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23 주일
시편 109편
주의 손이 하신 일
시 109:1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시 109:2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시 109:3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시 109:4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 109:26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시 109:27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들어가는 말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일련의 모든 상황은 우리의 교훈이다. 시인은 저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시 109:27).” 곧 우리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의 이야기가 된다. 성경의 모든 인물, 사건, 배경은 하나님을 알게 한다. 이는 주의 영광을 나타내심이다.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 우리가 알 때 들어가는 서두에서 바울의 설교와 같다. 말세의 이 모든 현상은 우리를 일깨운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 너머의 영생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실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야고보 사도의 설교처럼,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어야 한다. 다윗은 후대 모든 왕들의 기준이 되었다. 이를 바울은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다(고후 2:15).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다(고후 3:3).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냄새’가 나야 하고,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읽혀져야 한다.
모든 인생은 고달프다. 그 가운데 누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알지 못한 채,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6).” 이보다 불쌍한 생은 없다. 하나님은 저들을 ‘내버려두심’으로 온갖 더러움 가운데 살아간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8-31).”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이에 껍데기와 알곡은 가려질 것이다. 다만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하여 반드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27).” 실은 이 복음이 오늘 시편의 답이다. 즉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아울러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즉 어떤 상황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신다. 우리가 나눌 시편의 주제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곧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이를 우리로 듣고, 깨닫고, 삶으로 살게 하시는 것은 성령이시다. 그러나 다들 자기들 관심에 따라 입만 열면 말한다. 저를 알려면 저의 관심을 보면 되는데, 이는 아주 단순하게 저의 자주 쓰는 말이 어떤 내용인가, 들어보면 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구하라고 하셨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성령이 아니면 우리도 다를 것 없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쫓아 산다. 해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이는 매우 무서운 말씀이다. 스스로 믿는 자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도 많다. 저들은 훗날 억울하다는 듯 외칠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주님은 단호하셨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더는 돌이킬 수가 없는 순간이다(마 7:22, 23). 그래서 주님은 엄히 경고하시길,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스스로의 믿음을 확신해서는 안 된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이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곧 하루 일과 중에, 입을 열고 말을 할 때, 어떤 데 관심을 두고 있는지…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전 10:15).”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주를 경외함이다.
본문이해
오늘 본문은 시편을 통틀어 세 편에 담긴 저주 시다. 58, 109, 137편으로, 이 내용을 어찌 성경에 수록할 수 있었을까? 의아할 정도이다. 저주 시와 비탄 시는 비슷하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비탄은 동일하게 원수의 악을 주께 아뢰면서 주의 공의와 보응을 간구한다. 자신의 슬픔을 주께 토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주 시는 모순된 현실을 선과 악의 기준으로 토로하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의 법칙을 요구한다. 저들의 죄과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형벌이 임하도록 저주하는 것이다.
이를 쓴 시인은 다윗이다. 욥기서와 비교하면 오히려 욥의 세 친구들의 말은 모두 옳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사람 욥을 비판하고 비난하느라 면박과 반박을 서슴지 않았다. 하나님은 저들의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비판인 것을 꾸짖으셨다. 그래서 욥의 중보로 용서를 받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욥 42:7-8).” 말과 행동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 사람이다!
오늘 시편은 4연으로 구분된다. 1연(1-5)은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을 고발한다. 2연(6-20)은 악인의 악행을 묵과할 수 없어 이를 철저하게 저주하실 것을 간구한다. 3연(21-29)은 원수들에게 내리시는 저주와 대비하여 자신에게 축복을 하여주시기를 구한다. 4연(30-31)은 하나님의 공의와 보응을 확신하고 찬양한다. 곧 다윗은 저들이 악인이라 해도 저들을 향해 저주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주께 아룀으로 주 앞에 고하는 것이다.
1. 우리의 원수는 누구인가?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109:1).”
우리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다. 하나님이 잠잠하실 때 우린 피가 마르는 것 같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항해하는 중이었다. 풍랑이 일자 저들은 겁에 질려 잠드신 예수님을 깨운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 8:25).” 그러자 예수님은 ‘어이쿠, 큰일 났구나!’ 하고 덩달아 걱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26).” 곧 제자들은 무엇을 놓친 것일까?
정작 우리의 원수는 우리 안의 염려와 두려움이다. 어쩌면 현실적으로 당연한 행동인데, 예수님이 이를 ‘믿음이 작다!’ 하고 꾸짖으신 이유가 무얼까? 오늘 시편은 이를 다만 주께 아뢴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나는 또 그들의 비방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22-25).”
이와 같은 하소연을 우린 사람에게 하지 않는다. 다른 어떤 도움을 찾는데 정신이 팔리지 않는다.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왕하 18:21).” 즉 오히려 우리가 의지하던 사람에게 또는 세상 물질이나 건강이나 명예나 권세가 우리를 찌른다. 오히려 말씀은 우리의 환난이 유익하다고 하셨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결국 우리에게는 ‘요셉의 시간’과 ‘욥의 과정’이 큰 유익이 된다. 이를 바울의 설교로 들으면,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럼 이 소망은 어떤 것일까?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3-4).” 이런 공격을 당하면 저마다 살 궁리를 하기 마련인데, 분명한 사실은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이는 믿는 자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 자세이다. 왜 그런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를 성경은 누누이 경고한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서로 투자 목적으로 집을 산다. 그뿐인가?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그리고 그 많은 소유를 가지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실제 4인 가족을 중심으로 필요 이상으로 집이 크다. 너무 비싼 차를 선호한다. 명품에 눈이 돌아가고, 더 많이 소유하고자 기를 쓴다. 예수님은 분명히 천성을 향한 여정에서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10).” 하셨고, 안 그럴 경우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 10:25).” 그러니 가난하고 비루하게 살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런 것에 연연하기 시작하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온통 관심이 그것에 쏠리고, 그에 따른 염려와 근심은 끝이 없다.
결국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실제 교회 안에 주축은 부자 성도보다 가난하나 성심을 다하는 성도들로 명맥을 이어간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자기 열심과 성실을 내세우며 주를 따르고자 할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과연 저 청년은 그리 하였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1-22).” 저의 근심이 물질의 함정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입만 열면 우린 무슨 말을 주로 하나? 어딜 가거나 누굴 만나면 무엇에 먼저 관심을 갖나? 명심해야 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23).”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초대교회 때 많은 성도들이 십시일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를 팔아 교회를 우선하였다. 그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남들 이목을 의식해서인지, 그 마음에 드리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였는지, 자신들도 소유를 팔아 교회를 세우는 데 헌금하기로 했다. 한데 견물생심이라고, 마음이 달라져 거짓을 꾸몄다. 얼마를 숨기고 전부인 것처럼 하였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하는 지적과 동시에 저는 죽었다. 똑같이 저의 아내 삽비라가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7-8).” 저 역시 거짓말 하게 된다. 안타까움과 답답함으로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9).”
어찌 들으면 너무하다 싶지만, 물질에 대한 육신의 소욕은 그런 것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이쯤되면 정작 우리의 원수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2. 악이 악을 낳는 것을 그대로 두지 말라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4).”
일련의 사태는 우린 당혹스럽게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곧 거짓말이란 아주 작은 것에서 부풀려져 으레 그러려니 하고 치부하기 십상이다. 순간 이는 우리 영혼을 망상에 사로잡히게 한다. 거짓말이 사실로 둔갑하는 것이다. 이를 옳지 못하다 하면 저의 속엔 억울한 마음뿐이다. 그래서 어느새 “…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18, 20-21).”
명심해야 한다. 악이 악을 낳는 것을 그대로 두고 있으면 안 된다. 정직이 최선이란 말처럼 우린 오늘 시편과 같이 하나님께 아뢰면 된다. 그런데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렘 9:8).” 흔히 정치가나 위정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그런데 또 이런 자들이 남의 허물은 견딜 수가 없다. 요즘 시쳇말로 ‘내로남불’이란 것처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그래놓고는 스스로 악을 갚겠다고 야단이다. 그러나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이것이 우리 성도의 기본자세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이에 오늘 시편은 6-20절까지,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6).” 하고 하나님이 갚아주시기를 간구한다. 곧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시 28:4).” 우리는 우리가 저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그러자면 덩달아 화가 올라오고 더 큰 미움과 저주로 상대를 공격하게 되는데,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66:18).” 이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게 두어서는 안 된다. 곧 악은 저기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속에 있다. 자칫 내가 나서서 응징하려 하면,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 1:15).” 그러니 가장 무서운 것은,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그러므로 악이 악을 낳는 것을 경계하고 중단해야 한다.
나오는 말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21).”
우리 의로, 우리의 수고나 공로로 주 앞에 서는 것이 아니다. 우린 다만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선다. 그리고 구한다. ‘나를 건지소서.’ 이는 때로 더디고 미련하게 여겨진다. 하여 바울은 힘주어 설교하기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얼마나 든든한가?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쉽게 알 수 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사 48:9).” 그렇게 우리도 용서하심을 받았고, 구원에 이른 것이다.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렘 14:21).” 이것이 우리가 쓸 수 있는 최상의 무기, 기도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30-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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