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전봉석 2022. 11. 14. 04:26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느헤미야 11:1-2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1, 26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주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어 예루살렘에 이주하는 백성과 그 분산을 나눈다. 백성들의 지도자 중에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예루살렘 성에(3-24) 그 외 백성들은 각지로 분산한다(25-36). 유다 지파 자손은 브엘셀바 힌놈의 골짜기에 흩어져 살았다. 그 가운데 레위 반열에 오른 일부는 베냐민의 성읍에서 거주한다.

 

당시 예루살렘은 재건되었지만 그곳에 거주하려는 자들은 적었다. 이에 이주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7:4).”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주 정책을 위해 1차 귀환자들의 명단을 분류하였다(7:5-73). 오늘 본문에 보면 앞서 그 지도자들이 먼저 그와 같은 시행에 솔선수범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11:1-2).”

 

바벨론 침공 당시 여느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극심한 공격을 받았던 곳이 예루살렘이었다. 저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고 하여 가급적 멀리 떨어져 생활하기를 바랐다. 곧 지도자들이 앞장서 예루살렘에 머물기로 한 것은 특권의식으로가 아니라 모두가 꺼리는 일에 앞장섰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신약의 여러 부분에서 이를 강조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하는 격려와 충고가 이어진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그런 거 보면 앞장서 남을 이끈다는 위치는 희생과 순종이 따라야 한다. 본문에서도 결국은 지도자들 외에 서로 제비뽑아 하나님의 뜻을 따랐음을 보여준다. 이 일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다는 의미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곧 우리의 순종은 그 어떤 헌신이나 제사보다 낫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모두가 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대수는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러므로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5-16).” 이는 상대적이어서 주의 뜻을 따르는 것과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허탄한 일에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비등하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암시하는 바는 하나님의 전을 가까이 하여 사는 것이 복되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으로 불린다.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끌려가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그 강가에서 울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137:1).

 

곧 우리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거룩한 삶의 표징이다. 성전이 중심이 되는 삶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의미한다. 오늘 날 교회를 가까이 하고 늘 교회 곁에 사는 것으로 우리의 복됨을 가늠할 수 있다. 이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우리 영혼이 쇠약해지고 신앙에 침체가 찾아오는 이유는 하나다. 그 마음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의 무게와 같다. 곧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84:2, 10-11).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23:6)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이와 같은 바람은 찬송이고 소망이며 우리의 결의고 목적이다. 여러 이유와 어쩔 수 없음을 들어 교회를 멀리하고 그 일에 참여하는 일을 소홀히 할 때 우리 영혼은 침체기가 분명하다. 또한 작은 교회의 소상히 서로가 아는 교제보다 친절한 타인으로 지내기를 바라는 현대인들의 개인적인 사고로 비춰 큰 교회를 선호하는 데 있어서도 한 번쯤 진지하게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어릴 때 아버지의 뒤늦은 신학과 어려운 처지에서 늘 교회를 지키며 같이 하는 한두 가정이 있었다. 심지어 어디로 가든 그 근처로 이사하고 늘 교회에서 어머니와 함께 제단을 지키며 기도하던 분들도 있었다. 곧 우리가 교회를 바란다는 것은 그만큼의 자기희생이 따른다.

 

성경은 이를 귀히 여기며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할 때에 ‘예루살렘의 영광’은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계 7:11-12).” 즉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19:7-8).” 이 일은 영광되고 복되다.

 

일요일의 신자들이 허다하고 저마다의 삶이 우선인 때에 교회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자는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2).” 이 놀라운 복의 복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의 기억을 막연하게 더듬으면 어머니는 대부분은 교회에서 주무셨고, 일을 마치고 몇몇 집사님들도 교회로 발길을 하여 장의자에 모로 누워 새우잠을 자며 기도하기에 힘썼다. 우리가 주를 따른다는 일은 그만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러므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하다못해 이 땅에서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도 이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하물며 영원한 삶을 위하여 우린 과연 무얼 예비하며 살고 있는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그런 점에서 나는 요즘 이른 새벽에 눈을 뜨면 서둘러 성전으로 나아오는 이 시간이 참 좋다. 고요한 가운데 말씀을 따라가고, 이를 묵상하며 글로 쓸 수 있는 서너 시간의 조용함이 보배 같다. 이를 가지고 남은 하루를 산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가만히 주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것. 말씀을 읽고 턱을 괴고 앉아 주가 주시는 생각으로 이끌리는 것. 이를 글로 표현하며 생각을 더듬고 주신 마음을 다잡는 일은 어찌 말로다 설명하기가 어려운 평안이 있다. 이것으로 한 날의 시간과 매순간의 여러 시험을 참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은 복이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주를 가장 가까이서 함께 하며 마주할 수 있는 곳은 성전이다. 그런 거 보면 나로 돌이켜 주 앞에 다시 세우실 때,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렇게 새벽예배를 나갔다. 우리 동네에서 차로 15분은 가야 하는 연수동을 매일 새벽에 달려가서 그렇게도 울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의 그런 모습이 참 낯설기만 하였는데, 그렇게 1년 넘게 대비하게 하시더니 기어이 신대원으로 부르시고, 그 혹한 3년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던가보다.

 

그때 기억은 그냥 그렇게 울었다. 주님, 하고 부르면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는 게 내 자신도 차마 뭐라 용서를 구할 수조차 없는 부끄러움과 죄인 됨을 인정하게 하시면서 이렇듯 새벽을 깨울 수 있게 하신 모양이다. 뭐라 고할 말도 없는 눈물은 서러움도 송구함도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감사함도 아니다. 그때는 정말 불가항력적이었다는 표현이 걸맞다. 왜 내가 이른 새벽이면 죽기 살기로 새벽예배를 갔는지, 심지어 주일 지나고 월요일에는 목사님이 쉬시는 날인데도 몇몇 나이 든 권사님들 사이에서 혼자 흐느껴 울다 오곤 하였다. 어쩌면 그 뒤로 난 눈물이 친숙해졌나보다. 지금도 주님, 하고 부르면 눈물이 핑, 돌면서 감사인지 회개인지 알 수 없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다. 어쩌면 바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모두가 꺼려하고 멀찍이 거리를 두고 살기를 원하는 예루살렘에 지도자들이 앞서 터전을 잡았다. 오늘 본문 서두의 내용과 그 정황을 생각하며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교회를 가까이 하며 그 삶을 교회 중심으로 놓고 사는 이들을 주가 사용하신다. 그렇게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어느 훗날 앞서간 이들과 함께 주 앞에 섰을 때 주가 내 이름을 부르시며 모두 앞에서 나를 인정하고 시인하실 것을 상상만 해도 감격스럽다. 부디 나의 남은 생이 온전히 주 앞에 머물기만을…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이를 그대로 오늘 시편으로 다시 음미하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1, 26).

 

감사도 능력이라, 아무나의 것일 수 없다. 감사는 신앙의 뿌리와 같아서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95:2).

 

할 때에 함께 할 수 있는 자들은 적다. 저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8-20).” 다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어쩔 수 없는 환경을 호소하며 교회를, 주를 뒤로 미루며 산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저마다의 그럴 수밖에 없는 생활을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24).” 이와 같은 말씀이 나는 두렵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17:32).” 이와 같은 경고는 최종적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하여 가까운 훗날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요 7:34).” 나름 잘 믿고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고 살았는데,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오싹한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다소 문제가 있다. 바울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스스로를 돌아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오늘 나의 감사는 나의 신앙의 뿌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그러할 때에 찬송과 감사는 함께 이어진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57:10-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03:11).

 

이와 같은 뿌리에까지 닿는 영양분은 우리의 놀라운 체험으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곧 오늘의 나를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 하는 것에서도…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4).

 

곧,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89:5).

 

돌아보면 은혜 아닌 것이 없다. 왜 나 같은 자를 이처럼 사랑하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마치,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16).

 

때론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여기가 광야인가 할 때에도 어김없이 주가 먹이시고 입히시며 이른 비와 늦은 비로 함께 하셨으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이를 알지 못할까 하여 날마다 눈을 뜨기 무섭게 주 앞에 앉힌다. 내가 나를 아는데…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

 

모두가 나를 멀리하고 꺼려할 때도 주는 항상 내 편이셨다. 이는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시 49:14-15).” 심지어 내가 주를 부인하고 멀리하고 죄에 빠져 지낼 때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이는,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4-25).

 

그리하여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신 8:10).” 그러므로 그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영광이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이에,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