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잠언 12:1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시편 52:8
너와 나, 우리의 관계는 아주 단순한 것 같으나 인격적인 말과 품행으로 형성되어 이를 하나하나 거룩하게 다듬어가는 것이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는 그 몸에 밴 습관이 따르고 습관은 곧 저의 인격이다. 잠언 첫 구절에서 이를 명료하게 밝힌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12:1).” 누구와의 대화 혹은 어떤 일에서 공감하는 일과 의견을 제시하는 일에서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
오늘 시편을 잠시 살피면 그 시적배경은 ‘도엑의 이야기’다. 다윗이 사울에 쫓겨 도망다닐 때 그를 도와준 아비멜렉과 그의 선지생도 85명이 도엑의 밀고로 몰살당했다(삼상 226-23, B. C. 1020년). 도엑은 사울의 목자장이었고 자신의 영달과 신분상승을 위해 다윗의 은신과 그를 도운 자를 밀고한 것이다. 다윗은 절규하듯 이를 시로 남겼다.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52:1-2).
저의 소행은 탐욕으로 인한 것이었다. 놉 땅에 숨어 있는 다윗을 마침 도엑이 발견하고 이를 왕께 고하였던 것이다. 저는 강포한 자이다. 포악한 자는 영웅을 뜻한다. 일찍이 다윗은 그런 자를 맞서 상대도 안 되는 골리앗 영웅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무찌른 바 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이는,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18:29).
이와 같은 용기는 하나님과의 공감 그 인격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믿음으로다. 이를 오늘 잠언으로 다시 묵상하면 교훈과 징계로 단련된 자의 굳건함이겠다. 마치 습관은 오랜 반복으로 몸에 밴 것과 같이 우리의 인격도 어느 날 뚝딱, 생겨난 게 아니다. 신앙은 이처럼 단련과 연단으로 빚어진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12:6).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를 위해 나는 자주 기도한다. 나를 일깨우지 않으면 덩달아 흔들리기 십상이다. 가령 장모를 모시게 되면서 이를 위해서도 여차저차 하여 집을 큰 데 옮기자, 구입하자, 하면서 누가 돕네 마네 엮이는 말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아내와 의견을 달리하고 기어이 나는 완강하였다. ‘있는 그대로, 두신 상황 속에서’ 하는 생각으로 누구의 도움도, 그에 따른 지출이나 도움도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아내는 서운해 하였고, 내 안에서도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그러다 나를 붙든 것은 말씀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심은 한 영혼이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노모를 모시는 일로 여겼으나 하나님은 이를 맡기심이다. 한 영혼이 때가 이르렀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음으로 그 시간을 우리에게 두신 것이다. 그리 생각되면서 나는 달리 일을 꾀하는 것에 마음이 어려워졌다. 누구는 호기라 하였고 이 기회는 그럴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오늘 잠언 3, 7절에서도 보면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악과 의의 차이는 간발이다. 간발, 아주 잠시 또는 아주 적음을 뜻하는 이 차이는 이내 벌어져 영영 좁힐 수 없는 간격이 된다.
즉 나는 한 영혼을 섬기는 것으로 이를 받아들였고 그에 따른 어떤 분에 넘치는 일은 그릇되다. 우리에게 미안해서 어디 집을 장만하고 그에 따른 도움을 주겠다는 호의는 마땅하지 않았다. 악은 의의 결핍이다. 의의 부재가 악행이다. 의란 하나님의 뜻이다. 만일 그러한 상황이었다면 하나님이 앞서 준비하셨을 것인데, 이제와 그와 따른 무리한 일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래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내는 오빠가 도와준다는데, 하는 말로 일을 밀어붙이려했고 나는 결국 그 의지를 꺾어야 했다. 그렇게들 무리하게 일을 도모하다 분에 넘치는 삶은 일장춘몽과 같았고 남은 것은 힘에 부치는 과도한 대출과 그에 따른 황폐한 영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사 57:20).”
악은 별개 아니다. 의의 부재다. 의는 주의 뜻을 따르고 결코 부당하고 무리한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주신 바 오늘 우리 형편으로 감당하길 원하셨고, 그런 가운데 맡겨진 일이다. 나는 주의 사명을 그리 이해한다. 가령 누구와 모처럼 통화했다. 저는 사역에 있어 이번에도 자기 뜻에 맞지 않은 부분을 두고 속엣 말을 풀어놓았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때로 나의 방식에 못마땅하다. 고작 이런 일이나 하라고 나를 세우셨는가? 하는 반감이 든다. 순간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를 두고 작정기도도 했다. 바라는 바를 구하였다. 그런데 또… 하고 저는 어려운 마음을 토로했다. 하나님과 다퉈보시라. 얍복강에서 야곱이 씨름했듯이 한 번 죽기 살기로 붙들고 늘어지라, 나는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부추겨 어찌 결판이 나는가, 꼭 알려달라고 하였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의와 악의 간발의 차이는 주를 신뢰하는 데 바탕을 둔다. 이에 엇나가면 악하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나는 일찍 눈을 뜨고 교회로 나왔다. 좀 더 넉넉한 시간을 앉아 말씀을 찾아본다. 나는 옳고 그름을 자신하지 않는다.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말씀이 뭐라 하시는지… 내게 주시는 마음은 어떠한지… 주 안에서 평안한지… 혹시 꺼려지는 게 없는지… 있다면 그게 무엇 때문인지… 신속하여 피하여 주께 구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16:1).
저는 그저 친정엄마 또는 노모이기 전에 주가 우리에게 맡기신 한 영혼이다. 나는 이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느라 아내와 한동안 다투어야 했다. 다툰 덴 우리의 생각이나 방도가 앞서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결국은 또 ‘나의 고집’으로 정리되고 ‘답답한 노릇’으로 결론이 난 것 같은데 상관없었다. 그저 나는,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17:7).
앞서 ‘영적 백신’을 맞았다. 하나님은 나를 불러 주의 길을 가게 하실 때 먼저 그 일을 당하게 하셨고, 그래도 꺾이지 않는 아집은 물리적으로 묶어두셨다. 주께 돌아와 주의 길을 가겠다고 할 때 느닷없는 파산과 공황은 나에게 실제 그런 의미였다. 내가 나를 좀 아는데, 안 그러셨으면 지금 이 길을 못 간다. 벌써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갈 데까지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모두가 고생이긴 한데 어쩌겠나? 나의 못난 자아가 이내 고집불통인데…. 나는 누구의 항거에 피식, 웃으며 굳이 말리지 않았다. 들어주지 않으실 기도를 죽어라 하고 해보는 것도 보람이 있다. 최소한 아집은 다 거덜 날 테니까.
다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내가 이제 주를 바람은 나로서는 달리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여지가 없다. 옴짝달싹 못할 때 순응을 배운다. 아니면 끝 간 데 없이 “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욥 15:35).” 사람은 본디 자신을 자신하는 순간 허튼 길을 딛기 마련이다. 나는 우리 형편에 맞게 우리 사정을 다 아시는 주의 선하심을 믿고 무던하기로 하였다. 이를 빌미로 어떤 이득을 도모할 생각은 없다. 그래서도 안 될 일이고…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141:4).
불로소득은 말 그대로 일하지 않고 얻은 이익이다. 이를 도모하는 것이 이를 도모하는 일 자체가 의롭지 못하다. 내 마음은 악에 기울기 일쑤다. 나는 선할 수 없다. 나는 선하지 못함에 대해 악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느니 주의 선하심을 바란다. 이를 먹을거리로 삼는 것이 지혜라는 사실을 알았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37:3).
내가 사는 동안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의로울 수 없다. 선할 수 없다. 악을 도모하고 이문을 바란다. 혹시나 하고 수시로 기웃거린다. 난들 의연한 영혼이면 좋을 텐데, 자꾸 뒤를 힐끔거리는 작은 여우 같다. 죄성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내 안의 경고등이 점멸할 때 눈치 채야 한다.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내 속엔들 어찌 이문을 탐하는 마음이 없을까. 그래서도 이처럼 단단히 붙들고 서는 것이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오늘 시인의 찬송처럼,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52:9).
내 안의 ‘도엑’을 안다. 혹시나 하고 수시로 고개를 든다. 기회가 되면 나 역시 도엑의 길을 갈 수 있다. 미연에 이를 차단하고, “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8).” 오늘 잠언은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하여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15).” 자 그럼, 어쩔 것인가? 교훈과 징계를 달가워할 리는 없고,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신을 미혹하느니라(26).” 매순간 선택의 문제다. 누구나 ‘도엑’이다.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28).” 주의 뜻을 바라고 또 구하는 수밖에.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64:4).
그렇다면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다른 길 없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52:6-7).
이를 알아보고 분별하여 주의 뜻에서 어긋나지 않기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러니 어쩔 것인가? 루터의 묘사처럼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닌다고 하나 그 새가 내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하는 것은 죄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밝힌 것처럼 내 곁의 한 영혼이었다. 나에게 목회란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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