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전도서 4:5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편 75:7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학대 받는 자들은 여전하고 그 위에 권세를 잡은 자들의 횡포 또한 여전하다. 오늘 전도서는 이를 들추어 현실을 고발한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1).” 교육이 증가하고 사람들의 의식이 깨이면 좀 나아질 것이라 여겼지만 직군에 따라 그 모양만 다를 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2-3).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이 현상이 오늘에도 여전하여 우리로 당황스럽게 한다. 이는 누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안에도 건재한 것이어서, 누구를 탓하기도 민망할 따름이다. 없어 그렇지 있으면 나 또한 다를까? 하는 데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으로 우린 우리 자신을 붙든다. 더는 소망이 없는 곳에,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우리가 소망하는 것,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우린 주 외에 위로 받을 대상이 없다. 지혜는 이를 통탄하며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2-3).” 오늘 전도서는 우리 생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렇다고 죽음이 대안은 아니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상책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린 주가 함께 하심을 발견하고 이를 찬송한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우리의 슬픔에 화관을 씌울 자는 없다. 생은 가소롭고 삶은 정직하다. 그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오늘 전도서가 지목하는 한 자,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5).” 결국 생각이 많으면 몸이 고생이다.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잠 24:9).” 온통 그 생각이 더러운 것에 얽매는 것도 문제지만 생각하기가 행동하기를 대신하는 경향도 문제다. 결국 “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12:5).”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게으름의 그럴듯한 위장이 생각하기였다.
결국은 이게 다 욕심으로 인한 것인데,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6).” 오늘 전도서는 다소 부족함이 과하여 넘치는 것보다 나은 것을 주목한다. 바울은 이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저의 일체의 비결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곧 우리가 우리의 생을 다하는 능력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의 일이다. 내 수고와 애씀으로는 바람을 잡는 격이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어느 순간 주를 알면서부터 있는 것으로 충실하다는 게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일인가를 알았다. 결국,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결국 우리의 욕심은 축적에 있고 참된 가치를 모른다. 이를 오늘 전도서는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7-8).” 그 삶의 허무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성경은 이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 있으면 있어서 더 있기를 바라는 데 마음을 빼앗기고 없으면 없어서 있는 것을 추구하느라 생을 다한다.
잠언도 그렇고 전도서도 그렇고 우리 생활에서 그 근거를 들게 하니 마치 나의 이야기인가, 하는 찔림이 오래 아픔을 느끼게 한다. 그런 가운데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
하루해가 금세 간다. 혼자 있으면서도 아랑곳 않고 흐르는 시간이 때론 무섭다. 설교원고를 수정하다 본래 잡았던 초안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또 쓰게 된 셈이다. 그러는 동안 나를 맞아주시는 말씀의 깊이에 놀라고 그 다양한 시각에 또 한 번 놀란다. 아내와 장모는 여전하고 저녁에 같이 하는 성경공부 시간은 귀하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맡기셨다 하는 데 더는 이의가 없다. 지난날로 회귀하려드는 장모의 고집스런 마음을 나는 부여잡고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하려 진땀을 낸다. 아내는 종종 식탁 아래에서 발로 툭툭 차며 장모의 말을 끊으라고 하지만 나는 저의 이어지는 회상으로 자신의 생이 얼마나 주 없이 살았던가를, 그 황폐함에 대하여 주의 은총이 더욱 차고 넘치기를 기도한다. 나름 그 시간을 기다린다고 하니, 이 또한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우리가 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 생의 가장 든든한 버팀은 누구를 책임지거나 서로 같이 하는 가치를 두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진정한 가치의 값어치는 팔짱 끼고 생각에 잠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부딪쳐야 하고 맞서야 한다. 그럴 때 주의 능력도 발휘된다. 하여,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710:24-25).”
그러므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그리스도의 중보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 위한 기도가 오늘도 이 한 날을 살아내게 하신다. 이를 시편으로 읽으면,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75:1).
내가 주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사실, 이는 가장 확실한 감사로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7-9).” 이 땅에서 온전한 정의와 성실한 권력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에,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2-3).
이 묵시가 없으면 우리는 자만하게 된다는 말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하여 묵시의 책 성경은 주가 열어보이셔야 하고 그 기다림으로 우린 영성으로 산다. 기다림은 단지 인내가 아니라 그 이상의 연마이고 공급이다. 가령 설교원고를 작성하다 어느 대목에서 뭔가 더 깊은 뜻을 바라게 되는데, 창가를 서성이다, 차를 한 잔 끓여 마시다, 혼자서 그러고 있는 동안이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 아닐까, 하는. 어제는 문득 그런 생각도 하였다.
결국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2-3).” 그러므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그러는 동안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활동을 느끼고 그 분주하신 시간을 본다. 주가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6-7).
주가 하신다. 이에 우리 주님도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이를 알면서부터 가만히, 가만히 있어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46:10).
내가 무얼 이룬다고 해서가 아니다. 나의 일은 그저 하나님이 하시는 기이한 일을 목격하고 이에 동참하는 것으로 기다리는 것뿐이다. 언제부턴가 아내가 내가 점점 느려진다고 타박이다. 말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어떤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도, 저는 늙어서 그렇다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생각을 기울여 주를 바란다는 일,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이를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
언제부턴가 누구도 의논하려 들지 않고 그저 일방적인 통보다. 그런가? 하고 나는 저에게 되물을 뿐 더는 관여할 공간이 없다. 이는 시대가 그런 것 같다. 다들 어떤 결정을 하는 데 있어 이미 답을 정하고 누구의 동의나 동조를 구하지 어찌할꼬? 하는 심정으로 다가서는 것을 꺼려한다. 설령 그렇다 한들 결국은 또 자기 생각대로라, 나는 모르겠다. 그럴 땐 뭐라 말해주어야 하고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 것인지. 다만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오늘 시인의 표현으로 들으면,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8).
결국 우리를 망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교만일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 그 일념이 신념이 되고, 신념이 신앙으로 둔갑하는 한 하나님은,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겸손이란 주를 인정함으로 무던할 수 있는 것,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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