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전봉석 2022. 12. 13. 04:17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욥기 17:9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1

 

 

욥은 항변하다 항상 주께 기도한다. 저의 말하는 방식이 늘 주께로 향하는 것을 본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가도 하나님의 중보와 의인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밝히시고 증명하여 주시기를.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누구라도 고난과 역경을 피해 살 수는 없다. 이는 신앙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의 죄로 인한 숙명이다. 한데 보면 모두가 또 한 고집한다. 어린아이라 그런가 하면 청소년시절에 더욱 그러하다 청년을 지나 장년이 되어 노년이 되는 과정에서 이는 가히 완고하여진다. 그런 가운데 오늘 욥의 표현과 같이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1).” 하는 날이 느닷없이 턱밑에 다다르는 것이다. 기운은 숨, 호흡을 뜻하는 것으로 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고통이 극에 달한 것을 볼 수 있다. 꼭 병에 걸려서이기 보다 사느라 사는 동안에 그와 같은 시달림이 가혹하기만 하다.

 

더욱이 교회도 편중되어 어지간한 개척교회 목사로는 생활이 어렵다. 말씀 전하는 본업을 잠시 내려놓고 각기 살 궁리를 하다 다시는 말씀 전하는 자로 서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어느 목사는 교회 월세 내기도 벅차고 두 딸을 공부시키느라, 가족들끼리 가정교회로 우선 돌리고 친구 정육점에서 일하다 나이가 들고 병에 걸려 더는 말씀 전하는 자로 서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럴 때면 나도 주춤한다. 말씀 붙들고 ‘살든지 죽든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를’ 바란다는 마음은 망상일까? 사느라 빠듯한 주변 목회자들을 보면 뭐라 위로의 말이 어렵다. 어젠 누가 당장 5백만 원이 필요한데 혹시 되는가? 하고 오죽하니 나에게까지 물었다. 마음이 어려워 내 차 중고차 시세를 알아보고, 아내에게 어찌 말을 꺼내볼까 하다 그러지도 못했다.

 

다들 너무 사는 게 어려워서 ‘기운이 쇠하였다.’ 이에 말씀은 더하여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하고 역경과 고난을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신다. 심지어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 그러니 누구의 사정을 듣고 이와 같은 말씀을 들어 뭐라 이르기도 어렵다. 한데 성경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이는 그저 함축적인 의미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가 기운이 쇠하였을 때 이를 어찌 감당해야 할 것인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그리하여 성도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이와 같은 생의 역설이 우리로 증거가 된다. 누군 헌금부터 줄이는데 누군 오히려 ‘풍성한 연보’로 분수에 넘치기도 하는 것이라…. 곁에서 누가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고,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이를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낸다.

 

각각 주신 마음에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겠으나, 사역이란 내가 원하는 목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목회로 나아가야 한다. 어쩌면 우리 목회자는 자신의 문제에는 수동적이고 하나님의 일에는 능동적인 사람들이다. 생의 어려움이 우리의 유약함을 실감하게 하고 이로써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이다. 성숙한 신앙은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주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겠다. 늘 우리 앞에 두 갈래의 길이 있는 것 같다. 이리로 갈 것인지 저리로 갈 것인지, 한 길은 넓고 평탄하나 한 길은 협착하고 좁다. 주님은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누구처럼 후에 두 딸을 다 키우고 이제 교회에만 전념할 수 있겠다 했을 때 덜컥, 대장암 판정을 받고 병마와 씨름하다 끝내 ‘구하여도 못하는 자’로 생을 마감하였다.

 

욥의 비통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사느라 힘에 겨워, “나의 날이 다하였고” 어느새 나이 들어 병들고 힘에 부쳐서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1)” 죽을 날만 받아놓은 생이 허다하다. 늦게 된 자로 나는 늘 막다른 길, 막장에서 산다. 그러한 마음으로 결국 주의 부르심에 응하였고, 누구의 지적처럼 목사 같지 않은 목사로, 교회 같지 않은 교회를 이루고 간다. 이들의 말은 마치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2).” 오늘 욥의 절규하는 심정으로 살게 한다. 할 때에 저의 전환은 주께 호소하는 것이었다.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하고 주께 호소한다(5). 이 또한 “하나님이 나를 백성의 속담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6).” 때론 가장 가까운 이의 말이 가장 야속하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어찌 그러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 하시는 주의 말씀의 의미로 받는다. 그저 사느라 사는 데 여념이 없는 삶이 아니라, 항상 말씀 준비하고 말씀 전하는 자로 살다 갈 수 있기를. 이제는 더는 남은 생을 헛된 데 마음 두지 않고 살 수 있기를. 이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부디 이와 같은 길에서 어그러지지 않기를. 다시 우회하는 일이 없기를. 누구에게 그리 당부하다 그 말이 나의 다짐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그러니까 이번 생으로 끝이라면 어떻게든 뭔들 못하며 살까? 어느 목사의 말처럼 뭘 해도 이만큼 못 벌고 살겠나? 싶은 심정이 날마다 요동친다고 하니…. 나는 저의 심정을 누구보다 알 것 같아 점점 더 할 말이 없어 괴로웠다.

 

우린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 오늘 욥이 새삼 지적하는 듯하다.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2).” 그러니 우린 무엇으로 사는가?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7).” 낙심하여 비통함으로 생을 다할 것인지? 오히려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9).” 의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증거로는 꾸준히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손을 깨끗이 하여 새 힘을 얻는다. 나의 의지나 어떤 노력을 쥐고 씨름하기보다 손을 펴고 비벼서 깨끗하게 함으로 주께서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가끔은 이만하면 됐다, 여기까지여도 좋다, 하는 마음으로 하루씩을 산다. 한 걸음씩을 뗀다. 새벽 일찍 눈을 뜨면 교회로 나온다. 나의 하루는 아침이 가장 길다. 두세 시간 넉넉하게 말씀 앞에 앉아 묵상글을 썼는데도 아침이 오지 않았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는 것, 더도 덜도 말고 이 시간 같이 마음이 평온하고 주가 함께 하심을 가까이서 느끼며 살 수 있기를. 고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때로는 애매하게 고난 중에 있을 때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19).” 여기까지만 이렇듯 여기까지만… 하고 산다.

 

우린 곧 다다라서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14).” 하며 생의 끝에 모두가 서게 되는데,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15).” 하는 한탄으로 얼룩진 인생으로 끝이 나지 않기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결코 우리 삶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 답을 얻기도 한다. 예수님은 항상 비유로 말씀하셨고 모두가 익명으로 하셨는데, 달리 저이 이름만 콕 짚어서 ‘나사로라 이름하는’ 하고 명명하신 이유가 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눅 16:19-21).”

 

익명의 ‘한 부자’와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가 대비된다. 누구라도 한 번 사는 인생에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하는 축에 들고 싶지 않겠나? 그러나 성경은 이를 명확히 하여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되돌릴 수 없는 어리석음이 여기 있다.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잠 28:11).”

 

하면 우린 어느 쪽인가? 고작 1, 2년 전만해도 집을 몇 채 장만하여 부러움을 사더니, 요즘은 ‘부자거지’가 판친다. 가족 수대로 아파트 한 채씩을 가지고 어느 상가도 매입하여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더니, 채 한두 해 사이에 늙은 부모의 등골을 빼먹고 근근히 사는 형국이 된 이도 있다. 그러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우린 저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간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이 말씀을 여러 번 되뇌게 하는 시절이다.

 

나사로가 한 일이 무언가? 저는 그저 거지였다. 것도 헌데를 앓고 개가 와서 그를 핥는 비통한 삶이었다. 여느 비유의 말씀처럼 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로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질 뿐이다. 거지여서 천국 가고 부자여서 지옥 갔다는 말씀은 아닐 테고… 나사로라 하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만 바란다’는 것이다. 저는 비록 거지로 병자로 남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이나 주워 먹으며 연명하다 죽었으나 주신 생을 인내하며 다하였다. 스스로 비관하여 목숨을 끊지도 않았고, 누굴 원망하거나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일체 저는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맡겨진 생을 다하였을 뿐이다. 훗날에 아브라함의 전언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 16:25).”

 

이를 바울의 설교로 연장하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린 지금 이 순간 어느 법 아래에서 살고 있는지? 하여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고로 버릴 게 없는 생이란 이런 것이다. 이를 알면서 장기기증에 시신기증까지 다 해두고 산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우리도 그와 같아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이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시 15편, 전문)

 

오늘 시편은 한 호흡으로 읽어야 제 맛이다. ‘주의 장막’은 교회로 주의 언약궤가 머무는 곳이고, ‘주의 성산’은 그 장막이 있는 시온을 가리킨다. 이에 오늘 우리의 고난은 대수로운 게 아니어서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후 1:5).” 어찌 그런가했더니 환난이 없으면 주를 바라는 마음도 희박해진다. 희한한 일이지만 우리가 생겨먹은 게 그런 죄의 속성을 가지고 산다. 하여 우린 그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게 한다. 삶을 올곧게 그 마음에 진실을 선포하며 산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2).

 

곧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이것이 우리 모두의 사역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생겨먹은 게 그러해서 수만 번을 다짐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니 삶이 따라야 한다.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3).

 

그리하여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곧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 5:10).” 이는 우릴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그래서도 서원한 것을 굳게 지켜야 하는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4).

 

이 마음을 지키려면 망령된 자들과 같이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전 5:6).” 생각해보면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세례를 받으면서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었다. 그리고는 대수롭지 않게 살았는데 하나님은 기필코 이를 찾으셨다. 지금 와 생각하면 어린 게, 가장 잘한 짓이었다. 그리하여 악한 직업을 갖지 않고 살게 하셨다. 내가 미처 알지도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보호하셨다. 지금은 그 일들이 선명하고 확실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4: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