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전봉석 2022. 11. 16. 04:40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느헤미야 13:3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시편 138:7

 

 

예루살렘 성벽 낙성식이 있던 날, 무리 중에 섞여 살던 자들을 솎아낸다. 선민 공동체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스스로 자신을 이와 같이 돌아보아 자기 속에 섞여 사는 속성을 수시로 제거해야 한다. 곧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결코 이는 단순하고 가벼운 게 아니다. 저 지혜의 왕 솔로몬도 이를 방심하다 노년에 그 마음이 범죄하였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우리로 주의 자녀 삼으시고 나 몰라라 하고 버려두실 리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는 우리도 잘 아는 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여 그 독생자 예수를 죽기까지 내어주신 사랑이다. 하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15).”

 

늘 매순간 자신을 돌아보는 일과 그 주변을 살피는 삶으로 자신을 주 앞에 정직히 세워야 한다. 곧 우리 자신의 개혁은 날마다 매순간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로 내모신다. 가령 어제는 장모를 모시고 피검사를 하고 여러 종류의 약 처방을 받았다. 식사를 대접하고 교회로 올라와 아내는 잠시 은행 일을 보러 나갔다. 장모는 눈치를 살피다 어려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내의 잔소리와 모진 말이 서운하셨던지, 죽을 날이 다가와서 정을 떼려는가?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고 그 일로 모녀가 같이 울었다고 하였다. 모르는 척하라는 말에 나는 마음이 안쓰러웠다. 사람이 사람을 돌보는 일이란 게 곁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고 잠시 아내와 둘이 앉아 어린아이와 노인의 같은 점을 에둘러 말하였다. 속상하고 힘들어서 그러는 것은 알지만, 아이는 지지와 격려로 건강하게 자라가듯 노인도 격려와 지지로 좀 더 건강히 오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아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에겐 기도하고 주를 섬기는 마음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우리 삶의 역동성은 때로 우리의 생각과 무관하게 온다. 생각지도 않은 일에 처하고, 서로의 관계가 어려워지면서 비로소 주를 바란다. 결코 우리 의지나 스스로의 선한 마음으로는 오랜 지병 효자 없고 앞에 어려움 끝에 의가 상한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지날 때 주의 영을 구하는 까닭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하여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셔야 한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139:7).

 

고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오직 주만이 나를 새롭게 하실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느헤미야는 수시로 주의 도움을 구한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14).” …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22).” …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31).” 곧 우리 신앙의 역동성은 수시로 자신을 돌아보아 몰래 들어와 숨어 사는 섞인 무리를 찾아내야 한다.

 

이를 위하여서도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로 주께 간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하여 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말씀과 기도의 위력으로 나를 솎아야 하는 것으로 그 일은 때로 괴롭고 모질다. 환경이 또는 사람이 우리로 광야가 된다. 필리핀 동생은 모 물류창고 분류작업을 하고 몸살이 났고, 이번 주부터는 어디 식품공장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어찌 이루시며 어디까지 굴리실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는 동안 모난 마음과 성품이 깨지고 깎여 섞여 있던 그 속의 고집과 아집이 깨어질 것이다. 필리핀 사역 15년이면 충분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정신이 번쩍 난다. 우리 영혼의 영적 개혁은 끝이 없다. 죽을 때까지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1-12).” 바울의 이와 같은 고백이 그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119:8-9).

 

특히 불신앙의 가족과 같이 산다는 일은 큰 사명감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 언급되는 암몬과 모압은 아브라함의 생질 롯의 후예로 저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갈 때 누구보다 괴롭히고 적대시했던 친척이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신 2:9).” 곧 저들을 그대로 두시는 까닭을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로 비유하시며 이르시되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마 13:29).”

 

장모로서는 그 집의 아들 외에 두 손자와 며느리가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늘 기도제목이다. 나는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어머니의 남은 생에 과업인 것을 수시로 언급한다. 우리 곁에 이와 같은 가족이나 친지를 두게 하심은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늘 상기시킨다.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신 13:6-8).” 저들을 주의 사랑으로 품고 주의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아직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주가 우리를 참고 또 기다리시며 그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던 것처럼… 그러려니 그 속이 오죽할까만.

 

그럼에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나는 종종 사모에게 이를 말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목회를 하거나 목사로 살아야 하는 당위적인 논리는 모두 그릇되다. 주가 이끄시지 않으면 ‘사람’으로라도 살아야 한다! 이도저도 아닌 괴물이 때가 이를수록 넘쳐난다. 목사로 그러는 모습은 여느 사람보다 주의 영광을 가린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나 인기영합주의에 사로잡힌 성직자는 구제불능이다. 사람이 우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하고 와전시킨다. 정치적 진영논리는 마치 진공상태 같아서 우리 영혼을 빨아들인다. 삽시간에 선봉에 서서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아닌 건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거다.

 

그래서 성경은 엄격하게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이는 천하의 솔로몬도 속수무책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본문도 이를 언급하였다.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26).” 이런 덴 용빼는 재주 없다. 주의 강권하심으로밖에는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박힌 ‘섞인 무리’를 빼낼 수 없다.

 

그때에 겪는 어려움은 오히려 놀라운 성장을 가져온다. 요셉과 같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나는 저의 성품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님을 생각한다.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형들의 미움과 버려짐과 노예로 팔림과 억울한 누명과 옥살이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통으로 이와 같이 주옥같은 신앙에 다다랐다.

 

하여 예수님도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어제도 들어가는 길에 필리핀 동생과 통화하고 마음이 안 좋아서 아파트 밑을 서성거리다 올라갔다. 대부분이 외국인노동자들이고 저들이 짧은 한국말로 지시하고 오라 가라 하더라는 말에 같이 웃다가 슬펐다. 필리핀 사역 15년이면 충분하지 않나? 앞서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또 한국에서 부교역자로 섬기며 모 교회 목사에게 사기당한 일들까지 열거하자면 말이 길어진다. 때론 하나님의 훈련이 너무 모질고 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옥중에 갇힌 노인 바울의 이와 같은 신앙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역사적으로 2년여 뒤 저는 톱으로 쓸려 순교하였다.

 

주의 자비하심과 그 사랑을 아는 시선으로가 아니면 이와 같은 일을 어찌 누가 마다하지 않을 수 있겠나?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일련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우리의 가는 길이 참으로 어리석고 한심한 듯 보이나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그러기까지 저들 속은 오죽하였겠나? 그러나 욥의 고백처럼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7:18, 23:10).” 이를 오늘 시편으로 머금어보면,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138:1).

 

‘전심으로’ 곧 ‘온전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기까지 우린 얼마나 긴 터널을 지나고 모진 광야를 지나가야 다른 신들 앞에서 주를 찬송할까? ‘신들’ 곧 내 안에 주도하고 있는 자식과 가정은 물론 삶을 추구하는 이상과 나름의 신념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에 섞여 있는 무리들과 같이 ‘신들’ 또한 부지기수다. 오늘 시편의 저자 다윗은 누구보다 이를 잘 알았고, 저가 늙어서도 도망쳐 숨어야 했던 광야로 인하여 오늘과 같은 ‘전심으로… 주께 찬송하기에 이르렀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그 중에 나 자신이 가장 큰 난제다. 할 때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바울도 요한도 이와 같은 진리를 성경으로 기록하기까지는 숱한 착오와 그릇 행하였던 길을 돌아야 했었다.

 

오죽하면 바울은 이를 깨닫고 난 뒤 “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어쩌면 우리는 평생이 개혁의 삶이다. 솎아내고 볶아쳐서 그릇됨을 제하기까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39:7-10).

 

아, 우리는 주의 은혜로 산다. 단 한 시도 주의 은총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이를 잘 앎으로,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138:2).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있어 그 숱한 모진 세월이 까마득한 것 같지만 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두고 생각한다면 지극히 일시적일 뿐이다. 우리가 오늘이 고난, 죽음에서조차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의 은혜가 더욱 크고 놀라우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이보다 더 큰 복이 있겠나? 이로써 인내를 배운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그렇다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37:7).

 

이로써 우리는 전심(全心)을 가지게 된다. 그때의 필수가 있다면 기도의 능력과 권세다. 다윗은,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138:3).

 

그게 더디고 미덥지 않아 사람을 찾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엉뚱한 길로 가는 수가 허다하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 왕들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그들이 우리의 몸과 가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란이 심하오며…(느 9:27).” 결국은 다 겪어야 비로소 아는 일이라면 사는 게 너무 고단하다. 그럴 필요가 없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하면,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6).

 

하나님이 다 아신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그리하여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왕상 8:39).” 이에,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7).

 

우리에겐 이 보다 더 확실한 보호가 없다. 곧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그러므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61:3-4).

 

그리하여,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 11:5).” 그러나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곧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138: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