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대하 24:17-18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시 106:47
요아스가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저에게는 주의 선지자 여호야다가 있었다. 여호야다의 지도력으로 요아스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 기물을 새로 마련하였다. 이 일에 온 유다와 백성들이 합력하였다. 여호야다가 130세를 일기로 죽자 요아스가 방백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버렸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이를 알게 하자 저를 뜰에서 돌로 쳐 죽였다. 이에 에돔이 쳐들어와 저들의 모든 방백들을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일련의 모든 과정을 읽고, 이어서 읽은 시편의 다음 구절이 목에 걸린 듯 아렸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106:14-15).
어느 것을 더 귀히 여기며 살고 있을까? 누가 이런저런 사연의 기도제목과 함께 현재 당면한 문제를 문자로 보내왔다. 누구는 신랑이 병들어 저를 간호하느라 기진하였다. 이와 같은 모든 상황에 대하여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남유다 8대 왕 요아스(B. C. 835-796년)의 사적이 우리의 삶을 그대로 옮긴듯하다. 저의 곁에 항상 같이 하던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죽음이 저로 한순간 그렇게 돌아서게 할 수 있을까? 40년의 통치 생활 동안 주를 향한 마음과 그 성전 건축과 함께 주가 보이신 놀라운 행적이 정녕 저의 삶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까? 저의 결국이 너무 초라하여 서글프다. “요아스가 크게 부상하매 적군이 그를 버리고 간 후에 그의 신하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말미암아 반역하여 그를 그의 침상에서 쳐죽인지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왕들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대하 24:25).” 왕들의 묘실에도 들이지 않은 저의 시신이 그 결국의 허무함을 대변하는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한순간이라도 살 수 있을까? 오늘은 말씀을 묵상하면서 여러 생각이 난입하듯 생각이 어지러웠다. 누구 이야기와 누구의 사연이 덩달아서 마음에 걸렸고, 다 저녁에 받은 문자에는 아직 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땅에서 우리의 가장 큰 오해는 우리가 이를 얻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한데 성경은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이를 바울의 신앙고백으로 다시 듣는다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하던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과연 우리는 어떠한지. 오늘은 좀 안녕하신지? 하여 하나님을 등한히 여기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다 닥친 어떤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먼저 주의 이름을 부르며 회개를 하는지? 누구에게 대놓고 그리 권면할 수 없어 말을 주춤거리는 사이에 ‘곧 낫겠죠, 뭐!’ 하는 저의 다음 말에 입을 다물었다. 주어진 현실의 애통함은 기회다. 그 어려움은 주의 사랑이다. 돌이켜 주가 바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다. 한데 우린 당장 병 낫기만을 바라고, 어떤 꼬인 문제가 잘 해결되기만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니… 나로서는 답이 없다. 말씀을 따라 삼가는 수밖에 없는 것인데,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119:9).
그러므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돌이켜 말씀 앞에 자신을 세워 회개하고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야 할 일인데, 과연 이와 같은 말이 오늘의 <문제와 고통> 가운데서 귀에 들어오기나 할까?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119:33).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는 것을 어찌 말로다 저에게 전달하기 어려워 나는 주저하다 주의 이름만 되뇌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악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지,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2).” 이를 다시 바울의 설교에서 찾아보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13).”
오늘 우리에게 미친 모든 고통과 슬픔의 이유와 목적은 하나다. 죄를 알게 하고 주를 찾게 하는 것이다. 안 믿는 자들이야 주를 마음에 두고 살지 않으니 뭐라 한들 낫고,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겠지만 우린 좀 다르지 않을까? 나는 무슨 말을 어찌 해주어야 하는지, 그저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어지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겔 33:6).” 나는 어제 문득 이와 같은 말씀이 두렵게 다가왔다.
직설적으로도 완곡어법으로도 말하기 어려운 문제를 왜 내게 두시는 것일까? 저는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들 말만 하거나 뭐라 이르면 그건 이미 다 알고 있는 말로 듣고 마는 것이 고작인데… 우선은 저를 보고 나를 보며 나를 먼저 주 앞에 바로 세우는 게 중요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저들이 오히려 나의 스승이고 거울과 같다. 나를 비춰보게 하고 해주고 싶은 말을 나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성전을 보수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요아스가 하루아침에 방백들의 말을 따라갔다. 저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선지자를 돌로 쳐 죽이게까지 하였다. 수십 년의 주를 따름이 일순간에도 저처럼 무너질 수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두고 항상 마음이 그리 눌렸던 것일까?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하여 우리는 주 앞에 서면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30).”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오늘 하루 이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 또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여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예수님의 설교에서 다시 들으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단순히 오늘의 문제와 고통이 대수이겠나? 그 너머 주가 맡기신 것,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언젠가 그리 배척하던 이 좁은 문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허다하게 될 것이다. 한데 구하여도 못할 자가 너무 많다.
누가 일주일에 한 번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지나가는 말이었는지 더는 아무런 소식도 없다. 나는 혹시 몰라 여러 주제 가운데 하나, 성경 어느 부분으로 주께서 새로운 것을 보이시려는가 기대하다가 기다림에 지쳤다. 서로가 차려야 할 격식이 많은가? 아니면 그 시간을 내기란 여러 시간들 가운데 하나라 자꾸 뒤로 밀리는 까닭인가?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다만 어제는 누구를 생각하다 주께서 에베소교회에 경고하시는 말씀이 목에 걸린듯 따가웠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누구를 주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이를 대한다는 일은 참으로 여러 생각이 들락거리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혹시 몰라 설교원고를 앞서 서둘러 정리하며 초안을 작성했다. 언제 연락이 올까, 하고 핸드폰 진동을 소리로 전환하여 두었다. 그러다 문득 바울의 진솔한 고민을 생각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결국 이와 같은 마음 씀이 주의 마음이시겠다는 생각과 함께.
오늘 시편과 같이 선민의 역사를 회고하는 일에서 주의 행적을 살핀다. 그럼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사람의 어쩔 수 없음인듯하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감사와 할렐루야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106:1-2).
어제는 동생이 무슨 배달운송 자격증을 땄다고 하였다. 사역자로 일생을 다하다 한국에 돌아와 마지막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데 있어 가장 현실적인 택배 일을 우선하면서 교회를 준비하려는 모양이었다. 마치 바울이 천막 짓는 일로 자신의 생계를 성도들에게 지우려 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어려워 속상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누가 주의 사역을 감당하려 하겠나? 나의 딸애는 주의 사역자 사모로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공헌하였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속상하였다. 어쩜 이 길은 이처럼 좁고 협착한 것일까? 다들 교회나 목사 하면 뭔가 먹고 살만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33:1).
말씀 앞에서 주저하는 마음을 나는 숨길 수 없다. 아,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오늘을 살며 우리로 주 앞에 엎드리게 하는 것은 가난이고 궁핍이며 질병이고 고초다. 아무에게도 쉬 말하기 어려운 일들을 누가 기도부탁과 함께 보내올 때 나는 나의 자리가 어디인지, 정신이 번쩍 들고는 한다. 저런 말을… 하기까지 그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생각하다보면 마음부터 아프고 어려운데… 아프지 않은 것이 어찌 사랑이겠나? 누구로 인해 마음 쓰이고 신경 쓰여 내가 더 죽을 지경일 때 나는 종종 혼잣말처럼 ‘잘 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고 되묻는다.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3-5).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이 더하시는 이와 같은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이 일을 감당하며 살 수 있을까?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19-21).”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란 때로 이처럼 ‘받아둔 자’의 기도와 눈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주님도 날 위해 오늘도 하늘 우편보좌에서 기도하시고, 성령도 날 위해 간구하시는 일이어서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하면,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116:2).
그러나 우리가 사는 동안 마치 이스라엘의 광야와 다를 게 없어서,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106:14-15).
곧 오늘 우리의 기도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정작 고통까지도 허락하신 이가 그와 같은 기도를 바라시는 것일까? 낫고자 하고 나아지만을 기대하며 드리는 기도는 안 믿는 자들의 소원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이를 먼저 아는 것이 주의 은혜일 텐데.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43-46).
우리는 결국 어쩔 수 없는 존재라 개나 돼지와 다를 게 없어서 토한 것을 도로 먹고 싼 것에 다시 가서 눕는 경우라. 죄란 참 익숙하고 편안한 안락의자만 같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내가 그러하다. 그러하여서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사 28:8).” 그러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누구를 뭐라 할 게 아니라, 그게 다 나였다. 나는 내가 항상 두렵다. 그러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47).
마치 늘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 20:4)”,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오늘도 여전한 것은 아닐까? 하고서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그럴 수 있기까지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이 우리로 주 앞에 바로 세워갈 것임을 믿으며.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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