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08편 /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전봉석 2022. 10. 13. 13:57

221016 주일

시편 108편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108:1 [다윗의 찬송 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시 108:2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108:3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시 108:4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시 108: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시 108:6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들어가는 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고난 중에 우리는 찬송하는 사람들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섭리를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영광이 됨을 알기 때문이다. 이에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곧 우리가 사는 동안 언제 어떤 일에서든 주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찾는 것은 그 때문이다. 베드로는 설교 중에 전하였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두 가지로,

첫째, 자연과 독생자의 성육신을 통해 알고, 이에 영광을 올린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2-33).” 이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것으로,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는 이를 실감한다. 그래서 흔히 인생의 노년을 겨울로 비유하고, 한참 청춘일 때를 봄날로 비유한다. 미물인 짐승을 통해서도 자연의 이치를 알고, 이 모두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 그렇다고 해서 범신론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또한 인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성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어 오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피곤해서 주무시고, 배고파서 진지를 드셨다. 당시 바리새인은 물론 제자들도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하고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이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고 답답해하셨다(9). 이를 보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하고 실제 우리가 본 증거를 들어,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21).” 하고 마땅히 ‘듣는 자’는 ‘본 자’로 이웃을 사랑함으로 본 것을 증명하며 살았다.

예수님은 이를 비유로 말씀하시길,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하고 마땅히 사랑의 증거를 요구하셨다. 그리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고 단언하셨다(요 20:29).

곧 우리는 대자연과 예수를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며 산다. 설령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지 않는다 해도, 마치 우리가 세종대왕의 한글을 통해 저의 존재와 그 업적을 알듯이 성경을 통해 우린 예수의 존재여부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이 두 번째 증거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우린 말씀으로 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5-16).” 즉 이런저런 어려운 일에서도 성경은 우리로 ‘갈 바’를 알지 못하나 ‘행할 바’를 알게 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환난에도 이를 극복하는 데 있어 주의 도우심을 안다! 자연과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알았고, 이제 그 말씀으로 안다.

우리가 아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고 요한은 이를 증거하였다(요 1:14).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은 안다는 데서 채신머리없이 사람들을 따라 살지 않는다. 저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이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17:2).”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하고 바울은 덧붙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이고,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이 곧 자신의 영광이 된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하고 세상의 특징을 단호히 설명하였다 이를 시인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고 말씀으로 앎을 고백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하고, 이 모든 성경의 주격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하시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 주의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려 할 때 이 성경을 안다. 수천 년 전에 앞서서 예레미야도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렘 11:18).”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뒷받침하였다. 곧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8).”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곧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자연과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알듯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 29:9).” 이것이 우리 신앙이다. 왜 이를 지켜야 할까?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9-10).”

 

이를 토대로 본문으로 들어가면, 오늘 시편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붙들려하는데, 첫째는 고통 중에도 주를 찬송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과 둘째는 이를 견디는 힘이 우리로 약속하신 상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예수님의 ‘산상수훈’으로 연관 지어 확인할 수 있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다윗의 시다. 이를 후대에 편집하여 두 편의 시를 한 편으로 완성하였다. 곧 57편과 60편의 시를 조합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두 연으로 보면, 1연(1-5절)은 시편 57편 7-11절의 내용과 같이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숨어서 쓴 것이다. 2연(6-13절)은 60편 5-12절의 내용과 같이 다윗의 통치 초기에 에돔의 전투에서 패하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이다.

오늘 시편은 바벨론에서 귀환한 어느 익명의 시인이 당시 자신이 겪은 이방나라에서의 수치와 서러움을 토대로, 다윗의 시를 읽고 묵상하며 두 곳의 내용을 한 시로 편집한 것이라 본다. 다시 정리하면 1연에서는 열방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서원하고, 2연에서는 열방의 대적들에 대해 승리를 간구하고 있다.

1. 고통 중에 아름다운 찬송을 올리자(1-5).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1-2).”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벨론의 포로 때와 다를 게 없다. 이에 그 마음을 정하였던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하였다(단 1:8). 앞서 이 길을 걸어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 11:36-37).” 그러한 박해나 고통 가운데서도 주를 찬송할 수 있었다. 해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8).”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39).” 그럼에도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즉 지금의 이 모든 고통들은 장차 우리가 받을 상급과 비교도 안 된다. 이에 오늘 시인은,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시 108:3-4).” 하면서 조금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5).” 하는 고백과 찬송으로 새벽을 깨웠다. 일찍 잠에서 일어났고, 일어나서 먼저 말씀 앞에 앉았다.

2.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주가 다스리신다(6-13).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6, 12).”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뿐이다. 저는 성소에서 말씀하신다. 때론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는 신음 같은 기도가 나올 때도 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11).” 그렇게 우릴 돕지 않으시는 것 같은 하나님께 대하여,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13).” 하고 아뢴다. 이는 우리가 알기로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모든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108:12).” 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그렇다면 왜 우리를 고통 중에도 내버려두시는 것일까? 이는 마치 코치나 감독이 그때마다 안쓰럽다고 해서 선수를 쉬게 하고 놀린다면 저들은 결코 훌륭한 선수로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 고통과 수고 다음에 있을 ‘더 좋은 것’ 곧 상급이 있음을 우리 안에 소망으로 주셨음으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렇다면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어떤 상을 받을 수 있을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둘째,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

셋째,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넷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얻는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다섯째, 우리는 영원한 나라의 소유주가 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여섯째, 우리는 의의 맛으로 배부를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일곱째, 우리는 그 동안의 모든 위로를 받을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여덟째, 우리는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2).”

이를 위하여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하고 그 걸음을 절대로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나오는 말

물론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애통을 겪기도 한다. 슬퍼하고 가슴 아파야 할 일이 많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거나 자신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거듭되는 낙심과 실망 가운데 놓일 때도 있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우리 인생에는 수두룩하다. 이에 바울은 한 가지 대안으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하고 우리가 서로 그 슬픔을 나누기를 권하였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하는 말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126:5-6).” 하시는 말씀으로 서로의 증인이 된다.

곧 우리가 내려놓고 산다는 말은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사는 것이고, 남들 다 가지고 더 누리며 사는 것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하시는 약속과 이에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하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로 살아서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결국 우리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마 5:3, 10). 그럴 수 있도록 우리는 새벽을 깨우며 주께 매일 매순간을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108: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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