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전봉석 2022. 11. 17. 05:32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에스더 1:1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편 139:17-18


포로 귀환 이후 이스라엘 역사를 다룬 세 권의 책,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가 있다. 에스더는 1차 귀환이 이뤄지고 아직 2, 3차 귀환이 이루어지기 전의 일이다.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 곧 크세르크세스(B. C. 486-465) 시대 페르시아의 수도 수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사건으로 부림절 제정의 기원이 된다. 곧 아말렉 자손 하만의 음모에서 구원을 받는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역사의 한 단편을 이루지만 하나님이 에스더를 왕후로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이야기가 한 편의 이야기 구성으로 잘 나타나 있다. 아하수에로는 두 차례에 거쳐 그리스 원정을 단행하였는데 본문의 연회는 원정을 위한 최종 점검과 함께 6개월간 치러지는 것이었다. 수산 성 거민을 위해 7일간의 잔치로 마무리 하는데 마지막 날에 에스더가 와스디가 폐위 되고 새로이 왕후에 오른다.

앞으로 펼쳐질 일련의 상황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 삶에 깊이 관여하시고 주관하신다. 곧 모든 권력이 주의 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을 때도 저가 바로를 두려워하여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바람에 큰일을 치를 뻔하다 하나님이 이에 관여하심을 그 일을 마무리하시는 것을 본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창 12:17).” 이런 일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으로 알 수 있다.

특히 출애굽 당시의 열 가지 재앙과 구원의 역사는 그 손길을 더욱 세밀하고 존귀하게 나타낸다.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출 3:19-20).” 하나님은 결코 허투루 우리를 대하신 적이 없다. 결국 모든 게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뤄진다. 하여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하나님은 온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시며 더욱이 주의 자녀들을 향한 놀라운 섭리와 간섭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게 하신다.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대하 20:6).” 이는 우리가 안다.

이를 오늘 시편의 노래로 들어보면,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139:17-18).

오늘 본문에서 보면 세상 쾌락이 주는 범죄와 실수의 잔치다. “왕위에 있은 지 제삼년에 그의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지방의 귀족과 지방관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에 1:3).” 곧 세상의 여러 축제와 잔치가 죄를 짓는 온상이 되고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역사하신다. 다니엘서에서도 보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이 전치를 하다 예루살렘 성전의 금은 기명으로 술을 마시며 범죄한다.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더라(단 5:3).” 예수님 때에 헤롯은 잔치를 하다 세례요한을 죽인다.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마 14:11).” 세상 모든 잔치에서 술은 흥을 돋우고 흥은 죄를 부른다.

우리의 즐거움은 다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곧 우리의 참여는 주의 마음으로 주를 대신한다. 이를 앎으로 욥은 잔치 후에는 반드시 주 앞에 정결하였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5).”

곧 잔치를 즐기는 자는 우매한 자의 마음과 같아서 탐닉하는 자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이에 좀 더 살피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우리는 세상 연락을 즐거워하지만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잠 21:17).” 하여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이는 매우 강한 어조의 단언이다.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마 22:3).” 바라고 구하는 소망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한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 19:9).” 천국은 마치 초대받은 잔치와 같지만 사람은 세상 일락을 즐기느라 관심이 없다. 곧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 영광이다. 오늘 4절에서 보면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업적과 성과에 연연하여 즐거워한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곧 모든 성경은 우리가 어디에 시선에 두고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이는 개념적인 설명이 아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19).” 이를 인정할 때 우리는 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

곧 우리의 잔치는 이 땅의 일시적인 공적과 그 치하와 그 즐거움의 자리가 아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일시적이며 만족함이 없다.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잠 27:20).” 한데 교회가 더욱 더 세상보다 못한 곳으로 전락하는 사례를 종종 듣는다. 주의 종을 세우는 데 있어 세상 이목과 그 전력을 앞세우거나 행여 하나님이 더하신 은혜를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누리는 데 쓰곤 한다. 박하기로 소문 난 처우의 일터가 어린이집 교사나 교회 사역자들이라니…. 나는 종종 누가 부교역자 자리를 찾다 상처를 받고, 것도 말 같지도 않은 돈과 처우와 말도 안 되는 혹사를 마치 헌신과 봉사로 강요하는 것을 들을 때면 어이가 없다. 세상 잔치에는 아낌이 없으면서 정작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오늘 시편으로 넘어오면,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뜻을 아시며 능히 이루신다는 데서 안도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1-4).

모든 것을 아시는 주께서 눈 가리고 야옹 하는 꼴의 생각과 삶을 헤아리지 않으실까?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13).” 때론 믿는 자가 더 무섭고 교회가 더 인색한 것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거기에 교회가 점점 정치화 되는 것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필히 하나님의 사람을 보호하신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5-6).

오늘 다윗의 시는 역시 다윗의 시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다. 곧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1).

역시 다윗이다 싶은 것은 저가 하나님을 알고 주를 인정함으로 세상 그 무엇도 우선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121:5-6).

이 놀라운 그러나 지극히 사실이고 현실적인,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39:7-10).

어떤 즐거움이든지 어려움이든지, 행여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고난 중에 있다 해도 주가 알지 못하심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욥 34:21-22).” 곧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3-24).” 우리로 주를 더욱 의뢰하게 하시려고 오늘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환경과 상황을 조성하시고 허용하신다.

이를 가리켜 말씀하시길,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누구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4).

우리 영혼은 안다. 설령 지금 나의 현실이 그러하여 나의 육신은 이를 알지 못한다 해도 우리 안에 두신 주의 영이 우리로 알게 하실 것이다. 이는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5).

곧,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6).

오늘의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일들 같아도 이미 주의 책에 다 기록해두신 내용이다. 심지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이 놀라운 섭리, 주의 간섭과 관여와 주관하심이 복 중의 복이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3).

그러므로 우리가 주께 바라는 한 가지, 오직 주만 바라며 주만 의지하면서 주의 나라만 사모하며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시기를.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말씀으로 말씀에 이르러 살기를.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