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
욥기 15:11-13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편 13:6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이다. 처음과 달리 다소 격앙된 어조를 보이고 있다. 마음이 답답한지 나이와 경험을 들어 자기 생각을 드러낸다.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10).” 하며 저는 욥의 주장이 자기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사악한 마음이 있다고 정죄한다. 그렇듯 자신들은 앞서 인생을 경험한 자들로 온전한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다. 앞서 저는 이상 중에 계시된 체험이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4:17-19).” 곧 저의 반박과 변론은 여전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번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과 부패함을 역설하기도 한다.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15:14-16).” 이를 욥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죄의 결과라고 하니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그럴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이나 무가치함은 내남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무자비하신 심판에 항의하였을 뿐이다.
이에 엘리바스의 반박이다.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2).” 바람만 들었다는 표현처럼 헛된 지식으로 가득하다는 공격이다. 물론 엘리바스와 그 친구들은 당대의 모두 현자들이다. 그러나 세상 경험과 이치와 사고로 하나님을 마치 잘 알고 경험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가령 다윈의 진화론은 지금까지도 보편적인 견해로 세상 지식은 이를 인정하고 있다. 한데 저의 지론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지고 진리에서 멀어졌는가를 생각하면 인본주의적인 사고와 그 철학을 주장하는 현자들의 책임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를 통탄해하며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8-20).” 그리하여 우리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하고 베드로 사도는 축도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2-3).” 이를 묵상할 때면 선생 되기에 각별히 주의할 것을 되새기게 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곧 누구를 가르친다거나 기르고 훈계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또한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고 2:8).” 때론 우리로 세상 학문에 눈이 어두워져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한다.
이는 참담한 일이어서 자신의 견해나 경험, 지식을 바탕으로 더욱이 하나님을 함부로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일보다 어리석은 짓도 없겠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 이는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그리 함부로 살았던 것을 고백한다. 아내가 장모와 함께 서울 집에 가게 돼서 어제는 딸애와 둘이 소현세자의 시대적 배경으로 한 <올빼미>란 영화를 보았다. 그러면서 모처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지난날의 죄악 됨과 어리석었음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나를 어찌 긍휼히 여기시고 그의 섭리 가운데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새삼 감회가 새롭고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곧 우리 교만에는 다툼만 따를 뿐이다. 자기주장에 함몰되어 자기의지를 굽히지 않을 때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를 좇으라는 말씀을 따를 수 없다. 교만이란 그렇듯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4-6).” 이제 성인이 된 아이 앞에서 이를 인정하며 그때의 어리석었음을 돌이킨다는 것이 한편으론 감회가 새로웠다. 교만은 이를 굽히지 않는다. 하여 적은 소득에 감사하지 못하게 한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 16:8).” 하여,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 73:6-9).
이 말은 오늘 엘리바스의 주장을 그대로 적용한다.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욥 15:3).” 곧 스스로도 말하는 것처럼 교만은 자신을 말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못하게 한다. 주를 경외함을 빼앗아 간다.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4).” 묵도, 우리가 주 앞에 고개 숙이는 일. 곧 자신의 주장을 거두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없어질 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곧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늘 자신의 소리에 빠져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의 결국은 믿음의 상실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이화 같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돌이켜…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여기서 내가 어찌 성급하게 해보겠다 하는 생각이 죄의 근원이다.
나는 인내를 배우게 된다는 말을 하고 딸애는 왜 굳이 참고 살아야 하는지를 반문하였다. 그러한 생각을 확대하여 적용하면 그리하여 우리 주장은 자기만족을 추구함으로 동성애나 그 이상의 이상을 꿈꾸고 갈망하고 이를 추구한다. 이를 또 세상은 마땅하다는 듯 자기행복추구권을 발동한다. 이젠 다들 당연하다는 듯 ‘왜 참고 살아?’ 하고 반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곧 나의 행복할 권리보다 더 중요한 것, 그 이상의 충만함을 알게 하시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결국은 말씀으로였다. 저는 말씀으로 오셨다. 말씀으로 계셨고 말씀 가운데 영존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 우리의 경솔한 속단이 무섭다. 물론 우린 모두 자유롭다. 하나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곧 우리의 삶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먹고 마시고 즐겁고 행복을 바라는 모든 추구권을 부인하고 주를 따른다는 것,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래서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은 자명해졌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 14:15).” 곧 때론 가만히 있어서 경솔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행 19:36).”
이어지는 엘리바스의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그와 같은 주장과 반박에는 뭐라 변명할 것도 없다. 저의 말이 옳다. 그 생각이 지극히 이성적이고 경험적이어서 저의 말마따나 나이에 따른 경륜도 무시 못 한다. 그러나 실상은 스스로의 죄를 덮는 결과일 뿐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그게 참 어렵다. 나의 생각이나 판단이 앞서면 여지가 없다. 여전히 그 속에 사람을 의지하기 때문인데,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이와 같은 물음에 답을 건네는 것은 시편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13:1-2).
우리 영혼이 암울할 때는 하나님이 멀리 서실 때이다. 우린 어려움을 겪을 때는 동시에 하나님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이를 성경은 시련이요, 연단이라고 정의한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여기서 우린 인내를 배우고 산 소망에 이른다. 이를 인정하기까지 꽤 먼 길을 돌아온 셈이었다. 나는 딸에 앞에 그리 고백하였고, 딸애는 이를 수긍하였다. 곧 하나님의 침묵을 맛볼 때 하나님의 참 사랑도 알게 된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곧 쓸데없는 근심과 염려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란 없다.
그때마다 나를 강하게 붙드셨던 말씀이 있는데,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이를 여러 번 되뇌며 묵상하면 답이 나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이는 복음의 근간이고 진리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3-4).
나의 믿음의 승패는 곧 하나님의 이김과 그리스도의 승리하심을 부정하게 만든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이는 신약에서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곧 하나님의 이김은 우리로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한다.’ 하여 우리가 연약함을 주께 아뢸 때,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아, 이 놀라우신 사랑.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5-6).
이는 결국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그것이 나인 것을 나는 나의 딸애 앞에 자랑할 수 있었고, 이런 날이 이른 것에 대해 참으로 주의 은혜가 어떠한지 자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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