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크심이라
대하 2: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시 84:5-7
오늘 본문 역대하서 2장부터 8장까지는 솔로몬의 통치에 있어 핵심이랄 수 있는 성전건축에 관련된다. 성전 건축을 결심하고 역군을 세우고 감독자 삼천육백 명을 선출한다. 또한 건축기술자를 두로 왕 후람에게 요구하고, 이에 후람은 이스라엘계 사람인 후람아비를 파견한다. 여기서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 건축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는데,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크심이라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능히 그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5-6).”
곧 우리의 결단이 있으면 다음은 그 사역을 감당하는 데 따른 결행이 있을 뿐이다. 앞뒤를 재다보면 미적거리게 되고, 따지는 게 많아진다. 여러모로 따져보고 헤아리다 미뤄두거나 결국 회피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곧 저는 노인이 되어 감옥에 갇혀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1-12).” 하며 자신을 독려하고 이를 빌립보교회를 향한 서신에 담았다.
곧 이 일은 어쩌다 직업 선택의 하나가 아니라, 이미 그 부르심은 택정하심을 받은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이는 결코 우연한 기회나 여러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그에 따른 삶의 고통은 가히 예상을 초월할 때도 있다. 그런데 세상 그 어떤 일, 어떤 곳에 고통이 없을 수 있을까? 왜 우리 하나님은 이 땅에 고통을 허용하시는 것일까? 이는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의 입술에서 주를 찬송하고 감사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는 주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된다. 참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이성과 판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까지도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안 된다. 주의 권능으로만 감사도 찬송도 가능하다. 고통 중에 무슨 흥으로 우리가 주께 감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시 137:4).
시인의 절규가 가슴에 와 닿는다. 마치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온 것 같은 세상에서 돈에 팔리고, 자신의 욕망과 아집에 눌리면서, 사람에게 치이고, 여러 환경과 여건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제 우리의 현실이라,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1).
이에 우리의 울음은 정당하고 원망과 불만은 마땅한 것이다. 한데,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33:1).
하고 마치 궁지에 몰아세우듯 당면한 고통과 무관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가 고통 중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하는 것이 성경의 지침이다. 이를 위하여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하고 궁지로 몰아간다. 그럼에도 세상은 얼마나 많은 고통이 넘쳐나는지…. 가령 암으로 인한 고통과 사망률을 보면 우리가 들숨과 날숨을 내쉬고 들이 쉴 때마다 암으로 죽는 사람이 평균 네 명씩이라고 한다. 매분마다는 아흔다섯 명씩 죽고, 매시간은 오천칠백칠 명이 죽는다는 수치도 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 세상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고통을 두신 것일까? 하나님은 결코 죄를 짓지 않으시고 고통을 조장하신 적이 없지만, 이를 다스리시고 통제하시는 것은 분명하다. 혹자는 말하길, 우리 신 하나님은 고통을 다 통제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는 데 있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이 작은 미물까지도 주의 통치 가운데 있음을 밝힌다(마 10:29). 나아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30-31).” 하고 말씀하셨다. 저는 누구신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우리의 고통, 죄의 문제를 담당하려고 오셨다. 그런 예수님은 바람과 풍랑도 통제하신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8:27).”
그러니까 하나님은 고통을 막지 못한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그뿐인가?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애 3:37).” 곧 오늘 이 모든 여건과 상황, 그 가운데 우리가 겪는 고통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 설령 저가 나를 죽이신다 해도,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곧 그는 가장 선하신 뜻을 이루시려는 것이다. 이에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하나님은 결코 어둠을 허용할 수 없는 빛이시고,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선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92:15).
곧 우리의 고통으로 하나님은 불의가 없으심이 선포된다는 역설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고통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까? 오늘 시편을 먼저 묵상하고 이에 따른 추적을 이어보겠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4:5-7).
앞서 찾아본 성경과 오늘 시편의 찬송을 근거로 고통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모든 고통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바 있다.
곧 주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다. 다시 말하지만 어쩌다 내가 남자로, 어느 가정에서,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 어쩌다 어떤 일을 당하면서 고통 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자들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선별하시고 이 모든 계획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세우셨다. 곧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도 어쩌다 상황에 따라 그리 변경시키고, 그때마다 임기웅변으로 오늘의 고통을 그때그때 대처하시는 게 아니다. 때론 이를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없었던 게 되는 것은 아니다.
둘째, 고통은 우리들로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알게 한다.
바울은 그래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하는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다(롬 8:18-20). 즉 우리가 오늘 그 어떤 고통을 당한다 해도 이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이를 믿는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우리로 허무한 데 굴복하지 않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한다.
셋째, 고통은 우리에게 예수가 가장 귀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 어떤 고통 중에서도 굽힐 수 없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곧 우리 자신이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하고, 아무리 현실이 어떻다 해도 ‘모든 고통은 목적이 있는 것으로’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다시 읽으며 묵상해도, “이는” 즉 오늘 우리의 고통은,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서 동시에 ‘흠이 없고 순전한 자’로 거듭났음을 알고, 더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세상이 아무리 흉흉하고 사람들은 점점 악해져간다 해더라도,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곧 우리들로 하여금 그러한 세상에서 구별되게 하여 빛을 밝히고 생명의 말씀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즉 오늘 우리가 당하는 어떤 어려움, 이 고통의 현장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은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주 앞에 서서 영광과 기쁨과 그 영원한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로 삼고자 하심이다(빌 2:15-16). 그리하여,
넷째, 그리하여 세상 고통은 예수께서 고통당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을 완수하였다.
돌아보면 알지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곧 우리의 선행과 의로움의 대가로 얻은 구원이 아니다. 내가 죄 중에 있어 죽어 마땅한 때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를 그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고통이 없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없으셨다면 우리의 구원도 무산될 것이다. 곧 죄의 삯은 사망이고 이는 모든 인류의 숙명이다. 한데 세상에 고통이 난무하고 그 말도 안 되는 고통으로 인하여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헤롯은 박해하였고, 빌라도는 방관하였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
솔로몬의 다음 고백은 그러므로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능히 그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대하 2:6).” 이는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고, 알면 알수록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귀하고 엄청난 것인가를 우리로 밝히 알게 한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롬 3:29).” 이 놀라운 진리 앞에 나 같은 죄인은 몸둘 바를 알지 못한다.
나는 옹졸하여 혼자 분에 겨워 속상하다. 목사이면 나도 이제 좀 의연하고 지긋하게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다리면 좋을 것인데…. 결국 필리핀 동생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는 악의적인 거짓말과 망상 따위로 더럽혀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가난하고 가진 것은 없으나 변호사의 조력을 받기로 했다. 마치 두로 왕 후람의 기술자들의 조력을 받아 주의 성전을 건축하는 솔로몬과 같다. 교회의 형편과 목회자의 사정을 듣고 변호사는 오백만원에 혹시 모를 재판까지 염두에 두고 이 사건을 맡아 다시 준비하고 대비하기로 한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는 인격적성격장애로 망상에 빠진 환자로밖에 볼 수 없었다. 망상에 빠지는 분열증 환자가 무서운 것은 자신이 말한 세계를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다. 저로서는 바로 돌아서기 무섭게 지어낸 거짓말이 실제가 된다. 저의 고소장과 항변으로는 누구의 말도 심지어 어떠한 주장도 무의미하다.
그런저런 말끝에 그럼에도 그 아이와 아이엄마를,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을 두고 염려하는 동생의 말을 들으면서 결국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령 내게 오는 아이가 무슨 일로 마음이 상해 아주 작은 거짓말을 더하여 한 말이 그 엄마에게 와전되었고, 그 일로 아이엄마는 나를 잘 알면서도 더해지는 아이의 말은 그 상황의 진의여부와 상관없이 나를 아주 몹쓸 사람으로 몰아간다고 할 때, 아이의 말만 듣고 이와 같은 공격을 한다면 나로서도 선뜻 저를 상대하여 맞고소를 하네 어쩌네… 그럴 수는 없었을 것 같다. 나 또한 저와 아이를 상대하며 쌓아왔던 마음과 주를 향한 마음이 있어, 같이 대대거리며 싸우려 하겠나? 그 심정이 오죽할까? 이는 결코 주가 넣으신 마음이다. 한 다리 건너 남의 일로 듣고 있는 나로서는 동생과 그 가족의 심정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도 왜 이처럼 세상에는 고통이 끝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고, 고통이 들어오고 그 고통이 실은 이미 더 오래 전에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통제되고 다스림을 받는다는 데 생각이 닿았던 것이다. 하면 우리로서는 기도뿐이다. 누가 기도부탁을 하는데 그 내용이 기가 막혔다. 평생 목사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는데, 큰 아들은 지능저하로 장애판정을 받았고, 다음 아들은 우울감과 부모에 대한 반감이 심해 결국은 정신과로 데려가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부모는 은퇴하여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정착할 곳이 없이 그 생활이 말이 아니고, 결국 둘째는 부모와 같이 사는 것을 거부하다 누구 교회 숙소에서 기거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1-2).
오늘 시인의 절규가 눈물겹다. 우리에게 닥치는 이런저런 고통 중에 우리는 무엇으로 살 것인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겠나? 일련의 사태로 귀국을 결심하고 당장 택배라도 해서 정착을 하고 남은 사역을 감당해도 모자랄 판에 오백만원을 들여 결국은 방어를 위해서도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 이러한 현실에서…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고통 중에도 주의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니,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누구는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맞고소를 하고 더 큰 로펌에서 이천만원을 들여 상대하자 하면서 그 모든 비용과 절차를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나서지만 동생은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래서 설사 그 이상의 위자료와 보상을 받아낸다고 한들, 과연 그리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옳은 일인가? 하는 부분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그럴 바에는 감옥에 가면 갔지 그게 덩달아서 뭐하는 짓이냐며 동생은 올곧은 선택을 하였다. 자신이 끌어모으면 오백은 어떻게 될 것 같고, 더는 자신이 어찌 방어를 하거나 상대를 할 수 없어 저의 도움을 받는 것이지 그것을 손해로 생각하여 나중에 다시 돌려받을 생각은 없다고 하였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3-4).
우리가 누굴 의지하고 무얼 바라는 게 옳은가?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5-6).” 말씀뿐이다. 말씀으로밖에 달리 새 힘을 얻을 데가 없다. 나는 어찌 도울 수도 없어서 마음만 어려운데, 그런 심정을 아는지 동생은 오히려 나를 걱정하며 너무 마음 쓰지 마! 하고 위로하였다. 나 역시 다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 3:17-18).” 이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5-7).
말씀을 되뇌며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을 생각한다. 이에,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3:3).
우리의 기도는 이뿐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84:8-9).
그러할 때,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0-11).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주를 향한 믿음이 있다.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그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셨고, 온전히 주의 길을 가게 하셨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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