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07편 / 여호와께 감사하라

전봉석 2022. 10. 7. 10:39

221009 주일

시편 107편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 107: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7: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시 107:3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시 107:43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들어가는 말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3).”

우린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다. 속량이란 죄를 대신 씻어주신 구원, 즉 죄 값으로 지불해야 할 사망을 대신 갚아주시려 죽으신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것이다. 그런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이는 마땅한 것이다. 감사를 모르면 이는 짐승이다. 이에 말해야 한다. 말할 게 없는 신자는, 불행한 자들이다. 누구에게든 자신이 어떤 자였고, 어떻게 속량하심을 받고 나은 삶을 사는지, 이를 오늘 시편은 ‘대적의 손에서 속량하신 것’으로, 우리의 대적은 사탄-세상에 권세 잡은 자이다.

이에 저들 손에서 놓여난 우린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 모였다. ‘각 지방’은 지역이란 사전적인 의미도 갖지만, 저마다의 형편과 사정, 성질과 기질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하나로 모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함축적인 의미로, 그 죄가 어떠하든지, 어떤 성질머리와 기질을 가지고 있든지, 우린 “그 기쁘신 뜻대로…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속량)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이것이 우리를 속량하신 목적이고,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고 우리가 믿는 진리다.

이에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바,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3).” 무슨 의미일까? 이는 여러 함의적인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금식과 기도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16).” 외식하는 자들, 곧 남들에게 보이려는 자들은 자신들의 특별함을 드러내기를 바란다. 해서 그 영광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한다. 하여 주님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고 해서 이것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어두운 데’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아뢴 기도인데, 이 응답은 ‘광명한 데서 들리’는 것 같이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신다. 또한 우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 하나님께 웅엉거리듯 속한 기도가 마치 지붕 위에서 큰 소리로 외친 것처럼 이루어진다. 가령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가 그러했다.

둘째, 구제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4).” 이는 기도와 같아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3).” 마치 보란 듯 하는 행위에 대하여 경계하신다. 왜냐하면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2).” 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이를 홍보하는 데 쓰고,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하는 일에서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이다. 하여 지혜자는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물 위에 던진다는 것은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처럼 생색내지 않고 하면 까마득히 잊고 있던 때에 도로 찾는다,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나아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19:17).”

셋째, 성도간의 교제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하신 것과 같이 서넛이 서로 나누었던 성도간의 교제, 즉 간증은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2).” 조금 정리하면 간증은 남다른 자신의 체험을 떠벌이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서로의 간구와 같아서 ‘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다. 또한 성도간의 긴밀한 대화는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를 더하여 ‘나도 그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한다. 가령 짧은 인디언 선교지에서 작성한 ‘브레이너드의 일기’가 훗날 영국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심어주었다.

곧 우리의 기도와 구제와 간증은 은밀하게 주께 아뢰고, 성도간의 교제로 그치지 않고 이는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하는 것 같이 밝고, 크고 넓게 퍼진다.’ 마치 세례요한의 외침은 ‘광야의 소리’로 바람에 흩어지고 말 것 같았지만, 저의 외침으로 메시아,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을 만방에 알리었다.

이에 오늘 본문의 결론이랄 수 있는 구절로 마지막 구절,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 곧 우리가 받은 ‘속량하심’을 ‘속량하심’을 앞으로 받아야 할 ‘지혜 있는 자들은’ 이를 지켜보고 주의 인자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이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선민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서 구속하심을 받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저자는 바벨론 포로 귀환 후의 어느 익명의 시인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저의 찬양과 감사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까지 들려지고 있다. 내용을 분해하면,

1연(1-3)은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입은 자’는 찬송해야 한다.
2연(4-32)은 역사가운데 하나님의 기사를 찬양한다.
3연(33-43)는 천하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송한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자하심,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엡 1:17-19)”

1) 간구: 내가 기도할 때에
① 기억하며
②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③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또한,

2) 성도간의 교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①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②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③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우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저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로 각각 세 개의 이유를 밝힌다.

1) 바울이 기도한 내용.
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길.
② 서로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기를.
③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하기를.

2)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신다는 것.
① 그것은 주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다는 것.
② 성도 안에서(교회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신다.
③ 주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로 알게 하신다.

왜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하는지?

첫째,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 영혼을 죽이는 죄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지 못한다.
둘째,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사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지 못한다.
셋째,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충분한 주의 권능을 알지 못한다.

이 세 가지를 알지 못할 때, 구원의 기쁨 없이 껍데기로 믿는 신자들이 많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암담하고 어두울 때, 우린 자신의 ‘마음의 눈’ 곧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먼저 ‘진정한 예배와 헌신’이 있는가? 하는 것. 다음은 서로 나누는 성도간의 교제-구제가 살아 있는가? 하는 것. 마지막 하나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시간이 살아있는가? 하는 것. 이를 우선적으로 정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오늘 시편이 밝히는 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과연 자신은 감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확고부동한 신앙 고백이 가능해진다. 오늘 시편은 이를 촉구한다. 본문을 중심으로 앞에서 정리한 세 단락으로 이 근거를 삼고 마치겠다.

1. 하나님의 속량하심을 입은 자들은 주를 찬양한다(1-3).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고 시작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첫 발이 감사에서 발돋움하기 때문이다. 우리로 찬송하라고 하는 것은 의무도 책임도 아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선지자 에스라는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스 3:11).” 하였고, 예레미야는 애가에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고 단언하며,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하고 고백하였다.

이사야는 기쁘게 찬송하며,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4:23).” 하고 삼라만상을 우리도 포함한 모든 세계가 손을 높이 들고 주를 찬양할 것이라 장담하였다. 사도 바울도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이와 같이 우린 저마다의 체험과 감격과 주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산다. 감사와 찬송이 인색하고 밋밋하다면 그 잃어버린 감각,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2. 우리의 역사(개인적인 경험)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기사를 찬양하라(4-32).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4-5).”

다시 말하지만 감사할 게 없으면 그 영혼은 목이 말라 피곤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번 ‘국군의 날’ 때에 바다 위에 떠 있는 어마어마한 군함들을 보았다. 그 위로 수십 대의 전투기들이 들고 날았다. 갑판 위에 도열된 여러 대의 전투기는 경이롭기까지 하였다. 그것은 거친 파도에도 군함은 뒤집히지 않았고, 뱃머리를 강타하는 높은 파도에도 부서질 듯 흔들리다가 중심을 잡았다. 그 위용의 비밀은 평형수였다. 무게 중심을 위해 일부러 물을 채우는데, 미군의 핵함정은 원자력이 담겨 있다고 했다. 그와 같은 평형수가 어떠한 세파에도 배를 뒤집지 못하게 하였다.

그럼 우리 신앙의 평형수는 무얼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다. ‘주기도문’으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신 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하고 우리는 날마다 이를 암송한다. 그 가운데 특히 세 번째 호흡,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부분을 우리 신앙의 평형수로 채워야 한다.

‘어떤 문제’가 세찬 파도처럼 우리의 일상을 타격한다. 이때 우린 첫 번째 호흡,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주의 거룩을 바란다. 그런 뒤 두 번째 호흡,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고 오늘 우리 삶에 역사하시기를 구한다. 이때 세 번째 호흡,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우리도 그 ‘하나님의 뜻’의 일원이 되기를 구한다.

이는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 18:6).” 하는 시인의 고백과 같다. 곧 우린 환난, 어떤 문제, 거친 파도 구원의 항해에서 우리 신앙의 뱃머리를 가격할 때, 우리 신앙의 평형수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나의 삶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은 약속하셨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91:15).” 이는 주의 약속으로 채운 우리의 평형수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모진 세파라 해도 우리 구원의 항해는 뒤집히지 않는다.

이에 오늘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107:8).” 하고 우린 의연하다. 이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15).” 곧 내게 행하셨던 주의 놀라우신 기적들, 곧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21).” 하는 감사와 찬송이 ‘어두운 데서’ 혹은 ‘골방’에서 부르짖었을 뿐인데, 이를 ‘광명 가운데’ 혹은 ‘지붕 위에서 전파하는’ 것처럼 만방이 알게 하신다. 하여 이를 다시 반복하듯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31).”

이를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고 설교하였고, 사도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하고 설교하였다. 결국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70:4).” 하고 시인은 찬송하고 또 찬송한다. 찬송은 자랑이다.

3. 천하를 그의 뜻대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33-43).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

이에 지혜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하고 주의 전능하심을 알게 한다. 이를 인정하면,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이것이 우리가 인생을 사는 지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하고 바울 사도는 설교하고 있다.

곧 자신에 대한 권리를 주 앞에 내어드리는 것이다.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행 19:36).” 즉 자기 선호, 자기 결정, 자기 판단과 자기 기준을 버리고,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나오는 말’을 대신하여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오늘 시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인생의 ‘감사와 찬송’의 근거를 찾게 한다. 각자의 감사와 찬송이 없으면 그 신앙은 목마르고 피곤하다. 하여 “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슥 3:11).”

이와 같은 언약의 말씀이 우리의 평형수로 채워져 천국항에 도착하기까지 우리 구원의 항해에서 난파되는 일이 없기를, 하여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107: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