리가 혼재하고, 교회와 세상의 구별됨이 허물어지면서 자신의 소임이 무엇인지를 잃는다. 지혜자는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 23:23).” 이는 매우 귀한 직분으로 자칫 세상 즐거움으로 잃기 쉽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그러므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은 주의 마음으로 주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다.
어떤 이를 대하는 데 있어 정말 싫은 사람도 있다. 예전 같으면 상종도 안 하고 살 텐데, 주가 곁에 두심은 주의 사랑으로 저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게 하려 하심이다. 예수님은 일러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 1:3-4).” 곧 우리가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이것이 오늘 본문의 성전 문지기의 사명이 아닐까?
또한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3).” 곧 우리 안에 새기신 우리의 생각과 행실과 마음이 모두 누군가에게는 읽혀져서 우린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삶이어야 한다. 이에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궁극적으로 이 일을 수행함은 우리에게 오벧에돔에게 내리신 복에 복을 더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무엇이 우선이고 나중인지를, 어느 게 더 귀하고 값진 일인가를 바로 분별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
가령 누가 내게 자주 문자로 기도부탁을 한다. 이런저런 저의 생활이 소상하게 적혀있다. 나는 저의 글을 여러 번 읽으며 그때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저가 나를 보고 그런 내용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이겠나? 주의 살아계심을 알고 그의 도우심을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내용을 나누고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주 앞에 고하는 것이다. 나는 저의 사연을 소중히 마음에 둔다. 그것으로 때론 볶이고 힘이 들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직접 최전방에서 그 모든 일에 맞서고 있는 저의 고통을 가늠하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시 62:12).
이와 같은 중보나 기도제목은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주가 내게 더하시고자 하는 은혜를 보탠다. 저는 가끔 내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한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오히려 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것은 저로 인하여 내가 더욱 주를 바라고, 주를 바람으로 나의 문제는 가벼워진다. 이것이 중보의 특징이다. 우리가 서로 기도를 나눈다는 일은 내가 내 문제로 백날을 씨름하며 고민하는 것보다 그 능력이 크다.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인데, 더는 내 문제가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 저에 비하면 사사로울 정도로 되레 감사가 나오게도 한다. 어찌 그럴까?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곧 오늘 우리가 누굴 위해 생각하고 그 마음으로 저의 일을 주께 아룀으로 우린 주께 꾸어드리는 것이 된다. 참 표현이 근사한 것 같다. 창조주 만유의 하나님께 내가 뭐라고 감히 꾸어준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이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9-10).” 그러니까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일은 자신의 문제를 덜고 그 일에서 놓여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또한 주신 바 현재의 모습에 만족할 뿐 아니라 감사로 그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머물게 하는 힘이 생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예전에 나는 자주 나의 삶을 비관하였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하면서 밀려드는 어떤 조바심은 항상 나를 옥죄고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늘 내 문제로 허덕거리게 하였다. 한데 주의 앞에 서면서 특히 내 앞가림도 못한다는 소릴 들을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저의 문제를 나누어 듣고 함께 씨름하듯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나의 문제는 점점 사사로운 것이 되었다. 전엔 늘 나의 영혼을 사로잡고 꼼짝 못하여 씨름하게 만들던 문제투성이의 것들이 더는 무겁지가 않은 것이다. 나는 이를 어떻게 실감나게 설명할 능력이 안 된다. 다만 누군가의 일로 마음이 어려워서 주의 이름을 부르다 보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나도 안다. 자격을 운운하고 그 능력을 두고 뭐라 한다면,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13).” 내가 저지르며 살았던 날들이 더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과거가 아니라 주의 은혜를 나타내고 자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에 오늘 시편은 다시 한 번 나로 구별되게 하심을 바로 알게 한다.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79:1).
이는 B. C. 588년 남유다를 세 번째로 침공하여 586년에 함락하는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의 포악함을 알리는 애가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였다. 곧 오늘 우리 가정도 또는 교회가 수시로 이와 같은 위협에 노출되곤 한다. 곧 스스로들 교회를 더럽히는 꼴인데,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누가 감히 스스로 깨끗함을 자부할 수 있을까?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24:3-4).
이처럼 말씀은 곳곳에서 우리로 어찌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다. 말씀을 중심에 두고 이를 묵상하고 살지 않으면 언제 어디가 뚫릴 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 어머니가 울부짖듯 하소연하였다. 늘 성실하고 착해서 한 번도 말썽부리지 않고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아들이 게임에 빠져 있었고 특히 인터넷 무슨 익명채팅창을 통해 말도 안 되는 상대와 이성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니 우리의 경건의 훈련이 왜 필요한지, 바울은 왜 일생을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려 하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우린 누구도 자신을 자신할 수 없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2-3).
우리 성도의 삶이 일순간 허물어지는 까닭은 방심할 때이다. 타성에 젖어 그러려니 하는 믿음은 이미 힘을 상실하였다. 엄밀하게 우린 늘 탄식하는 자들이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애 2:11).”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을 듣고도 그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고장난 시계와 같이 저의 영혼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취향이나 누구에 대한 선입견은 이를 늘 무심하게 만든다. 그런 자는 또 자기 문제로 늘 씨름한다. 가령 누구와 통화할 때 나는 전에 들었던 저의 어떤 일을 두고 어찌 되었나 묻곤 한다. 그 일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저는 일체 나에 대해 묻거나 궁금해 하지 않는다. 교회는 어떤지, 가정은 어떠한지 등 사사로운 것조차 심지어 내가 먼저 말하고 기도부탁을 한 것에도 저는 기억이 없다. 왜냐하면 늘 자기 문제에 함몰되어 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렘 7:33).” 그 영혼은 무력해져서,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14:16).” 늘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꼴로 살아간다.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19:7).” 그런데도 이를 천연덕스럽게 여길 따름이다. 결국 “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34:20).” 우리의 비극은 주가 내버려두심이었다.
이에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잠 8:34-35).” 때론 억지로라도 나를 이른 새벽에 깨워 말씀 앞에 앉힌다. 억지로라도 책을 읽고 메모를 하고 누구의 설교영상을 찾아본다. 때론 지겨울 때가 있고, 때론 할 일이 없어서 꾸역꾸역이라도 한다. 솔직히 나는 일주일에 설교 원고 한 편 작성하는 데도 부담감이 크다. 이젠 나름 주초에는 본문을 여러 번 읽고 성령이 주시는 이해와 지식으로 되풀이한다. 다음 날 초안을 작성하면서는 주석도 찾아보고 관련 책자들을 뒤적인다. 삼일 째는 슬슬 조급해지는데 특히 어제 같은 경우 취합한 초안원고가 스무 장이 넘어 이를 다시 읽으며 정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주말이 오면서 그 본문의 핵심과 주변 인용구절, 예화 등을 정리한다. 그러다 보면 금세 또 한 주간이다.
이는 개인적인 노고이고 실은 자주 ‘이렇게까지 할 게 있나?’ 하는 유혹에 드는 일이다. 그래봐야 늘 같은 식구들과 몇 명 안 되는 청중이 다인데, 간단하게 정리하고 예전 것으로 대체하고 싶은 강한 욕구도 든다. 그럴 때 바울의 고백은 큰 지침이 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나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은 한도 끝도 없다. 그럴 때 주가 주시는 위로가 실은 더 크다. 이처럼 몇 명 보지도 않는 글인데, 나는 묵상글을 날마다 공들여 쓴다. 주석을 옆에 펼치고 역사적인 배경도 살피면서… 이는 결국 내게 더하시는 은혜의 맛을 알면 알수록 성령이 주시는 욕구는 강해진다. 어느 한 구절의 말씀 앞에서 내가 무너질 때,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4).
그래도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9).
결코 주가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심은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해서이다. 중요한 것은 억지로라도 나를 쳐서 여기 이 자리에 끌어다 앉히는 일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왕하 19:19).” 주가 어찌 인도하실지 알 수 없으나, 묵묵히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수행할 때,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렘 15:15).”
그러므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이는 주의 약속이시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결국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13).
이것이 우리의 사명으로 부르심의 목적이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주가 하신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34:18).
그러므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84: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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