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기 10:1-2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4-5
욥의 직설적인 토로와 하나님 앞에서의 변론이 인간적이다. 무차별적인 환난과 징계 앞에 항변하고 호소한다. 그렇듯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이를 사람에게 퍼부었다면 욕이 되나 하나님께 아룀으로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된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10:1-2).”
우리가 시편으로 살고 시편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하고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이를 항변이라 하든 욕이라 하든 저항이라 하든 반항이라 하든… 주 앞이어서 가능한 것은,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 22:10).
이와 같은 관계에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69:5).
무엇을 숨기고 감추어 꾸민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려질까? 이에 오늘 욥은 여과 없이 하나님 앞에 고하고 따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항변한다. 까닭모를 고통에 대해 하나님의 해명을 요구하기도 한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욥 10:3).”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다소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4).” 하고 묻는다. 창조주 하나님이 그러시는 이유에 대해 물으며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4-7). 그렇듯 고난을 가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8-13).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겠고(14-17), 그러니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자하여 애원한다(18-22).
이를 가만히 되새기다 보면 고통은 이유보다 목적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통의 이유는 억울함만 더하고 고통의 목적은 사랑의 결실을 알게 한다. 그런 거 보면 하나님이 우리 사람을 참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귀히 삼으셨다. 오늘 시편의 시점에서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8:4-5).
가령 우리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알고 있는 트라우마라고 하는 것도 실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우리 마음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 거듭 생각하여 답을 얻고자 하는 기전’인 자이가르닉 효과의 일종이라 한다. 마치 우리 몸에 어떤 항체가 생기기 전까지 이를 방어하고 전투태세를 갖추느라 몸이 열을 내고 이에 맞서 싸우는 몸살과 같이… 나의 짧은 심리학적 지식으로도 ‘끝’ 하고 어떤 결정이 나기까지 이와 같은 크고 작은 싸움은 계속 되고, 우리의 감정은 양분된다. 시편에서 이를 잘 표현하고 있는 곳이,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43:1-2).
이를 볼 때 앞서 하나님께 변호를 아뢰면서 또 다른 마음에는 나를 버리셨다, 하는 불신도 동시에 같이 있는 것이다. 곧 오늘 욥의 항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께 아뢰며 토로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를 두고 한탄하듯이 고한다. 이를 바울은 우리의 양분되는 마음을 분명히 밝힌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하고 자신의 양분된 마음과 몸의 일에 대해 절규하였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0-21).”
어쩌면 우리의 이와 같은 양분된 감정은 건강한 영혼의 또 다른 증거이지 않을까? 아무런 갈등도 없이 무심하여서 죄에 대하여든 선에 대하여든 무감각한 영혼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일 텐데,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그러니까 늘 죄 된 마음과 행실을 부끄러워하고 회개하고 돌아서면서도 다시 또 그와 같은 자신 앞에 절규하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하여 우린 일심(一心)을 간구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86:11).
가끔 하는 말이지만 나는 늙고 싶어 했다. 어렸을 때도, 나이가 조금 들어 젊어서도 빨리 늙어 노인이 되고 싶었다. 그럼 뭔가 저절로 관조적인 눈과 통달한 언어로 어쨌든 좀 평안을 얻지 않을까 하여… 성에 대한 욕구에서부터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과 이를 의식하여 거짓으로 꾸며낸 페르소나를 벗고 정직한 얼굴을 하고 무엇도 의식하지 않고 조금은 너그럽게, 또는 넓은 도량과 아량으로 삶을 살고 대하고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릇된 생각이 있었다. 스물이 되면 좀 자유로울까 하였다가 서른이 되면 좀 나을까 했었는데 마흔이 되어도 오히려 여전하여서… 그때 아마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었다면 쉰이 되기 전에 쇼펜하우어의 주장처럼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목숨을 끊지 않았을까?
‘무슨 연고로’ 그때까지 나를 두고 참고 기다리시다가 이내 주의 강권하심으로 왜 하필 나에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하는 찬송이 드려지게 하셨는지 나는 솔직히 지금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찬송은 다니엘 휘틀(1840-1901) 목사가 작사한 것으로, 휘틀은 남북전쟁에 참전하여 소령으로 제대하였다. 그는 부상으로 오른팔을 잃고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심심하여 읽게 된 신약성경에서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 어느 날 밤, 한 병사가 죽어가며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을 찾고 있는데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죽어가는 병사의 입에서 “당신은 크리스천입니다.” 하는 말과 기도 부탁을 받았고, 이내 휘틀은 죽어 가는 병사를 붙들고 주께 무릎을 꿇었다.
오늘 욥은 ‘무슨 연고로’ 하며,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2).” 하며 주께 입을 연다. 그러게, 이 ‘쓸데없는 자를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의 답은 명백하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신 7:7-9).”
오늘 시인도 이를 궁금해하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8:4).
하고 여쭙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 때론 왜 하필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시는지 알 수 없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람’을 우린 다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한다. 늘 묵상할 때마다 참 아름답고 귀한 기도이다. 이를 임의로 행으로 나누어 시적으로 천천히 음미하자면,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6-19).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내게 충만하게 하시려고… 오늘 욥의 의문과 갈등과 항변에 대한 답이 바울의 기도에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 31:14-16).
이와 같은 요구와 간구를 아뢸 수 있는 자로 사는 것이 복이었다. 때로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단 3:18).” 우린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97:12).
우리 하나님도 우리들로 인하여 얼마나 즐거워하고 기뻐하시는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누리는 데는 노인이 되어서가 아니었다. 일찍이 주를 사랑함으로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5).”
오늘 욥의 절규어린 호소와 항변과 괴로움에 귀 기울이며 나는 소망한다. “…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그러므로 주께서 가장 선하게 나를 으깨어 주무르시고 빚으심으로 가장 귀히 삼으실 것을 믿는다. 이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이 모든 게 주의 은혜라.
여전히 나는 지금도 늙고 노인이 되고 싶다. 부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러는 동안 나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나의 믿음이 자라가기를.’ 소망한다. 곧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하여 더는 부디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4).” 그러하기를.
그러하여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8:1).
하는 찬송과 고백이 순전한 나의 것이기를. 곧 오늘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4:23).” 어느 훗날 땅과 하늘과 바람과 나무들과 함께 소리내어 주를 찬송할 것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그러하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4).
이제는 조금은 알겠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5).
주의 영광을 우리로 맛보아 알게 하심으로,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그리하여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6-8).
그러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톨스토이의 질문에 나는 이제 대답할 수 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이는 곧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곧 오늘은 나는 전부가 아니다. 곧 욥의 빌려서 말하면,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32:8).” 그러므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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