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25 주일
시편 116편
성육신과 거듭남
시 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들어가는 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성탄절 아침, 성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축복의 날이다. 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기쁨의 날로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하고 주의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이를 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이를 위하여 성육신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로 이 땅에 오신 날이다.
사도 요한은 이를 설교하며,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5, 8).” 성탄절,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신 것이다. 마귀의 일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죄로 인하여 우리로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성탄의 의미와 목적을 바로 알고자 한다. 앞서 요한의 설교에서처럼,
첫째, 사탄을 멸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다.
둘째, 저의 성육신은 우리의 거듭남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는다.
셋째, 성탄이 없었다면 우리의 거듭남도 없고, 우리의 거듭남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다시 요한의 설교를 덧붙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즉 오늘 우리가 누리고 느끼고 축하하는 성탄은 세상이 흥겨워하는 그런 의미와 목적이 아니다. 곧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2).” 우리로 이를 소망하게 한다. 그래서 바울은 “…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즉 오늘 우리의 즐거움은 이와 같아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역사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하고 바울이 강조하는 바도 이 때문이다. 곧 성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정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하는 각각의 설교가 서로 하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날은,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바로 그 날이다. 그러므로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하고 아주 확실한 증표로 삼으신 날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 1:5).” 곧 천사들에게는 이와 같이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우린 천사가 아니다. 저들은 우리를 섬기는 자들로,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14).”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은 영에 속한 천사보다 조금 못하지만 이는 잠깐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의 일일 뿐이다.
정리하자면 ‘죽었던 나를 살리셨고’, ‘주의 자녀로 삼으셨고’, ‘이를 알게 하시며’, ‘장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소망을 갖게 하셨다’. 곧 장차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완벽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성탄은 우리로 거듭나게 하심으로 확실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날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곧 오늘 저가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예수’란 이름도 없었을 테고,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하는 놀라우신 구원의 역사도, 우리의 거듭남도 없었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6-57).” 하신 말씀과 같이 날마다 주의 ‘살과 피’ 곧 말씀과 기도로 먹고 살면서, 성령은 주의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오늘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정당한 축제로 우리는 이를 누릴 권세가 있다. 이를 좀 길지만 요한 사도의 설교로 다시 들어보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0-12).” 아멘.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할렐 시로 네 번째 시이다. 이를 마침 성탄절 할렐로 들을 수 있다면 7절 말씀과 같이,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하는 찬송이 13절과 16절의 뒷받침으로 성탄의 의미로 적합하고 아름다워진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3).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16).
이것이 각 구절마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하는 부분을 연결되면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결박을 푸셨으므로,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평안함으로 돌아가리라.’ 하는 결론의 주제를 받을 수 있다.
성탄의 의미는 ‘사람이 되신 성육신’과 성탄의 목적은 ‘우리로 거듭나게 하심’이다. 이 엄청난 역사적인 사실과 영적인 의가 오늘 시편에 내포되어 있다.
시적구성은 3연으로 나누어, 1연(1-2절)은 기도 응답을 받아서 평생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라는 것과 2연(3-9절)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는 당연히 찬송해야 한다는 것과 3연(10-19절)은 같은 기도와 찬양이 서원의 결단으로 드려지는 삶이어야 마땅하다고 촉구한다.
1. 기도 응답을 받으며 평생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자(1-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2).”
시편으로 산다는 일은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116:1-2).” 하는 선언의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이것이 우리 믿음의 정의다.
곧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착한 일, 곧 거듭남의 구속과 구원의 역사는 우리로 기도하게 한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하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언약이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하는 삶의 현장에서 이와 같은 증언이 우리에겐 있어야 한다(욘 2:7). 그래서 우리는 기도함으로 주를 사랑함을 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1).”
2.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살자(3-9).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7).”
우린 우리 영혼에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지난 주일에도 전한 바 있듯이 ‘우리의 불행은 우리에게 선포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오늘 시편은 다시 외치게 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8-9).” 공부하면서 또는 직장 일 중에, 어려운 가운데서 우린 우리 자신에게 외친다. ‘할 수 있다!’ 그렇듯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3-4).” 우린 기도한다.
저는 누구신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5, 6).” 이는 성경이 우리에게 그래도 된다고 하신 일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이와 같은 약속이 있다면 더는 흔들릴 게 없지 않을까?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이 놀라운 은혜의 약속이 우리의 권세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이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50:15).” 성경의 약속이고,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116:5).” 하는 오늘 시인의 세계는 그래도 된다고,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우리에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반드시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이와 같은 약속은 천지의 주재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이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오늘까지 우리가 사는 증거다.
3. 날마다 매순간 우리는 찬양과 서원으로 결단한다(10-19).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12-14).”
어느 날 우린 죽었다. 그리고 그 날 우리는 영생을 얻었다.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제 우리가 사는 이유도 목적도 변하였다.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시 116:10-11).” 세상의 위선과 아집을 이제는 안다.
그러므로 바라는 소원이 달라졌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12-14).” 이와 같은 결단과 의지는 누구의 강요로 되지 않는다. 세상 믿을 거 없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부디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 118:8-9).” 하여 오늘 시편의 세계도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116:15).”
날마다 내가 죽노라, 하는 바울의 증언처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는 오늘 시편의 찬양처럼,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시 116:16).” 거룩한 성탄의 의미와 목적이다. 이에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7).” 하는 찬송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18).” 하고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삶으로,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19).” 하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나오는 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삶은 이론이 아니다. 신앙은 현실의 매순간이다. 우린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곧 오늘 성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세계는 우리로 주를 찬송하게 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이것이 우리의 결말이고 영생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오늘 오신 예수께서는 훗날 우리의 대언자, 중보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당연하게 면책하신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늘 날 이스라엘과 무술림은 아들 예수, 성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 이름 없이는 ‘구원’도 없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이를 분명히 하고 성탄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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