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전봉석 2022. 12. 5. 04:50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욥기 9:2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시편 7:11-12

 

 

욥은 빌닷에게 항변하기를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주지 않으신다.’라는 말에 동조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의를 주장하지만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3-4).” 하고 반문한다.

 

세상에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성경의 결론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러니 누가 자기 의를 들고 주 앞에 서서 주장할 수 있을까? 그것으로 누구를 정죄할 수 있을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2-3).

 

지혜자도 거들기를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 그러므로 누구도 하나님과 쟁론할 수 없고 자기의 선을 고할 수도 내세울 수도 없다. 우린 누구도 하나님 앞에 대답할 수 없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욥 40:4-5).” 뒤이어 스스로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어려운 말로 헤아리기 어려운 주장을 했다고 인정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39:9).

 

돌아보면 다신 떠올리기도 두려운 어리석었던 일과 죄로 얼룩진 부분을 가릴 수가 없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 이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순종에 이르기를 구할 뿐이다. 이는 누구라도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우리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잠 8:22-26).”

 

모든 성경이 이를 통찰한다. “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단 2:20).” 곧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그러는 중에 우린 영적침체를 겪는다. 바르게 믿고 온전하게 살고자 할 때 그 침체는 자주 혹은 오래 간다. 먼저는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치명적인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든 혹은 자연발생적으로든 내적으로도 감정을 상할 수 있다. 먼저 외적인 억압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42:3, 10).

 

더불어 내적인 억압으로는,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3, 7)

 

어떤 이유로든지 ‘눈물이 음식이 되고, 주의 파도가 나를 휩쓸어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우린 하나님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며 소망을 찾게 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11).

 

마틴 로이든 존스 목사의 <영적 침체>를 읽으면 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시편 42편은 그러한 침체 가운데서 우리 영혼을 일으켜세운다. 덧붙여 말하길 ‘우리 삶의 대부분의 불행은 자신에게 선포하기보다 자신의 말을 듣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가끔 되새긴다. 아침에 일어나기 무섭게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염려와 근심이 먼저 나를 짓누르는 이유다. 무슨 일을 두고 나는 늘 내 안의 소리에 동조한다. 때로는 화가 또는 눈물이 나는 것도 내가 내게 들려주는 억울하고 분한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포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11).

 

하면 우리의 어려움 나아가 영적인 침체를 다루는 여섯 가지의 방법은 분명해진다. 첫째, 하나님이 자신을 잊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아는 일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8-9).

 

곧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실망하는 말들로 이는 욥의 표현처럼 ‘바람에 날아가는 말’일 뿐이다. 시편의 노래처럼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뿐이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4).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욥 6:26).” 곧 우리가 실망하여 하는 말은 그처럼 쓸모없이 쓸려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째, 절망 중에 오히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그의 주권을 확인할 수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42:6).

 

셋째, 이도 ‘밤’에 오히려 주를 찬송한다. 밤은 슬픔과 눈물의 어두운 시간으로 홀로 놓이는 때이기도 하다. 그럴 때 주를 더욱 바란다는 것, 찬송이 있어 기도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8).

 

넷째, 그러할 때 자신의 소릴 듣기보다 자신에게 선포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다섯째, 주가 함께 하셨던 일들, 나의 날들 가운데 주의 인자하심을 돌이켜 기억한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4).

 

이로써 여섯째, 하나님을 기억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1-2).

 

곧 오늘 욥이 그러한 중에도 항변하다 주께 아뢰는 말,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욥 9:28-29).” 주를 인정하는 데서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였다.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주의 얼굴을 뵈올까?’ 하는 갈망하고 소원하는 마음이 있으니 “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사 26:16).” 곧 우리 안엔 저주의 말과 원망의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망을 우리 안에 두셨으니 이는 착한 일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곧 우리는 주의 구원을 바란다. 날마다 그 구원이 자라간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7:1).

 

하나님께 아뢰고 그의 품에 안기지 않으면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우리에게 영생의 말씀을 주시지 않았던가.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침체는 늪과 같아서 발목이 빠졌는가 하였더니 어느새 허벅지까지 차올라 목을 조이고 숨통을 막을 수도 있다. 이를,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2).

 

하여 주께로 나아가면, 나를 대적하던 심지어 내 안의 소리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어서,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6).

 

앞서 내 영혼이 침잠할 때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2-13).” 그러므로 낙심은 잠깐만 하고 인내로 산 소망에 이루는 줄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8).

 

곧,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0).

 

그리하여 내가 주께 고하고 또 정직하여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이와 같이 생명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이까?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고로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1-12).

 

곧 우리 앞에 있을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알되 그때에 우리의 대언자가 계심을 또한 믿음으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리스도께서 나를 변호하신다. 저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사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