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전봉석 2022. 10. 2. 04:18


아사가 일찍이 유다 사람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그들이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
대하 14:7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시 96:1


3대 유다 왕 아사(B. C. 911-871년)에 대한 기록이다. 16장까지 이어지는 아사의 종교개혁과 국방강화는 유다를 평안하게 한다. 이 평화는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의미한다(1-8). 이어져 구스 땅 세라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유다 마레사로 진격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바다 골짜기에 진지를 구축하게 하시고 유다의 승리를 이끄신다. 도주하는 세라를 블레셋 땅 그랄까지 추격하여 진멸시킨다(9-15). 세라는 애굽의 22대 왕조 오소로콘 1세의 군대를 이끌던 장수로 추정된다. 이를 계기로 선지자 아사랴의 책망과 격려(15:1-7)로 2차 종교개혁을 실시하는 발단이 된다. 이후 다시 평화가 깃든다(8-19).

이를 보면서도 알 수 있듯이 바른 신앙은 평안의 동력이다. 이를 우리가 믿음 안에서 지속해야 하는 것은 단계적인 구원과 연관이 있다. 단회적인 구원을 믿음으로 주의 자녀가 된 것으로 본다면 이는 우리의 출애굽과 같다. 주님은 거듭남이라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이에 그 단계적인 구원은 광야와 가나안정복과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로 이해하여, 성화를 이뤄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곧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이에 안연히 살면 평안하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차분하게’, ‘걱정없이 평안하게’ 곧 ‘안연히’라는 부사어를 붙어 우리가 안연히 산다는 것은 오직 하나,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바울 사도의 축복기도는 앞서 5장의 내용으로 견고해진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물론 이 땅에 살면서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어찌 없을 수 있을까? 죽기 전까지 산 자의 몫은 고통뿐이지만, 환난이 우리로 소망을 갖게 한다. 이는 억지이면서 역설이다. 수잔은 골수결핵을 앓으면서 ‘병을 낫게 해주시면…’ 하고 바라던 세월을 접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 하는 마음으로 고침을 받으면서 의사가 되어 환자를 돌보겠다던 것보다 더 많은 환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생을 살았다. 강영우는 중2 때 축구를 하다 시력을 잃고 소경이 되면서 갖은 어려움을 겪지만 저는 정상인보다 더 월등한 삶을 살며 주를 찬송하였다.

이는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곧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은 완성되었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를 주장하시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종종 여러 어려움을 듣고 기도를 부탁받는다. 가만히 저가 겪는 어려움을 되새길 때면 과분한 감정이입으로 나 역시 어려움을 느끼게도 된다. 그런데 그것이 기도가 되는 것은 기이하다. 그런가보다, 하고 듣고 말면 그것으로 무슨 기도를 삼을 수 있을까? 나는 그래서 나의 나 됨과 연약함을 사랑한다. 아니면 내가 저들의 고통을 머리로만 듣지 가슴으로, 심령으로 같이 나눌 수 있었겠나? 오히려 복되다. 어제도 두 친구의 어려운 소식 앞에 나는 저들과의 대화를 메모하며 주의 이름을 되뇌다, 그 상황을 통해 주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믿고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 아프지 않은 사랑이 사랑이겠나? 같이 슬프지 않은 위로가 위로이겠나?

곧 우리로 연연히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아사는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대하 14:3-5).”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로 다윗과 솔로몬 이후 저와 같은 결행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 같은 아사의 종교개혁은 당시 분열된 이스라엘에서 유다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하나님께로 올려드리는 일이 오늘도 절실한 개혁이다. 이는 구호나 외침이 아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 하던 수잔의 결행이다. 병상에 누워서, 환자로, 고통 중에… 언제까지 낫고자 하는 일에만 열중하여 주께 바랄 게 아니라, 지금 주신 이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는 것.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물론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에게 이와 같은 말이 오히려 가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가령 나는 요즘 ‘오히려’ 좋다. 장모님을 집으로 모시면서 나는 그 뒤로 새벽 일찍 교회로 나온다. 그리고 이처럼 서너 시간 이상 넉넉하게 묵상글을 쓴다. 마치 이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셨는가, 싶을 정도로 모든 게 다 감사하다. 아내도 마음은 편한지 웃음이 많아졌다. 받은 은혜-축복을 ‘오히려’ 주께 돌리는 것. 그것으로 점점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줄어든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하나도 버릴 게 없다.’ 어렵고 불편함까지도 말이다.

강영우 박사는 훗날 주께 영광을 돌리며 일찍이 자신이 소경된 것과 그로 인한 어려움이 오히려 주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고 고백하였다. 저는 유엔에서 세계장애인인권운동가로 활동하였고, 아들 부시 정권 8년을 저의 정책보좌관으로 지냈다. 수잔의 생각의 전환이 환자로서 환자를 돌보는 선한 활동으로 번져 자신이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는 물론 영국 전역의 병원마다 ‘수잔 무브먼트(movement)’라 하여 환자들이 환우를 돌보는 활동이 일어났다. 수잔은 훗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며 자신은 의사가 된 것보다 환자로 살며 더 많은 환우를 돌볼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아사 한 사람의 각성이 온 유다가 주를 우러르며 경외하게 하는 것을 본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주가 맡기신 일을 감당한다. 이에 어떤 어려움은 우리로 ‘주의 뜻’을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를 위해 우린 영적인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오늘 6절 말씀,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그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 주가 주신 평안으로 저는 성읍을 건축하고 국방을 바로 하였다.

이를 솔로몬의 격언에서 되짚어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하여 주를 인정하는 일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주신 삶 가운데서 자신을 바로 하는 것.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사 47:8).” 스스로 괜찮다 할 때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성경구절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는 마치 ‘다 이루었다’할 때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내 안의 어떤 안도감이 행여 안일함이 될까 하여, 주가 오늘 내게 주시는 이런저런 어려움이 나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그래서도 바울은 늙은 자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는 것이 아닐까?

곧 우리가 주 앞에 바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려 하는데도 시련이 오는 것은 능히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도 욥의 담대함은 훌륭하였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하고 뒤에 이어지던 저의 말이 내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11-12).” 살면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 얼마나 자주 또한 아무렇지 않게 주를 의심하곤 하는지……. 그럴 때 내 안에서 치고 일어나는 외마디 비명 같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6).

하면 오늘 시인과 같이.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96:1-2).

새 노래, 오늘은 오늘의 은혜로 산다. 오늘 시편은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성 주의 장막에 모시고 찬송하는, 역대상 16장 8-36절 가운데 23-33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여기서 우리의 찬송은,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5-6).

하는 것으로 앞서 주의 위대하심과 기이한 행사를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내신 바 되었음을 알리었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3-4).

나는 이를 나의 삶에서 일찍이 경험하였다. 그때는 하나님을 멀리할 때에도 동일하였다. 그저 우연으로 또는 운 좋게, 어쩌다 그리 된 일로 알았던 것들이 주의 사랑을 알고 난 뒤에 모두가 주의 행사였음을 뒤늦게 깨닫기도 하였다. 아, 그게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일들…. 내가 그때는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하였는지,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사 45:20).” 그때는 나에게 아무개 선생이 있었고 어떤 친구도 있었다. 저들과 어울리고 함께 하면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줄 알았다. 한데 “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렘 10:5).”

정작 나의 심령이 상했을 때, 인생을 그만 살고 싶어 할 때 저들은 내 곁에 없었다. 아니 내가 의지하였을 때, “보라 네가 …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사 36:6).” 나에게 저들은 그러하였고,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55:12-13).

하여 나는 지금도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며, 누가 나를 의지하려 할 때 거리를 둔다. 우리 사이에 주를 모시지 않으면, 저가 내게 했던 하소연이 도리어 서로를 찌른다. 내가 저에게 했던 권면이 도리어 몽둥이가 된다.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은 모두 그러하였다. 하여 나는 누구와는 이제 의도적으로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친다. 누구의 이야기 뒤에는 반드시 말씀을 근거로 기도하기를 당부한다. 이를 오늘 시편은,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7-8).

아니면 이것이 사람을 높여 자칫 목사가 교회의 머리가 되고, 자신들의 헌신이 정당한 값을 요구해도 되는 듯 하나님 앞에 청구서를 내민다. 졸지에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드는 형국이다. 누가 아니라 내가 수시로 그런다! 입을 삐쭉거리고 시무룩해하며 마치 내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주의 은혜를 요구한다. 그러할 때 주님의 꾸지람은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눅 19:22).” 그러니 나는 얼마나 자주 우리 주님을 옹졸한 아버지로 만들고는 하는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그러므로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33).” 이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곧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주를 사랑하는 그것이다.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후 1:14)”

아,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96:9-10).

이와 같은 말씀 앞에 가만히 주를 바라는 일, 문득 떠오르는 누구를 생각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끙’ 하고 허리를 짚고 싫지 않은 통증으로 허리를 펴고 눈을 감을 때…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69:5).

머쓱해지면서 주의 은혜를 바랄 때의 알 수 없는 감동이 나는 좋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43).” 이제 이 말씀이 내 것으로 들릴 때,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96:11-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