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잠언 14:26-27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54:4
가장 애써 지켜야 할 것이 마음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빛으로 오셨고 말씀으로 거하시지만 마음이 어두워 이를 보지 못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이는 확연하여서 거리낄 것이 없다. 즉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9-20).”
세대가 악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황폐하다. 억지를 부리는 데는 감당이 안 된다. 이에 우리가 성경을 본다는 것, 말씀을 읽는다는 일은 초자연적인 일이다. 온 우주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주의 존귀하심 앞에 집중한다. 베드로가 고백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를 저는 어찌 안 것일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곧 우리가 성경을 말씀으로 묵상하고 이를 마음에 새길 때 성경이 이를 행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실제 성령으로가 아니었으면 저들은 모두 예수를 떠났다. 부활이 있은 후에 가능하였다. 앞서는 우리가 아둔하고 미련하여 성경을 꿰뚫을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5).” 왜 오늘 하루를 더 연장하시고 생명을 연장하게 하셨는지,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우리가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을 오늘 잠언에서 읽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26-27).” 오늘 우리로 이 일이 가능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를 이제 귀히 여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모든 생은 어떠한지,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4-25).” 우리가 이를 알기 때문에 오늘의 늙음과 병듦과 쇠하여져 거동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며 그 한 날의 사명을 놓지 않는다. 요즘 우리 늙으신 장모가 달라지셨다. 아내는 TV 옆에 조그만 책상을 만들어드렸다. 허리를 꾸부정하니 앉아 성경을 쓴다. 기도를 쓴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였으나 떠듬떠듬 자음과 모음을 모아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쓴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어제 우린 이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다. 산다는 일은 이 둘 사이에 낀 일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21-22).” 언제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사는 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서로가 궤도를 수정하면서 말씀이 가까워졌다. 늘 아등바등 사는 일에 급급하고 돈에 건강에 여러 걱정에 시달리던 것에서, 하루씩 오늘 하루도 주가 나의 생을 허락하신 데는 안 믿는 며느리와 두 손자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기 위해서이고, 주의 날을 사모하여 그의 영광을 바라서이다. 이를 장모는 알아들었고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어 앉히고 말씀을 쓰며 묵상하고 기도를 쓰며 주께 아뢴다. 이를 베드로는 설명하기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이는 무슨 의미일까?
야고보의 설명으로 이해하자면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곧 진리의 말씀으로 우릴 낳았다. 우리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으니 그 열매를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으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우리가 오늘을 살아서 이를 본다. 이를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여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여태 그것으로 붙들려 살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는,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6).”
나는 어머니께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없다고 단정하였다. 천금을 얻는다 해도 이보다 귀하지는 않다. 곧 우리가 이제 마음의 눈으로 본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8).” 우리 눈이 떨어져,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를 보게 하시는 것으로, ‘그 뜻의 비밀’ 곧 우리로 이 땅에 보내신 것과 살게 하셨던 일과 곧 주 앞에 데려가실 것임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다. 이는 순전히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이루어진 일로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이제는 확실히 본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시는 이 최종적인 봄으로 산다.
곧 이는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신 바라.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 그래서 우린 이제 믿는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믿어진다. 내가 어찌 믿는지,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증거는 우리 자신이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믿는 자로 우린 사랑을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우리가 성경을 봄으로 말씀 가운데서 이와 같은 믿음을 가졌다. 결국은 말씀을 기록하신 이유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이와 같은 역사가 내 안에서 이루어져서 오늘도 우린 그 말씀을 먹고 마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단지 꾸역꾸역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맛을 더욱 알면서 이를 음미한다. 그리하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다른 더 귀한 게 무의미해진다. 하루라도 더 생명을 연장하여 오래 사는 게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으로 우린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7-38).”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늙으신 장모에게 어느 가까운 훗날 주 앞에서 우린 같이 밝고 젊고 완전한 몸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 주를 찬양할 것이라 설명하였다.
이를 위해 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하나님이 우리로 함께 생활하개 하신 것을 말씀드렸다. 비록 누추하고 좁고 협소하다 해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으며 믿음의 맛, 구원의 기쁨의 맛을 느끼는 것이었으니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이는 우리 몸에 밴 아주 오래된 습관, 죄의 속성을 벗어버리고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이제 우린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맛을 즐거워한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그러할 때 우리 구원이 자라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1-2).”
노인의 이해는 더디고 어려웠으나 나는 서둘지 않았고 천천히 다시 또 이를 설명하며 구원의 확신이 없는 믿음은 허공을 딛고 사는 일처럼 막연하였으나 이제는 아니다. 매일 하루 세끼 몸을 위하여 밥을 먹듯이 우리 영혼을 위하여도 말씀을 먹고 보고 음미해야 한다는 것을, ‘젖을 달라고 우는 아이처럼 우리는 더욱 영적인 갈급함에 말씀을 바란다. 마침 생강청을 한 잔 마시면서 이 맛은 눈으로 보는 것으로 족한 게 아니고, 손으로 찍어보고 만져보다고 맛을 아는 게 아니라, 입에 넣고 혀끝으로 느낄 때 그 맛이 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였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에 대해 알기만 하면 뭐하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에 대해 해박하다고 해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맛을 봐야지! 씹고 삼키고 그 능력을 살아야지!
오늘 잠언은 이를 망라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운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한다.’,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한다.’,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가는 길을 안다.’ 인생이 어떠하였나?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10).”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는 고통 가득한 이 땅에서,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13).” 이러한 허무함에 대하여, 이제는 털어버린다.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난다.’, 곧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다.’ 우리는 이제 ‘진실한 증인으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한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26).” 복에 복을 얹으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27).” 이에 우린 찬송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54:1-2).
우리로 주를 의지하게 하는 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그 하나님을 능력을 보고 믿고 느낀다면,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누가 뭐라 하든지, 어떤 일이 어처구니없이 벌어진다 해도, “…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겔 36:37-38).” 주가 이루시는 것을 볼 것이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5).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이에,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
(53:3).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4).
즉,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7).
이를 우린 볼 것이고 믿을 것이고 맛보아서 알 것이다. 그렇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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