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욥기 24:23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편 22:9-10
현실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 같은 때의 탄식으로, 욥과 시인의 탄식이 절절하게 울린다(1). 그 부조리한 현실로 탄식하게 됨은 당연하겠다(2-12).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2:1).
하고 시인은 탄식하고,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1, 15).
하고 탄원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이와 같은 의심은 내적인 것이다. 외적인 요인은 세상을 사는 동안 불가피하겠지만 우리 안에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찌 참고 견디고 있는지를 되묻게 하는 것 같다. 그렇듯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우리의 싸움은 결국 내 안의 문제이었다.
누가 물으며 동생 일은 어찌 되었는가? 궁금해 하였다. 송사에 휩쓸린 것도 15년 선교생활도 빈 몸으로 갔다 빈 몸으로 돌아온 셈이었으니, 어떠한가… 하는 호기심을 자극할 만하다.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마음이 어려운데, 그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도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누군 항상 개의치 않고 자기 일에만 열중한다. 여러 의심이 그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은 일러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
이 두 경우처럼 우리 마음엔 의아한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욥도 되뇐다.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이 답을 하지 않으시면 인생의 쓴물이 올라온다. 그러나 성경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하시며 기다림을 요구한다. 우리의 기다림은 신앙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어떤 답을 얻기까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그럴 때 우리로 인내하게 하는 유일한 힘은 기도다. 기도는 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 우리 아버지는 이를 오히려 기다리신다. 그러는 동안 경계가 있고 여한이 있다. 할 때에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 1:19).” 곧 우리의 기다림이 어떤 조건에 의한 것일 때 조바심이 활개 친다.
또 하나 우리의 기다림을 용이하게 하는 것은 무던한 준행으로 이룬다.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잠 31:20).” 곧 우리의 현숙한 신앙은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72:13-14).
그러니까 답은 우리가 주께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는 확신.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사 56:1).” 그럼 우리의 정의란 무얼까?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곧 우리의 자랑은 어쩌면 하나님의 침묵 중에 참음과 기다림으로 얻는 응답이 된다. 단적인 예로 욥의 경우, 12절에 보면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곧 왜 하나님이 외면하고 침묵하고 계시는가, 우리로 조급하게 하는 때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약속을 붙들고 길을 떠난 지 25년이 되어서야 답을 얻는다. 그러는 동안 저의 시행착오와 나름의 시도는 오히려 저를 좌절시킬 뿐이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어떤 조바심으로 내적갈등은 주를 의심하게 한다.
한데 성경은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그러니 믿고 의지할 것인지, 튕겨져 나가 뭐라도 시도할 것인지… 사모 내외는 개척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았다. 가정예배도 드리기 시작하였다고 모처럼 반가운 소식을 알려왔다. 그런데 더는 진척이 없다. 미적거리는 틈을 타서 양가의 온갖 대소사가 끝이 없이 벌어진다. 그래서 못하는 것인지, 안 하고 있으니까 그러는 것인지 저이는 궁금해 하였다. 나는 과감하게 내딛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엉거주춤 망설이는 동안에는 끝이 나지 않는다. 이래도 할래? 이 지경인데도 할 수 있겠어? 하고 사탄은 연거푸 묻는다. 어떻게 해야 해요? 하고 묻길래, 나는 단숨에 말했다. 죽기 아니며 까무러치기야! 이에 따른 성경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뭉개고 망설이다 나이만 들고 병이 들어 더는 갈 수도 없는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리 말해주면서 그 길이 얼마나 고단하고 무서운지… 나는 덜컥, 목사고시를 끝내고 안수를 받고 난 뒤에 알았다. 마치 원폭의 현장에 서 있는 것 같이 모든 게 다 사라진 듯 아무도 내 곁에 남지 않았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라니! 나는 하라는 목사만 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늘 끊이지 않던 글방 아이들이 사라지고, 기껏 예배를 같이 이루고 오던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외면하고 떠나갔다. 어떤 황당함! 이게 뭐지? 싶은. 그때의 말씀이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꼬박 2년을 혼자 들어앉아 수업도 없는 글방과 교인도 없는 교회를 지켰다. 그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게 뭐죠? 하고 주께 묻는 똑같은 질문과 할 게 없어서 보고 또 보는 성경과 앞선 이들의 기독서적이었다. 그때 내 곁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와 오스왈드 챔퍼스 목사가 없었더라면 나는 누구와 함께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을까?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린다.’ 이 모순된 문장 하나가 나의 의문점의 출발이었고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답이었다. 그때도 늘 괴롭히던 마음이 ‘뭐라도 해!’ 하는 조급함이었다.
마치 여호수아의 갈등과 같이 ‘요단을 마르게 해주시면 걷너겠습니다.’ 할 때, ‘네 발을 내딛으면 마른다.’ 하고 하나님과 저의 견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나의 2년, 그리고 여전한 오늘에까지… 같은 대답은 여전하여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버려진 어둠이 확연하다. 더는 찾지 않는 어둠을 나는 이제 확인할 수 있다. 그때는 맞았고 이제는 틀리다는 확신.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말씀 그대로 나는 누구에게도 감히 말하기를, 정신 차려! 하고 저를 흔들어 깨우는 심정으로 말하였다. 밀려가면 끝도 없다. 엎친 데 덮치듯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눈 온 뒤 서리까지 내리는 경우라 연신 콜록거리며 몇 달째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로 동분서주하는데도 일이 끝이 없다. 그러니 아주 간간히 가정예배가 시작되었고, 개척을 하기로 했다는 것 외에 늘 같은 자리를 맴돈다. 그렇듯 두 사람이 예수께 왔다. 주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눅 9:59).” 하고 먼저 할 일을 고하자,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고 예수님은 거두절미하고 말씀하셨다(60). 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61).” 하고 먼저 일처리 할 걸 아뢴다. 그러자 이번에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주의 길을 따라 간다고 할 때,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게 있어서 ‘그것만’ 하고 따라야지 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니 때론 말씀이 참 가혹하게 느껴진다. 그럴 때 또 성경은 거두절미하고,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결국은 마음의 문제, 내적인 문제인 것이다. 우린 마치 그럴 수밖에 없는 외부적인 이유를 들지만 말씀은 이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순간 감추고 있던 마음을 들킨 것 같다.
욥은 이를 하나님의 일로 그 권능으로 보존하사 살게 하심을 고백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22).” 우리 안이 강포함은 ‘내 생각’이다. ‘우선하려는 마음’이다. ‘앞서는 결정’이다. ‘이 문제부터 해결하고’, 하고 난 뒤에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래도 갈래?’ 하고 발목을 잡는다. 자주 언급하지만 나의 인생은 그렇게 한 번 붙들릴 때마다 10년 세월씩 훅훅, 지나 87학번에서 97로, 97학번이서 도로 09학번까지… 세월은 참 유수(流水) 같아서 급격한 탁류에 휩쓸리면 정신없이 흘러간다. 쭈뼛거리다 나이 마흔, 쉰, 예순 금세 간다. 그래서도 감사한 게 고난이었다. 자빠져서 생각하는 것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119:67).
하여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내친걸음이면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리 작정하는 마음을 주셨다면 이제부터 상대는 하나님뿐이다.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나의 도움이 아니다. 설마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민 32:23).” 아내도 자식도 주가 맡기신 한 영혼으로 ‘내 양을 먹이라.’ 하신 그 대상이다. 심지어 나를 다루는 일에서도 ‘내 양을 치라.’ 하심이었다. 누구를 대할 때 저를 친구나 잘 아는 사이로 상대하면 영락없이 나는 저를 의지하고 싶어진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심을 연거푸 말씀하신 덴 그 이유였다.
우리의 영원한 유익, 이를 욥의 말로 들어보면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24).” 별 수 없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나는 그래서 누구에게 들려주는 말씀을 고스란히 내 영혼을 향해서도 외친다. 그렇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하고 액자에 적어두기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2).” 내가 상대할 적은 늘 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22:2, 6).
오늘 시인의 아룀을 따라서 입에 머금는다. 마치 주에게까지 천대를 받으면서도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 15:27).” 이와 같은 절실함으로…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8).” 우리의 소원은 어떤 응답이나 소원을 이루는 데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를 바라는 것, 바랄 수 있는 것. 어떻게?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9-10).
주 앞에서 물러설 수 없는 이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러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여 나는 누구에게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해!’ 하고 더는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다. 괜히,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5).
그런 심정으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일이어서, 자꾸 미적거리는 남편 목사만 바라보지 말라고 말해버렸다. 말을 해버린다는 것, 내친걸음과 같이 때론 우리의 순례는 같이 가는 길이 아니었다! 이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한 마디로 알아서 하시라, 다 맡겨버리는 것. 말해버리는 것과 맡겨버리는 것, 이 둘의 같은 점은 딛고 난 뒤 남은 걸음을 더 이상 내 걸음이 아니다. 우린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2:16-17).” 이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4).
그러므로,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2-23).
그렇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8-9).” 그리하여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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