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전봉석 2022. 11. 15. 04:07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느헤미야 12:43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시편 137:6

 

 

포로 귀환 때 제사장 가문과 레위인 가문을 열거하고 있다. 곧 선민으로서의 삶이 성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저들은 그 몸을 성결하게 하고 의식을 거행한다(30). 방백들과 찬양대원이 성벽을 걸으며 주를 찬미하고(31-39), 온 백성들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감사를 드린다(40-43). 이를 주의 은혜로 아는 것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하여 저들의 봉헌식은 건축 후 마땅한 찬미이다. 다윗성은 본래 난공불락의 요새다.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삼하 5:6).” 곧 그만큼 누가 지켜도 굳건하고 천혜의 요새였다. 그런데 저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더는 하나님이 그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서 이방인들의 손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하여 우리 삶의 봉헌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46:5).

 

내가 거하는 곳,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을 주가 지키신다. 나에게 교회는 그러하여 다들 개척을 고민하다 난색을 표할 때 나는 주가 이루심을 강하게 주장한다. 이는 실제 내가 누리는 영광이고 매번 가장 실감나는 실제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역사가 통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어떤 어려움에도 교회를 지키신다. 이를 보존하게 하신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하는 시인의 노래를 나는 실감한다. 고작 내가 하는 일이라면 새벽을 깨우고 주 앞에 나아오는 게 전부이다. 그런데 주가 지키신다.

 

우리 각각의 삶도…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 곧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의 차이는 이 모든 게 주의 손에 의한 것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그 어떤 성공도 있을 수 없다. 이를 알았던 사무엘은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12).” 곧 우리가 사는 곳, 하는 일 모든 게 ‘에벤에셀’이다. 특히 나는 이를 교회로 실감한다. 안 믿는 가정의 아이 둘에 우리 가족이 전부인 상황에서 이와 같이 교회를 이뤄가고 있는 일은 기이할 정도이다.

 

그래서 저마다의 처지와 그 일은 다르나 우리의 찬송이 통일되는 것은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 모든 것을 주가 이루신다. 간혹 젊은 동기들과 통화를 할 때 교회 개척을 주저하는 이에게 나는 서슴없이 말한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창 33:11).” 우린 이를 실감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어떤 이는 교회 개척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더 많은 교회가 분화하듯 생성되어 소수의 무리들이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너무 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의 운집이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관계로 교회를 전락시키고 있다.

 

하나님께 충성된 자들은 교회와 가까이 그 중심을 이룬다. 적당한 거리와 먼 발치께에 있는 무리는 이러한 은혜를 알 수 없다. 오늘 본문 28-29절에 보면 찬양하는 자들의 거주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다들 20Km 내외의 거리에서 예루살렘 사방을 이루어서 살았다. 즉 교회와 인접한 곳에 사는 자들이 주를 찬양한다. 찬양하는 삶을 견지한다. 그 직무를 충실하게 감당하기 위해서인데 확고한 소명이 저들 중심을 붙들었다. 시인은 노래하길,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122:1).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129:5).

 

공통된 화두는 교회 중심의 삶이다. 오늘 본문 30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수시로 삶을 돌아보아 자신을 정결케 하는 일은 주를 모시고 사는 사람의 필수적인 과제다. 우린 누구라도 완전할 수 없고 완벽하지 않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스스로 됐다, 괜찮다, 여기는 자는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24:3-4).

 

하면 그러한 인식이 늘 깨어있기 위해서도 교회를 가까이 하고, 믿는 자들과의 교류가 주축이 돼야 한다. 누구와 어울리느냐에 따라 그 영혼이 물든다. 서로 좋아하는 것을 따르고 닮아가는 일은 흔하다. 친구를 보면 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곧 안 믿는 자들과 어울리는 데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저의 영혼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 고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어떤 이들과 주로 어울리는지, 어떤 일에 관심을 두고 사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주로 쓰는 말이나 그 행동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곧 우리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가지는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그뿐인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4-15).” 그러할 때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정결케 하는 일은 기본이겠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 6:41-42).” 오늘 우리 사회의 현상이 이와 같지 않나?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롬 2:21-23).” 이는 성도의 삶으로는 당연한 처사다.

 

우리가 먼저 두려워할 줄 모르면 겁 없이 함부로 구는 세상에서 우리 또한 속수무책이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중심은 주를 경외함으로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창 28:17).” 진정 오늘 이 한 날의 수고와 내게 허락하신 이 교회와 나로 마주하게 하는 한 사람과의 인사에서도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공적이 아닌 그 중심을 보신다. 오늘 35-38절을 그리 읽었다. “또 제사장들의 자손 몇 사람이 나팔을 잡았으니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샘문으로 전진하여 성벽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 길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성곽 위를 걸으며 악기를 연주하고 주를 찬송하는 일이란,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딤후 1:5).” 곧 우리의 정체성은 주를 찬송하는 자들로,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150:4-6).

 

이는 우리가 고난의 밤을 지새봐서 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비록 현실은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응답은 미진하여 소원한 바를 다 얻지 못했다 해도, ‘더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반드시 이를 온전히 이루실 줄을 믿고 간다. 곧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이를 오늘 시편으로 이어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137:1).

 

때론 성도의 사는 모습이 처량하고 궁색하다. 안 믿는 자들의 조롱과 견주어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당연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알 수 없는 것,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4-5).

 

때로는 비극적인 또는 슬픔의 결말 같지만,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곧 우리의 놀라운 탁월함은 비극에서 희락을, 슬픔에서 참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은혜를 은혜로 알 수 있는 곳,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우리에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저력이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이와 같은 기도로 우린 슬픔 중에도 기쁨의 찬송을 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7-18).” 보면 늘 있는 자들이 더 인색하고 죽는 소릴 한다. 누릴 거 다 누리고 사는 것 같은데 그 안에 만족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2).

 

오늘 이 비극적인 현실을 묘사하는 시인의 마음에는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 28:15-17).” 이 놀라운 역설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곧 어려움 가운데서 이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기 위하여 ‘우리의 수금을 걸었다.’ 곧 저들의 흥에 놀아날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3).

 

이러한 수모와 수치 가운데서 우리로 회개하고 돌이켜 주를 찾게 하시려고, “주여 수치가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마는(단 9:8).” 비로소 우리 신앙의 순수성을 되찾게 하신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4).

 

저들과 같이 희희낙락 즐거움에 들떠 주를 잊고 살겠나? 우리에게 세상은 ‘이방의 땅’이다. 그곳은 매우 끔찍하여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암 7:17).” 이것이 무얼 암시하고 있는지… “그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주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은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호 9:3).” 이러한 기형적인 형태의 삶을 돌아볼 때, “…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이겠으나 우리로서는 바른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때이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7-8).”

 

하여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 곧 우리는 이 땅 너머의 약속의 땅을 그리며 산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5-6).

 

이를 좀 더 쉬운 표현으로 다시 읽으면,

 

오 예루살렘아,

만약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잃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가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어 버릴 것이다.

(우리말 성경)

 

그러므로 오늘의 기쁨이 내일의 저주가 되느니,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축복인 것으로 복되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 중에 들어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수 23:7-8).” 우리는 저들과 같이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스스로 이를 점검하고 주의하며 확증해야 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이에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를 시인의 역설과 같이 표현하면,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9).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로부터의 공격은 생각 이상으로 치명적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우린 이 땅에 무엇을 심을 것인지….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신 32:35).” 드디어 하나님은 B. C. 539년에 메대와 바사를 드셔서 바벨론을 참혹하게 무너뜨리셨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