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욥기 14:1-3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7
친구들로 인해 욥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 도저히 하나님의 적수가 될 수 없는 자를 어찌 대적하시는지…(13:20-28), 그러한 인생이 참으로 덧없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대상도 아닐 것을 오늘은 다섯 가지로 밝힌다. 첫째, 인생의 날 수가 너무 적다. 둘째, 그 날들로 괴로움으로 가득하다. 셋째, 꽃이나 풀 같이 인생은 잠시 피어오르다 시든다. 넷째, 그 인생은 그림자 같이 지나간다. 다섯째, 인생의 날 수와 달 수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정하신다.
그러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기를(1-6), 인간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 소망이 없음으로(7-12), 자신은 오늘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견디겠다는(13-15), 하지만 그마저 허락하지 않으시면 고통만 기다리고 있을 뿐임을(16-22) 호소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욥의 기도는 한 편의 시이면서 인생의 교훈을 담은 잘 짜인 산문 같다. 첫 구절부터,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1)” 곧 우린 모두 여인에게서 난 연약함을 강조한다. 우린 누구나 하나님의 적수가 될 수 없다. 그러한 자신을 고통 중에서 놓아주시기를.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것이다.
곧 우리의 지혜란 자신을 바로 인정하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 9:23).” 하여 우린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 40:6-7).”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인정할 줄 알 때 겸손할 수 있다.
언제든지 우린,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 이를 아이와 통화에서 저를 축복하고 기도하며 말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아이를 처음 만났으니 오랜 시간을 같이 한 셈이다. 그때마다 아이는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였고, 글방에서 교회로 선생에서 목사로 함께 지나왔다. 회계사 2차 두 과목을 남겨두고 있고, 이번에는 금융감독원에 합격하였다. 그와 같은 기쁨을 같이 하며 나는 우선 전화로나마 함께 감사 기도를 하였고, 위의 말씀을 덧붙였다.
행여 이것으로 다가 아님을… 대학을 붙었을 때도 공군에 합격했을 때도 이르며 자중하게 하였다. 인생은 고난을 겪는다. 고난의 목적은 분명하다.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행여 오늘의 기쁨이 자신을 방심하게 해선 안 된다는 말로 당부하였다. 우리가 주를 바로 믿으며 따른다는 것은,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11:27).” 이와 같아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시 55:1-3).
마치 이제 다 이룬 것 같을 때 그때부터 시작인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였다. 늘 그때마다 따르는 아이라 주께서 보상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말이 쉽지 군포에서 여기까지 주일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것도 안 믿는 가정에서 부모들의 그만했으면 하는 눈총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킨다는 일이…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3-34).”
우리가 지날 때 ‘화양연화’ 같은 시절이 있는 듯하나 지극히 짧아서 세월을 아끼라는 것이 성경의 격언이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그러므로 안 믿는 세상에 속해 살고 있지만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 4:5).” 그래서도 성경 곳곳에서 인생의 한 때를 꽃으로 많이 비유하고 있으니,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03:15-16).
하여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사 28:1, 4).” 곧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과 같이 꽃의 아름다움도 십일에 지나지 않듯이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약 1:11).” 또한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다소 이런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시절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서도 더욱 이를 강조하였던 것 같다. 어렵고 힘들 때 주를 찾는 것보다 즐겁고 행복할 때 주를 바라는 것이 더 힘들다. 열에 아홉이 좋은 시절에 주를 떠난다. 종종 나는 농담처럼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로 비유하곤 하는데, 세상은 참으로 교묘하여서 뻐꾸기란 녀석은 슬그머니 남의 둥지에 알을 가져다 놓고 이것이 깨어나면서부터 뻐꾹 뻐꾹 그 곁에서 울어댄다. 이를 듣고 자란 녀석은 날개를 펄럭이다 활개 치면 둥지를 떠나간다. 앞서 몇몇 선배들의 그러한 모습을 같이 보며 안타까워했던 터라, 저는 어떠할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러므로 우린 주께 간구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90:12).
누구라도 그럴 테지만 나는 이별을 유난히 어려워한다. 차라리 먼저 떠나야 살 것 같아서 연애도 사랑도 그렇게 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 목사가 되었으니 이젠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한다. 죽으나 사나 나는 이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란 걸, 애써 좀 자랐다 싶으면 훌쩍 떠나보내야 할 때는 황량한 마음을 부여안고 주만 바라며 울 때도 있다. 지금도 누구누구를 생각하다 눈물이 먼저 핑, 돈다. 정들면 지옥이란 말을 나는 늘 실감하며 살았다. 나는 오늘 욥의 기도에 절로 고개를 숙인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4).” 나 같은 자는 셈할 가치도 없는데 주가 어찌 사랑하시는지….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55:6-7).
가끔은, 아주 가끔은,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그리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이를 위하여 성육신하여 예수께서 오셨다. 간간히 거리에서 캐럴을 들으며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온 것을 느낀다. 이 날은 우리의 거듭남과 연관이 있어서 성탄절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다. 이를 사도 요한의 설교에서 들을 수 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5, 8).”
이 두 구절에 성탄절의 의미와 목적과 이유가 모두 담겨 있다. 우리 죄를 없애려고, 곧 마귀의 일, 죄을 멸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났다. 그러므로 저의 성육신은 우리의 거듭남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곧 성탄절이 없다면 우리의 거듭남도 없다. 이는 긍휼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뤄진 가장 놀라운 일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2).”
보라! 하고 요한은 갑자기 불러 세워 우리로 멈추게 하고 보라고 한다. 무엇을 말인가?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을 말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부를 때 우리는 비로소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과 같은 대목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 역사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오늘 본문의 욥의 기도에서 새삼 우리의 한정된 시간을 생각한다. 아주 잠깐씩 느끼는 만족함과 기쁨에 도취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여 좋을 때 자칫 주를 멀리하고 떠날 수 있음을 아이에게 먼저 축하하며 알린 것이다. 우리에게 권하시는 말씀으로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6-17).”
내가 한 건 없지만 함께 했던 시간동안 함께 바라고 나아갔던 방향에서 누구도 어그러지지 않기를.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12:1).
오늘 시편의 첫 구절이 나의 마음이 함께 들던 노파심이었기를.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서로 각자 주를 바라는 것이지만 부디 우리에게 주신 거듭남의 역사가 소진되지 않기를.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3-4).
세상이 권하는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신 32:6).” 지나간 아이들이나 같이 시작했던 누구를 생각하다 종종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가슴이 먹먹하여 주를 부른다. 그게 나였고, 너무 먼 길을 돌아야 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한 영혼을 마주할 때마다 조마조마한 것으로 나는 병이 났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0-11).” 고로,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5).
오늘 아침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나의 가련한 눌림과 탄식을 아심으로 나로 안전한 지대에 두시리라. “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출 9:5).” 모든 게 다 때가 있고 기한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6)
곧,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7).
주가 행하신 일이고 행하시는 일이며 행하실 일이다. 결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이를 지키시려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이고, 이로 인하여 나를 거듭나게 하신 것이 그 목적이며, 나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실 것이 오늘 내 안에 두신 ‘착한 일’이었으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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