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 23:8-10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편 21:13
때론 오도 가도 못할 섬에 갇힌 듯하다. 앞으로도 뒤로도 하나님이 아니 계신다.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그를 뵈올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올 것이다. 하는 욥의 고백 앞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나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이 있어,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 21:13).
하는 찬양이 저절로 흘러나오기를. 나를 향하여 수많은 ‘엘리바스’가 말한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과 평안하라.’ 그러할 때에 나는 그러한데 저들은 아니라고 하니(1-2), 현실적인 고통의 혹독함보다 더하다. 그래서 욥도 자신은 하나님을 바란다고 호소한다(3-5). 하나님이 자신으로 변론하게 하실 것을 확신한다(6-7).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자신의 부르짖음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탄식한다(8-9). 그럼에도 이 모든 게 주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그리하여 자신은 단련되어 순금같이 나올 것이라 확신한다(10).
하여 욥은 더욱 바른 길을 향하고,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려 한다. 곧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긴다(11-12). 이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하는 저의 확고한 믿음이 저로 새 힘을 더한다(13-14). 하여 저는 더욱 더 주를 경외하며 지각을 얻어,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16).” 이를 인정함으로, 비록 지금의 혹독한 어려움으로 두렵기는 하지만 ‘흑암’이 자신을 가리지는 못하게 할 것이다(17).
곧 우리가 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이를 인정함으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주신 삶의 현실에 순응하고 순종한다. 우린 누구도 스스로가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많은 종교가 신을 찾아 나선다면 우린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마주한다. 해서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저주는 ‘거리낌’이다. 같은 십자가를 두고 서로는 갈린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우리로 이러한 미련함에서 해방하신 것이 구원이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 14:13).” 곧 나를 공격하는 ‘엘리바스’는 수시로 일어나는 것 같지만 저의 비난과 박해는 지나가는 바람과 같아서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사 45:17).” 이를 확신함으로 앞으로도 뒤로도,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 만날 길 없는 것 같은 하나님의 부재가 실은 항상 내 안에 충만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받은 가장 귀한 은사는 “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그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오늘 욥의 확고함이 그러하다. 저의 것만이 아니라 오늘에는 나의 것이 되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7).” 이를 어찌 설명할 길 없으나 확신하고 사는 삶이어서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9-10).”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나의 마음이 주의 즐거움으로 충만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이는 이미 앞서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8-9).”
이는 현재진행형이고,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
이는 미래지향적인 일이다. 곧 우리로 이미 구원을 얻게 하셨으며 얻어가게 하시고 얻을 수 있게 하심인데,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9).” 곧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나의 정체성은 날로 날로 분명해진다.
욥은 이를 스스로는 할 수 없다는 데서 인정한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욥 23:3).” 그러나 이를 인정함으로 알게 하시는 것,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17).” 오늘의 나의 바람과 고백도 모두 아버지가 알게 하신 것이다. 이를 인정하시는 데서 시작한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그리하여 누구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을 것인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2).” 이 놀라운 은혜요 은사인데도 이 문이 그리 좁고 협착한 길인가보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0:14).” 아무리 애원하고 구하고 바란다 해도, 우리는 어느 하나도 구원할 수 없다. 다만 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일 뿐인데,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이는 부부 사이라 해서 부모자식 간의 일이라 해도 주가 하시지 않으면 모든 게 다 허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구하고 또 바랄 뿐이다. 하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나는 내 의지로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때론 현실적으로 부딪치고 그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이어서 주입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어 다만 주를 더욱 바랄 뿐인데,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아, 이와 같은 말씀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 그 섭리 가운데 살면서… 나는 동생 일로 마음이 어려웠다. 자신들 살 궁리를 하나도 한 게 없이 고스란히 맨몸으로 갔다 맨몸으로 돌아온 것인데, 현실적으로는 당장의 시간을 견디는 데 있어 대부분이 외국인노동자들이 많은 어느 공장에서 아침부터 늦게까지 일을 한다. 당면한 현실로는 이게 뭔가? 싶다. 하나님도 참 너무 하신다 싶어서 어떤 서러움이 또는 억울함이 괜히 내 안에 불쑥불쑥 차오르는데, 서로의 은혜가 지나온 날들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었다. 예수님은 일러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결국 주가 책임지실 것이다.
욥의 확신과 같이 비록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8-10).” 하는 차원에서 더 들어가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설령 그대로 죽이신다 해도 주를 신뢰할 수 있는 우리의 구력! 이 놀라운 능력이 우리 안에는 있었으니,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나는 아이에게 슬그머니 얼마를 쥐어주며 부디 내가 어릴 적에 느꼈을 어떤 처참함과 의심의 시간이 그리 크지 않기를…. 나는 그 지겨운 가난이 싫어서도, 사람들의 외면과 숱한 ‘엘리바스’의 눈총이 역겨워서도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려 그리 몸부림쳤었는데… 어느 훗날 오늘 이 어려움이 저 아이에게도 훈장이 되고 감사와 찬송이 되기를. 주를 바라는 회상과 확신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누가 우리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다 알 수 있겠나만… 주는 사랑이시라. 저는 인자하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자비하심을 알고 있기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143:10-11).
곧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하면,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21:1).
주의 힘으로 기뻐하고, 주의 구원으로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능력이었다. 이에,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
(2).
우린 이를 안다. 그래서 기도할 뿐이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34:6).
나는 이를 살았다. 사는 동안에는 알지 못하고 오히려 주를 멀리기도 하였으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91:14).
우리에겐 이와 같이 우리도 알지 못하는 힘이 있다. 주의 권능이 있다. 그리하여,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21:3-4).
그저 이 땅의 삶으로 전부라면 우리보다 못한 이가 또 어디 있을까만, 욥은 알고 있었고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다윗도 알고 있었고,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바울도 알고 있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하면 그것이 오늘 우리의 것이라는 데 안도한다. 우리 안에 주를 바라는 확신을 더하심으로 됐다. 아무래도 괜찮다.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21:5-6).
주는 우리로 그리하실 것이다. 이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도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마치 욥의 진술과 같이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그렇게 필리핀으로 갔다 15년을 감당하고 그렇게 돌아오게 하신 것이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 곧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실 터,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7,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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