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욥기 16:20-2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2-3
친구들의 무정한 변론에 욥은 하나님 앞으로 아뢴다. 욥은 친구들을 향해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2).” 하고 서러움을 감추지 않는다. 위로는커녕 정죄하기에 급급한 저들의 무정함에 치를 떤다(1-5). 이러한 고난에 처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상기하며 친구들에게 향하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린다(6-16). 하며 아뢰되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17).” 자신의 무죄함을 아뢴다(18-22).
서로의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위로하기란 모두 각자의 견해를 따를 뿐이어서 도움이 안 된다. 때론 이처럼 애매히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다. 이를 베드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 일, 그 자체의 인내로 이루어가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라 덧붙인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 어떤 어려움으로 날 위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묵상하는 일, 곧 다가올 성탄절의 의미는 그렇게 우리의 거듭남과 성화를 상기시킨다.
곧 성탄은 하나님의 사랑에 따른 절정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 토요일 오후 딸애와 나눈 대화에서 내가 알리고 싶었던 것도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나를 지극히 사랑하고 계셨다. 죄가 깊어 은혜도 깊다는 말씀은 내가 그때의 내 죄를 인정하면 할수록 주의 망극하신 사랑은 어찌 말로다 표현하기가 어렵다. 차마 딸애 앞에서도 말할 수 없는 죄의 속성에 대하여, 내 안에 사무치는 회개로 통회가 깊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크시다. 더하여,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이를 누구에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자신은 느끼는데 이를 표현할 길이 없어 때론 눈물로 감사의 기도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먼저 저가 나를 살리셨고,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셨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이 말도 안 되는 사랑을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 1:5).” 이는 천사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저들은 다만 우리를 섬기는 자들로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14).”
곧 나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나는 주의 것이다. 주가 낳은 주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거듭남이란 그리하여 주의 자녀가 된 것으로, 이는 오로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된 일이다(엡 2:4). 결국 주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오고 나로 강권하심으로 주의 자녀로 삼으시는 역사, “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곧 그때 나는,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1).” 왜 이처럼 극진한 사랑으로 내게 긍휼을 베푸셨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또한 장래에 어떤 일과 모습으로 영생을 살아갈 지 알 수는 없지만, 장차 그리스도와 같은 자로 서게 하실 것은 안다.
죽었던 나를 살리셨고, 주의 자녀로 삼으셨고, 이를 알게 하시며, 장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소망을 갖게 하셨다. 곧 장차 그리스도와 같이 완벽하게 될 것을…. 고로 하나님의 성육신 없이 우리의 거듭남은 불가능하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곧 저를 세상에 보내시며 ‘예수’란 이름을 주셨으니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그 이름 예수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또한 나로 이끌어 이를 믿게 하셨으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6-57).” 성령은 이로써 주를 영접하게 하신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놀라운 사랑, 이 증거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내 안에 있는 것과 아들이 있음으로 이를 증명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0-12).”
오늘 욥의 진술과 그와 같은 하나님께 아뢰는 내용에서 새삼 나의 한 날을 감사하게 된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욥 16:21-22).”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걸 아는 것은 이처럼 말씀으로 호흡한다. 호흡이 있어 주를 찬송한다. 살았다는 것은 숨을 쉰다는 것이고, 우리의 숨은 주를 바라며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곧 우리는 거듭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함을 알고 또한 더욱 바란다. 고로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곧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장래에도 무궁하시다. 욥은 이를 붙들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욥 16:19).” 우리 사이 곧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저는 알고 있었다. 곧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대언자, 나의 중보자 예수, 사람을 입고 오신 하나님, 그러한데 현재 이스라엘과 무술림은 아들 예수, 성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 그 이름 곧 ‘아들이 있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이로써 우린 아들을 공경한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23).” 그러므로 예수를 부정하고 저버리면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이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이와 같은 말씀을 오늘 욥의 진술에 듣게 되니 놀랍고 귀하다. 수천 년 전 저들은 아직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으면서도 그들 안에 신령한 영, 깨달음이 있어서 다시 한 번,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욥 16:19).” 이와 같은 놀라운 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더욱 앞서서도 다르지 않아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이 놀라운 복음의 하나 됨을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선지자들에게서든 제자들에게서든 우리로 듣고 보고 같은 것을 느끼며 깨닫게 하신다. 하여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3-5).”
이와 같은 말씀이 참으로 깊고 귀하다. 우린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다.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욥 16:22).” 하여 거기서 영원히 산다. 이에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6-17).” 그러할 때,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
세상은 늘 그러하나, 그러하여서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10:4).
그런들 우린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영이 우리로 알게 하신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5).” 그러므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차고 넘치는 우상들의 땅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이를 위하여 성탄이 있고 성탄으로 우리의 거듭남도 있다.
우리는 이제 이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곧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곧 지금이 어떠하다 해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그때의 나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이다. 하나 이제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14:5).
내가 의인인 것은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그의 긍휼하심을 감사할 줄 안다. 곧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곧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8).” 늘 바쁘고 부산하여 사느라 여념이 없는데도 평강이 없다. 그러나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6-7).
곧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그러므로 이제 안다. 기다림은 놀라운 신앙의 한 면모이었으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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