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전봉석 2022. 10. 13. 05:2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시니 그가 이르되 저 백성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하며

대하 25:15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107:19-20

 

 

남유다 왕조 20대의 왕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 9대 왕 아마샤(B. C. 796-767년)는 29년을 다스렸다.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이 온전하지는 않았다. 저는 왕권이 안정되자 부왕 요아스를 시해한 자들을 처단하나 그 자식들은 율법에 따라 살려둔다. 여호람 때에 유다로부터 독립한 에돔을 정벌하려 30만을 소집한다. 이는 아사 왕 때 58만(14:8)과 여호사밧 때 116만(17:14-19)에 비해 적은 숫자이다. 그래서 아마샤는 북이스라엘에서 은 100달란트를 주고 용병 10만을 고용한다.

 

응당 이 일은 여호와를 의지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이를 책망한다. 이에 아마샤는 저들을 돌려보낸다. 결국 하나님을 의뢰하여 소금 산에서 세일 자손을 죽였다. 그런데 돌려보낸 용병으로 인해 북이스라엘이 격동하여 유다 사람 3천명을 죽이고 약탈한다. 이후 남북전쟁의 빌미가 된다. “아마샤가 자기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돌려보낸 군사들이 사마리아에서부터 벧호론까지 유다 성읍들을 약탈하고 사람 삼천 명을 죽이고 물건을 많이 노략하였더라(13).”

 

우선 여기서 볼 것은 온전히 주를 섬기지 못할 때의 애매한 결과다. ‘전심으로’ 혹은 ‘온전히’는 우리가 주를 바랄 때 필요로 하는 마음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한데 이 마음이 온전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어려울 때는 오히려 주를 온전히 바라고 전심으로 주를 의뢰하는데, 이게 어느 정도 적당하다 싶게 되면 마음은 어찌 저 혼자 소요를 일으키는지 모르겠다. 하여 성경은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이를 우리 신앙에서 가장 확실하게 진단할 수 있는 것이 주께 드리는 헌물로 보면 안다. 막상 적고 부족할 때는 오히려 온전하게 드리랴 애쓰던 마음이 수입이 늘고 그 부분이 차고 넘치게 되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교회는 이를 온전히 가르치기 껄끄러워하고 성도는 이 부분을 지적하는 데 바른 마음으로 받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하여 오늘 시편의 말씀이 매우 함축적이며 분명하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107:19-20).

 

말씀을 보내신다는 것, 곧 주의 영, 성령을 구하라 하심은 이 때문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하면 성령은 어떻게 임하실까? 또한 우린 성령을 받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왜 자꾸 성령을 구하고, 믿음을 바라고,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는 것일까?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나 생명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이 아닌 것과 같다. 저는 매일 매순간 돌봄을 받아야 하고, 그 몸과 인격은 자라고 성장하여 성숙해져야 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생명이 있다는 것은 바동거리며 배고픔을 채우고 즐거움을 익히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꾸짖으실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 8:26).” 하시면서 그 믿음이 아직도 작은 것을 두고 나무라셨다. 곧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에 자주 세상 것으로 위로함을 얻으려고 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8).”

 

곧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나 성령을 구할 때 그 받을 수 있는 길은 분명하다. 구하기만 하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첫째, 말씀으로 받을 수 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른 말씀, 이 성경의 모든 인물과 사실과 사건과 역사 속의 이야기는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나타낸다. 그러며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 4:16).” 즉 성경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읽고 또 묵상함을 성령이 그 길을 통해 임하신다. 오늘 시인도 상하고 고난 중에 있을 때에 말씀을 보내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먼저는 읽고 좀 들어야 한다. 듣고 좀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이에 우리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그러하여 감사하고 찬양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8).” 이는 모두 하나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둘째,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들은 것으로, 우리는 구해야 한다. 구함으로 성령이 오신다. 구함으로 우리는 성령을 받을 수 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 3:5).” 구한다는 것은 행함이고, 그에 따른 행위다. 듣고 믿어 마음으로만 아는 것은 전부가 아니다. 삶으로의 행함이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오죽하면 행함이 없다는 것은 죽었다고 단언하였을까? 그 믿음이 말이다. 곧 우리가 믿고 구한다는 것은 그에 따른 행동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다.

 

셋째, 이 행동은 자신의 의욕적인 열심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붙드는 것이다. 아이의 행동이 무모한 것은 의욕만 앞서기 때문이다. 이에 바른 교육이 필요하다. 하루는 유다가 물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2, 23).” 곧 우리의 불순종을 앞서 경고하시며 오늘도 이르시는 말씀이다. 친밀함은 결국 순종함으로 나타난다.

 

넷째, 이에 우린 갈망한다.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를 갈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님은 이를 목마름으로 비유하셨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이는 참 오래 묵상하게 하신다. 때는 왜 하필 명절 끝날 곧 큰 날이다. 하면 그렇게 모자람을 느낄 때가 아니다. 당연히 별로 목마를 리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말이 있듯이 아쉬울 게 없다고 여겨질 때가 아닌가? 한데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38).” 하고 다소 의외의 설명을 더하셨다. 왜 하필 그때냐 하면 믿음으로 이를 행하는 것으로, 결국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하신다.

 

근데 또 왜 하필 배라고 하시는 것일까? 입으로 말이 나오듯이 혹은 발로 어디를 가듯이 아니면 아니면 손으로 무슨 일을 하듯이 그리 말씀하시지 않고 하필, 배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부정적인 표현이다.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26:22).” 그래서 뒷담화가 별난 맛을 낸다. 또는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 한데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은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9).” 곧 성령이 우리 배의 부정적인 것을 비우게 하시고 이에 대신 그 자리를 채우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구하고 그 성령이 오시는 길은 말씀으로, 우리가 이를 읽고 묵상할 때이다. 믿음으로 이를 구할 때이다. 순종함으로 붙들어 행할 때이다. 받으면 받을수록 구하게 되는 갈망하는 것으로 이에 우리로 사모하게 하는 것이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별로 그 영혼에 성령에 대해 목마름이 없다면 이는 분명한 위험신호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고 주의 자녀로 산다는 일은 저를 갈망하는 정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 아마샤의 적당하였던 저의 온전함이 오히려 독이 되는 과정을 보았다. 우리의 갈망에는 ‘이제 됐다’ 싶은 적당함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42:1-2).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63:1-2).

 

이에 오늘 시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107:1-2a).

 

곧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주께 감사함은 저의 속량하심을 받은 자로서 이와 같이 감사하기 때문이었다.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스 3:11a).” 곧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이러한 체험이 매일 매순간 우리 영혼을 채우실 수 있어야 한다. 곧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이란 우리가 이를 구하고 바라며 말씀으로 가까이, 믿음으로 순종하며 갈망할 때이다.

 

앞서도 살펴 묵상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성령 충만으로 산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치고 말씀 앞에 순전하고 온전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 입이 하는 말을 마음이나 몸이 거스르기 때문이다. 하여 성령이 내가 지금 귀하게 여기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자녀나 가족이나 돈이나 주식이나 이상이나 그 이상의 추구하는 모든 즐거움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 이를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였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9-13).”

 

오늘 시인은,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2b-3).

 

나는 저 동서남북 각 지방을 좀 더 확대하여 사람마다 가지고 사는 그 모든 자유의지까지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저의 환경이 어떠하든, 성격이나 그 과거가 또한 어떠하든지, 이는 우리가 한 일이 아니다. 저가 모으셨다!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4:23).” 곧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그러니 교회 안에 오만 가지 사람들이 다 모여서 다들 저 잘난 맛에 시비하고 동조하고 다투고 싸우고 하다,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융화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또 영구적인 것은 아니어서 기분에 따라, 언제 어떻게 또 둔갑을 할지 알 수 없는 게 각자의 모양이고 보면, 그때마다 성령이 필요하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롭게 또 절실하다. 이에 성령이 임하시면 달라지는 것들을 찾아보았다.

 

첫째, 서로가 진리를 알게 하신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6).”,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3).”

 

둘째, 우리로 그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셋째, 우리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 즉 성령으로 봉사하게 하신다.

 

넷째, 우리 안에 계심을 확증한다. 이는 오래 좀 묵상할 부분인데 우선은 수치스럽게 안고 살던 어떤 기억, 죄의 실상이 그렇게 붙들고 씨름할 정도로 가치 있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다. 또한 지금 성령과의 단 몇 분의 시간이 앞으로 수십 년의 세월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는 사실에 그 영광을 맛을 잃지 않으려 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곧 우리로 진리를 날마다 경험하게 한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5:10-11).”

 

다섯째, 우리는 더이상 의심으로 갈등하지 않게 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5-17).”

 

여섯째, 서로가 시험당할 때 오히려 그 어려움을 두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바라고, 고백(간증)하게 하신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 13:11).”

 

일곱째, 우리는 한 예수를 믿음으로 동시에 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2-13).”

 

어제 낮에 묵상하며 정리하였던 말씀과 오늘 아침에 새로 읽고 묵상하게 된 말씀이 중첩되어 마주하는 게 신기하다. 글로 묵상을 쓴다는 것은 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서 지금 한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내게 연락하여 기도부탁을 하거나 여전히 마음에 두고 살게 하신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정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아침, 나를 두고 새롭게 성령을 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글을 쓰다 여러 번 멈추어 숨을 고르듯 입을 오물거렸다. 주님, 하고 부르며 이에 오늘 시편을 다시 읽었다. 전 주일의 설교 내용이 떠올랐다. 중복되는 마음이 있어 여러 부분을 다시 읽으며, 마무리한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107: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