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전봉석 2023. 1. 20. 04:46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잠언 13:20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편 53:2-3



말에 말을 얹으면 싸움이 된다. 함께 동행을 한다는 일은 적당한 거리에서의 존중과 지지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굽어 살피신다는 대목에서 순간 마음이 안정되면서도 면목이 없어진다. 우리의 가장 큰 무능은 교만이 아닐까? 내가 옳다고 여기는 이상 남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일은 그치지 않는다. 오늘 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1).” 결국은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13).” 그러므로 주 앞에 겸손한 것이 가장 큰 지혜이겠다. 어린 사무엘이 엎드렸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우리가 서로 하나 되어 동행할 때도 경책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늘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고 말해야 하는 입장에 선다. 그럴 때면 행여 나의 주장이 섣불리 앞서지 않기를 주의한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면’, ‘입이 할례를 받지 못하면’ 곧 우리는 성령으로가 아니면 백날 배운다고 배워도, 가르친다고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모두는 각자 제 길로 돌아갔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지 않으면 제자들조차 어림없는 모양이다. 이에 누굴 권면하고 성경을 제시한다고 할 때,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2-3).”

욱, 하고 치밀어 말이 앞설 때, 우리 혀는 불사르는 지옥 같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5-6).” 말에 은혜가 있는 게 복이다. 우리가 누굴 사랑하는 일은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다는 것,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이는 어느 지혜보다 우선인 것 같다. 어떤 일로 아내와 다툼이 있다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선을 그었다. 그러자 아내는 우울해한다. 은근히 바라고 꿈꾸었던 일이 무산되니 마음이 그런가보다. 저녁에 말씀을 나누며 우리로 여기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생생한지를 새삼 언급하였다. 같이 동행하였던 길이어서 아내 또한 그 체험은 동일한데 느끼는 감동은 서로 다른 모양이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고 사람을 위한다고 할 때,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6-17).” 곧 너와 나의 관계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어쨌든 도맡아하며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서도 나는 기꺼이 노모를 모시는 일에 힘을 다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물리치료나 어딜 모시고 다시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주의 사랑으로 섬기는 마음으로가 아니면 서로가 견디기 어렵다.

우리가 같이 한다는 것, 동행은 같은 길을 가는 것으로 우리가 가는 길은 저 본향을 향한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서로가 같은 곳을 향하지 못할 때, 길 위에서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서로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적당하다는 게 복이어야 하는데 그것에 안주하려 드는 태만이나 그것으로 만족함이 없는 탐욕은 둘 다 악하다. 곁에서 볼 때 적당하기가 그래서 찰나적인 것 같다. 감사로 만족하는가 싶으면 금세 다른 것을 탐하기 일쑤거나 그대로 게으른 영혼으로 머물거나… 그래서 오늘 시편은 탄식하는구나.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53:2-3).

어찌 이럴까 싶다. 우린 흔히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 하지만 돈이란 게 그렇지가 않아서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 23:18).” 그러니 점점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으로 서로를 찌른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있는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는 삶이겠다. 있는 것으로 감사한다는 것은 주신 데 따른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데서다.

누가 무슨 병이라 하여 다급하게 기도부탁을 하더니, 오진으로 판명나자 도로 옛 생활로 돌아간다. 이를 은혜로 받지 못하면 매사에 그렇다. 어떤 일 앞에서는 간곡히 주를 부르다 조금 나아졌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주의 긍휼하심을 가볍게 여긴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그래서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 16).”

우리에겐 그래서 분별의 은사가 필요하다.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14).” 오늘 잠언은 같이 하는 자의 지혜로 같이 산다는 것을 알린다. 이에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20).” 별 수 없는 일이다. 이 또한 자신의 선택이라, 하나님은 이를 아시고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22).” 곁에서 보면 다들 그러고 사느라 쩔쩔맨다. 거짓정보가 난무하는 까닭도 그래서다. 휘휘 몰려다니는 안개 같다. 이에 하나님은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24).” 진정한 사랑은 바른 훈육에서 이루어진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1:4-5).

그와 달리 복 있는 우리는,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3).

고로 주를 신뢰하고 말씀을 의지하며 산다는 일은 실전이고 매순간이 사투다. 답답한 심정으로 시편은 외친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53:1).

이는 그걸 어찌 하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자기 뜻이 우선일 때 그런 것 같다. 필리핀에서 들어온 동생이 오늘은 변호사를 만나고 ‘그 일’에 대해 저를 선임한다.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생각보다 의연하였다. 15년 필리핀 사역을 어찌 마무리 지으시려는가, 나는 호기심으로 지켜보고 있다. 어찌 되었든지 동생은 의연함으로 상대를 이기었다. 더욱이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주의 선하심을 안다는 것인데,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 11:38).” 다시 또 똑같은 상황이 온다 해도,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이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두는 것, 이는 방기다. 돌보지 않는 마음은 그 속에 주의 사랑이 없다는 증거다. 싫어도 해야 하고 싫다 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주가 내게 맡기신 일이라면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이를 알면서도 그저 모면하려고만 한다면 이 땅에서는 조용히 넘어갈지 모르나 곧 들어갈 곳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워낙에 세상이 악하여 오죽하니 법으로 이를 강제하겠나만… 나는 어제 동생과 통화하며 마음이 어려운데, 저는 뜬금없이 중고 경차를 생각보다 싸게 샀다는 데 감사하고 있었다.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이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산다. 사느라 애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곧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떠받들려 추앙받는 목회를 볼 때 오히려 아찔해지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말씀 앞에 간절하다는 것,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 15:27).” 겸손은 나를 폄훼하는 게 아니라 주를 인정하고 높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나는 병적으로 유약하나 주가 내 안에 두시는 어떤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118:6-7).

그저 말씀 붙들고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우린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간다. 이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우리의 의는 오직 하나, 믿음이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