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욥기 8:20-22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편 6:9-10
엘리바스의 변론에 반박하기 무섭게 수아 사람 빌닷이 반격하듯 뒤이어 말한다. 욥의 말 중에 하나님이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하신다는 말에 욥의 고난이 그 죄로 인함인 것으로 욥의 죄이든 자식들의 죄이든 죄 때문이라는 것을 내세운다. 이에 회개함으로 용서하심을 받고 의롭게 회복될 수 있다는 요지다. 앞서 엘리바스는 경험에 의한 철학적 주장이었다면 빌닷의 주장은 전통적이고 단정적인 주장이다. 정형화된 인과응보를 회개와 회복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저들의 말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이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인간의 단순한 논리로 정의하려 한다. 도식적이고 틀에 박힌 말로 함부로 욥을 판단하고 있다. 마치 심판자 자리에 자신들이 앉아 하나님을 예단하는 것 같다. 그런 저들의 충고가 욥에게 호소력 없고 반발만 일으키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하시고 저런 자들을 ‘외식하는 자’ 곧 형식주의자들이라 하시고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5).” 먼저 자신을 돌아볼 것을 가르치셨다.
우린 논쟁으로 사람을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사람이어어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막 1:17).” 어떤 상황을 두고 속단하여 정죄하는 일에 있어, 빌닷은 함부로 끔찍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욥 8:4).” 일련의 사회적 사고나 현상을 두고 함부로 규정하고 속단하는 것에 대해 나는 치를 떤다. 죽어도 싸다는 둥 죽을 짓을 했다는 둥… 우리의 말(言)이 겁 없이 달리곤 한다.
성경은 이를 금하시며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이게 그렇게 어려운 까닭은 우리 속에 화가 가득하여서고 화는 억눌린 자아가 뿜어대는 고약함이다. 주 앞에 아뢰지 못할 때 화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24:26).” 이에 또 하나는 화만큼이나 거짓이 우리 안에 가득해서이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이유다. 스스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상대의 그런 점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재판장이 될 수 없다. 빌닷의 다음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 8:3).” 그리 잘 알면서 이처럼 함부로 하나님의 공의를 규정하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4).” 특히 설교 중에 강단에서 이렇듯 함부로 말하는 이들을 볼 때면 소름이 돋는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누구도 예외일 수 없음을 성경은 경고하셨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오늘 빌닷의 말은 틀린 게 없지만 옳은 게 없다. 이는 저의 말뿐이어서이다. 회개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경우도 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말의 잔치가 그러하다. 누구를 정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내어놓고 그 잘못을 고하는 것으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4).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이다. 그러므로 나를 사하고 씻으실 이도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2-3).
우리가 돌이켜 주 앞에 서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진정한 회개와 동시에 주의 영을 우리 안에 두심으로 우리를 회복하신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20-21).”
그러할 때 빌닷의 다음 주장은 아름다운 말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어디 가게에서 종종 표어처럼 걸려 있는 것을 보는데 분명 은혜와 소망이 있는 말이다. 그러나 빌닷의 말에서 보면 하나님의 징계로 초라해진 너의 보잘것없음이 머잖아 창대해질 것이란 소리다. 저의 말은 고우나 그 뜻과 의도는 불순하였다. 곧 욥의 오늘이 하나님께 맞고 터져 그게 다 죄 때문이란 왜곡 중에 나온 말이다. 우리의 시작과 끝은 ‘미약과 창대’로 결과론적인 사실로는 맞다. 우리의 오늘과 내일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복된 소망을 거둘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 귀한 복음이 그렇듯 속된 판단과 비난 가운데 쓰일 말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그러므로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34:9).
앞서간 믿음의 선조들의 발자취는 응축된 교훈을 남긴다. 빌닷의 지적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당하는 일이라 하면서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8).” 하고 저는 그 뜻을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인물들을 보아도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를 일일이 인과응보로 적용할 수 없다. 예수님이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으로 그 고난과 역경을 당하신 것인가? 심지어 십자가 달려 죽기까지? 그렇듯 말의 대부분은 안 하니만 못한 것이 태반이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 32:7).”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기호나 상징이 아닌 성경을 말씀으로 주셨는지 알겠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6-8).” 말씀 앞에 든든히 서지 않으면 우리는 되레 말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자신의 말이 곧 미로 같이 자신을 가두어서 길을 잃게 한다.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욥 8:10).” 빌닷의 말 속에 길이 있으나 그 길을 찾지 못하겠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39:5-7).
우리로 시편을 읽고 시편을 살라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세계가 그 속에 있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37:35-36).
오늘도 나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의 권세를 누리는 것 같으나 곧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니,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욥 8:11-12).” 오늘 저 빌닷의 말 속에 답이 있으나, 답이 없다. 그와는 상대적으로,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92:13-15)
서로가 같은 것 같으나 다른, 대조되는 의미를 성경은 알게 하신다.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7).
그러니 성경의 경고를 헛되이 들어서는 답이 없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2).”
누가 마음이 불안하여 카톡으로나마 그 사정을 깨알같이 적어 보냈다.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이런저런 일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무엇에 대해 어떤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문득 히브리서의 말씀이 떠올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이를 보냈더니 저는 새삼 성경에 참 좋은 말씀이 많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소 벙벙하여 뭐라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이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토대 위에 한 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말씀 안에 답이 있다. 우린 문제지에 앞서 답을 먼저 들고 선 것과 같다. 예문처럼 믿음의 발자취가 가감 없이 담겨져 있다. 다윗의 치부도 그에 따른 절규하는 회개도 꾸밈이 없다. 종종 영적인 침체의 늪을 건너는 때에는 시편 42편이 도전을 더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그러할 때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1).
우리 영혼의 갈급함이 은사였다. 주가 주신 것으로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이것으로 우리는 갈급함을, 갈급함은 주의 말씀으로 나아오게 하신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6:1).
오늘 우리가 제단의 뿔을 잡는 심정으로 주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증표이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 나는 자주 오늘의 누구에게 그와 같은 고통의 중심에는 주의 부르심이, 그의 사랑하심이 함께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물론 어렵다. 때론 슬픔이 우리를 짓누른다. 하나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그러할 때 우리가 단걸음에 달려갈 곳은 하나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2-3).
오늘 시인의 호소와 같이 주께 아뢰고 고하는 것, 그러므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이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그런데도 ‘다음에’ 하고 미루는 누구에게 나는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같이 줌으로나마 예배드리자, 하면 ‘다음에’ 하고, 그럼 가까운 교회에라도 나가, 하고 말하면 ‘다음에’ 하고 미룬다. 그러니 누가 들어주고 알아주는 게 뭐 그리 중요하겠나…….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5).
그러니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4).
곧 우리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과의 거리두기다. 저는 아니라 하나 이는 단절이다. 저는 문이라고 외치지만 닫힌 문은 벽일 뿐이다. 주께서 문 밖에 서서 기다리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6-7).
우리의 호소가 우리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로 이끌 것이다. 다만 지금은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그러니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나는 지금 누구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 묵상함으로 주를 바란다. 주를 바람으로 저를 생각한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9).
나는 주가 나로 일찍 깨우시고 주 앞에 나아오게 하신 이유를 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내 안에 어떤 낙심이, 긴 한숨과 함께 우울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을 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누구로 인하여 내가 잃을 자유는 아니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사이,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10).
곧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이미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나는 주께 아뢰는 것이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 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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