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전봉석 2022. 10. 11. 04:54

 


레위 사람들과 모든 유다 사람들이 제사장 여호야다가 명령한 모든 것을 준행하여 각기 수하에 안식일에 당번인 자와 안식일에 비번인 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이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비번인 자들을 보내지 아니함이더라
대하 23:8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시 105:1


남유다 8대 왕 요아스(B. C. 835-796년)의 통치를 다루고 있다. 요아스 옹립을 위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혁명세력 규합과 즉위식 거행에 따른 저의 통솔을 기록하였다. 아달랴 7년에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폐하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웠다(1-2). 배부장과 언약을 맺고 그 세력을 규합한다. 요아스와 언약을 세워 그의 즉위의 정당성을 천명한다(3-7). 여호야다가 나서 요아스의 즉위식을 준비하고 거행한다(8-11).

저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윗 왕가의 왕권을 회복한다. 그 신앙은 여호함으로부터 아하시야와 아달랴를 거치며 만연한 우상을 타파하고 바알숭배를 척결함으로 신정국가로의 면모를 바로 세운다. 또한 구속사적인 면에서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오실, 다윗 언약과 영원한 하나님의 구속에 따른 섭리 가운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요아스의 반정세력이 다윗 왕권의 왕 노릇 한 아달랴를 처형한다(12-15).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주도하에 그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바로 하고 바알과 우상을 척결한다. 성전제도를 회복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한다(16-19). 성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는 요아스가 보좌에 앉음으로 왕권을 회복하고 반정에 성공한다(20-21).

본문을 읽으며 이는 인간의 역사인 것 같으나 하나님의 섭리란 사실을 알게 된다. 곧 저의 섭리는 그의 영광이시다. 이를 가로채거나 자신의 영광으로 바꾸려할 때,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곧 우리가 사는 우리의 이야기는 결코 우리의 현실로 그치는 이야기가 될 수 없음을 생각한다. 이를 깨달았던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범사에 우리가 하는 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한다는 것,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말씀은 우리로 주의 자녀의 길을 갈 때 실패를 방지하는 장치다. 곧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안다는 일은 성경으로의 것이다. 이를 읽고 이해하고 적용하며 사는 데 따른 역사는 주의 영이 행하신다. 예수님은 앞서 밝히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곧 저도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이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 곧 자신이 전하시는 주의 말씀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분명히 하시고, 이는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

곧 우리가 말씀을 읽고 나누고 증거하는 데 있어, 이 일은 성도로 사는 자의 기본이겠으나 오늘 시편의 첫 머리에서 밝히듯,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105:1).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신앙의 계승이겠다. 이를 위하여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곧 오늘 본문도 요아스를 왕위에 옹립하는 데 있어 대제사장 여호사밧은 그 말씀을 준행하였고, 성전 안에서 이 모든 일을 준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저의 기초는 언약이다. 곧 말씀으로 기준하여 주의 일을 준행하였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 29:9).” 이는 우리 신앙의 초석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어느 때든지 인류의 모든 시작과 끝이다. 곧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9-10).”

이로써 하나님은 영원한 나라의 상급을 채우신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이에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하여 시인은,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시 37:35-36).

분명히 성경은 밝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만한 영이 있음을 인정하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보고 듣고 느낌으로 알 수 있는 앎인데,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그러한 덴 분병한 원인이 있었다. 첫째, 스스로의 지혜를 선호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22).” 그래도 될 줄 아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과 바꾼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 그것으로 우린 우울하고 좌절하고 또한 악의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가장 큰 부정은 하나님의 성육신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저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과 같이 살다 사람을 대신하여 그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한데 성경은 분명히 일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곧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자연을 통해 그의 놀라우신 창조와 함께 자연의 순응과 저들만의 방식으로 하늘을 우러러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고 자연이 하나님이거나 범신론적인 의미의 시선으로가 아니다. 다른 하나는 성육신으로 역사 속에 사람으로 오셔서 그의 살아계심을 가감 없이 보이시고, 행하시고, 이루신 구원의 여정으로다. 하루는 빌립이 바랐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14:9).” 그러자 예수님은 다소 답답하신 마음으로 이르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

당시 유대인이나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이성으로 이를 볼 수 없었다. 하나 빌립은 늘 예수님 곁에서 예수와 함께 생활하였던 자이다. 그런 저에게 일러 ‘나를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이르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곧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21).”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말씀이 있다. 성경을 보고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더 무엇으로 하나님을 보일 수 있겠나?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하나 더 언급하자면 하나님을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행실로서다.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로 비유하신 것은 그 열매로 그러하듯 삶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에서 우리 삶이 곧 하나님을 보여준다. 이는 결코 완전한 자로서의 흠과 티도 없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늘 치열한 어떤-주를 바라는 마음의 주도하에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이를 대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누구와 대화하거나 저를 위해 기도할 때 주의 마음이기를 갈망한다. 이는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105:2).

하시는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따른다. 곧 하나님이 유익을 구하는 것, 그리하여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71).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이나 문제를 감내하면서도 주를 사랑한다. 곧 주신 삶의 채신머리없이 굴지 않는다. 채신은 처신을 뜻한다. 흔히 처신이라 하는데, 처신을 속되게 이를 때 채신이라 한다. 채신없이 굴지 않는다 함은 말이나 행동이 경솔하지 않고 위엄이나 신망을 지키지 못하는 것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하면서 채신없다 하면 이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처럼 굴며 사는 것이다. 누구에게 주일에 오라 하였더니 저는 요즘 주식을 배우고 있고, 이것이 주말에 짜여 있다고 했다. 누구는 사업상 접대의 하나로 골프를 치거나 어떤 교류에 빠질 수 없어 교회를 잠시(?) 쉰다고 했다.

이를 두고 뭐라 한들, 저들이 듣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채신없이 사는 것이다. 안 믿는 이와 같이 하고, 저들과 있어도 한 마디 주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말하지 못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저들로서는 그러한 나의 우려를 쓸데없는 걱정으로 돌린다. 이는 목회자로 가다 멈추거나 돌아간 자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수천 개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다. 듣다보면 뭐라 한들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입을 다문다. 왜냐하면 저들도 안다!

오늘 시편은 하나님의 기이한 일, 저의 역사를 열거하고 있다. 앞서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3-4).


우리가 먼저 구할 게 무엇인지를 알린다. 그런 뒤 이어지는 역사적인 사실 끝에 메시아의 표징이 되는 요셉을 언급한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17-19).

말씀이 응할 때까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곧 욥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어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곧 오늘의 이 길이 때론 답답하고 한심하고 그 이상으로 의기소침하여 사람을 쓰러지고 넘어지게 한다 해도,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부쩍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의 소식을 듣는다. 한참 열심히 살던 아이는 도로 집 안에 처박혔다. 더는 정신과 약도 먹지 않고 하는 일도 없이 무료하게 지낸다고 했다. 또 누구는 좀 나았다고 하여 안심하고 있었는데 대학도 결국 휴학하고 힘겹게(?) 도전하던 아르바이트도 그만둔 지 오래 되었다고 했다. 저들 등짐을 부모가 대신 머리에 이고 가느라 등골이 휜다. 누구는 말하다 딸애의 일로 더는 잇지 못하고 한참을 운다. 저들에게 무슨 말을 해준들… 공통적으로 저들의 특징은 들을 수 있는 귀를 잃었다. 보려는 눈이 없다. 알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그냥, 산다.

단언하건대 말씀이 없는 삶은 푯대 없는 광야를 떠도는 것과 같다. 나름은 걷다 걷다가 지친다. 저긴가 하고 갔다가 신기루에 실망하고 도로 주저앉기 일쑤다. 그러니 나는 그저 안타까운 심정일 뿐 나의 기도는 ‘어떤 접촉점’을 주가 허락하시면 모를까, 내가 나서 말할 것이 없어 입을 다문다. 그렇게 윌리엄 쿠퍼는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며 말씀을 붙들고 찬송을 지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 하고서 보혈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죄 속함 받은 백성은 영생을 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 없이 크도다

한 없이 크도다 한 없이 크도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 없이 크도다

 

날 정케 하신 피 보니 그 사랑 한없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 하겠네

늘 찬송 하겠네 늘 찬송 하겠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 하겠네

 

이 후에 천국 올라가 더 좋은 노래로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 하겠네

늘 찬송 하겠네 늘 찬송 하겠네

날 구속 하신 은혜를 늘 찬송 하겠네

아멘

(새찬송가 258장)

 


저는 1731년 11월 26일 영국 허트포드셔에서 출생했다.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는 인정받는 변호사가 되어 영국 의사당 앞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승승장구하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다 스물셋에 그는 영국 의사당 앞에서 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많은 긴장감으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입고 쓰러졌다. 이후 저의 출세가도는 끝이 났다.

 

저는 심한 우울증과 함께 정신착란 증세를 보여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급기야 자신의 그런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모습을 자학하며 자살을 기도하였다. 한 번은 아편을 사들고 템스강에 투신하려 하였다. 마차를 몰고 가는 순간 안개가 너무 짙어 길을 해매다 템스강 앞이라 생각하고 내려 보니 자기 집 대문 앞이었다.

 

다음 날 아침 칼을 찾아 자신을 찌르려 하는데 칼날이 부러져 상처만 입고 죽지는 못하였다. 다시 목을 매었는데 의식불명이 된 채 줄이 끊어져 다시 깨어났다. 저는 서른세 살에 18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저는 묶여 책상 위에 놓인 성경을 읽었다. 그때 로마서 3장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시는 말씀 앞에서 무너졌다.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확신하게 되었다. 믿음을 가지고 건강을 회복하였다가 여러 번 다시 우울증에 시달리며 그때마다 말씀을 붙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없다고 여기며 자살하려 했던 그가 죽음의 쇠사슬에 묶여 ‘주님의 보혈’을 묵상하며 지은 찬송 가사로 수십 편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샘물과 같은 보혈로>가 지어졌다.

 


이 외에도 얼마나 많은 역경 속의 주의 영웅들이 계신가. 인디언 선교지에서 채 5년의 사역을 감당하다 폐렴에 걸려 죽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1725년부터 1807년까지 살면서 노예무역선 선장으로 살았던 존 뉴턴이 목사가 된 후 지은 찬송,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 복음주의 영국 국교회 목사로 진리만을 설교한다는 이유로 12년 동안 교인들이 예배를 거부하는 가운데 묵묵히 54년을 목회에 전념하였던 찰스 시미언. 1807년부터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대한 반대 법안을 놓고 30년간 국회에서 싸웠고, 결국 노예제도를 불법으로 선언하기까지 또 26년을 싸웠던 윌리엄 윌버포스 등등…<영적거장들 시리즈>, 부흥과 개혁사, 참고.

나는 누구의 ‘아픈 소식’을 들으면 저의 영적인 상태를 두고 주를 생각한다.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고 행복의 극단적인 선택인 자살에까지 이른다. 더는 자신이 불행하길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우리는 때로 원치 않는 길을 간다. 주의 뜻이면 사명자로 한 발 한 발을 내딛는다.

마침내 그들을 인도하여
은 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의 지파 중에 비틀거리는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105:37).

출애굽의 결국은 우리가 이 땅을 등질 때의 역사와 같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반드시 응하리라.’ 하시는 데서 나는 말씀을 움켜쥔다. 결코 놓을 수 없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이에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39-42).

주가 오늘도 돌보신다는 데서 안도한다. 그리고 내가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누구와 누구를 위해 주께 빈다. 저들로 집을 나오지 못하게 하는 세상 권세 잡은 자를 주가 물리쳐주시기를. 그러하면

그의 백성이 즐겁게 나오게 하시며
그의 택한 자는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며
민족들이 수고한 것을 소유로 가지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43-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