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잠언 9:8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20
우리 신앙도 ‘더하기 빼기’인 것 같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무던한 묵상으로밖에 달리 알 길이 없다. 순간 알았다하나 지속적이지 못한 게 또한 사람의 속성이고, 한 번 뉘우쳐 회개하고 돌이켰다하여 더는 그릇 행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거짓되다. 우린 날마다 매순간 더하거나 뺀다. 말씀을 더하고 기도를 더하고 회개를 더함으로 몸에 밴 습성을 빼고 구습을 쫓던 옛 사람을 빼고 전에 즐기던 것을 뺀다. 더하거나 빼거나 해야 사는 것인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잠 9:9).”
오늘 이 말씀이 우리로 어떠한가, 가늠쇠가 되는 것 같다. 이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10).” 우린 방아쇠를 당긴다. 푯대를 향해 날아간다.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 그렇게 모으고 흩으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11:12).” 이는 저의 절대주권이시다.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에 대하여 때론 실망이 또는 좌절이 나를 주저앉히려 하나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 중심의 계획이 있으시다.
가령 나사로가 죽었다. 죽기까지 내버려두셨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호소한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 11:21, 32).” 그러나 주님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4, 11).” 곧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다르다. 죽음에 대한 개념도 서로 다른 것이다.
죽음이란 끝이 아닌 시작으로 영원한 삶으로의 연결점이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시 9:13, 17).
서로의 가는 길은 다르다 하나, 하나는 영생으로 하나는 영벌로 이어진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이에 잠언은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하지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5:3-6).”
즉 나사로를 죽게 두셨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 11:6).” 이는 그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심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시려는 데 의의가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40).” 결국은 해내셨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17:24).”
오늘 잠언은 이를 ‘지혜로운 여인’과 ‘미련한 여인’으로 비유하여 각각 저들이 우릴 부른다. 우린 그 앞에서 더하거나 빼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5-6).” 또한 같은 때에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7-18).”
어떤 일을 두고 우린 늘 크고 작은 선택을 한다. 갈등은 재촉하고 조바심은 몸을 강제한다. 이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가 선택에 앞서 오늘의 내가 여기 있는 은총을 알아야 할진대(고전 15:3). 십자가 없는 삶은 번번이 엉뚱한 데서 삽질이다.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욥 14:13).” 하나마나 한 시간을 보내면서 인생을 소비한다.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17:13-15).”
기껏 대화하고 말로 일러 성경의 뜻을 전한다고 전하는데도… 결국은 자기들 좋을 대로의 결정이라, 나는 자꾸 허무를 경험한다. 하나마나 한 소릴 또 해야 하나? 하는 의구심도 든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을 사모하고 사는 일이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앎으로 이를 알아버렸으므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곧 우리의 보화는 그리스도였다. 내가 알고 발견한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이이다. 저가 나를 충만하게 하실 것이다. 하면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 그리하여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12).” 나로 원하고 바라게 하시길 원하는 그것,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1-2).”
다 저녁에 차에 앉아 아내와 심하게 다투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는 것에 나는 분개하며 막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주는 다시 나를 누르시며, 오늘 장모가 우리가 함께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이를 준행하는 데 있어 우리가 안 믿는 저들의 강요와 선택에 휘둘리지 말 것을. 나는 말을 하다 쓰러져 잤다. 그러려니 하고 다들 내버려두고 싶다. 그러면서도 내적갈등은 내게 두신 직분이라서. 우리는 어찌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을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그러고도 매번 또 같은 자리다. 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러니 누가 날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할까? 나도 내 자신이 너무 힘들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나는 절규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사람으로는, 나의 의지나 인내로는 어려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곧 우리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시 49:5).
다 버리고 그만 도망치고 싶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55:6).
나는 영혼을 두고 씨름하는데 저들은 사는 일을 두고 악전고투다. 나는 일체의 도움도 어떤 바람도 원하지 않았다. 더할 것인가, 뺄 것인가? 저마다는 그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6-8)
이를 백날 말로다 설명한다 해서 전달될 게 아니어서,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신 31:6).” 하나님만 바라자. 스스로에게 말한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4:9).” 별 수 없다. 나로 주만 바라게 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늙으신 부모나 결국 재판에 넘겨진 일로 얼굴이 어두운 동생을 보며, 나는 속으로 자꾸 주께 물었다. 묻고 또 물어도 주는 답이 없으시더니 결국 다 저녁에 아내와 부딪쳐 다시 나는 쓰러져 잤다. 아, 이 삶의 무력함에 대하여.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9-10).
이 인생의 허무함에 대하여,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더하거나 빼거나… 우리 인생의 무차별적인 문제 앞에서 하나의 공식을 생각한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12-13).
우리의 결국이나 짐승의 결국이나… ‘아,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이는 사람이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일로, 내가 안달하고 지랄발광을 한다 해도 어찌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여기 이 땅의 삶으로 전부라면 우리의 소망이 어디 있겠나?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2).”
그런 게 아니라면, 이보다 더 서럽고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을 터.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3).” 다시 또 더하여 마음을 가다듬으며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부디 나의 개떡 같은 신앙과 구제불능인 속성을 내려놓으며,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다들 어떠하다 해도, 말씀으로만 말씀 안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이를 더하며 가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이에,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49:15).
하면,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119:5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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