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23편 / 은혜

전봉석 2023. 2. 24. 15:18

230226 주일

 

 

시편 123편

은혜

 

 

시 123: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 123: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시 123: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시 123: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들어가는 말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 22:1-2).”

 

다윗이 아둘람 굴로 도피하여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저를 무시하였던 부모 형제 가족들과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사울을 피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그 숫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다. 오늘 시편 123편은 순례의 노래 네 번째 시편이다. 시적배경은 억눌린 현실에서 주께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를 교회 구성원의 면면으로 살피면 가히 짐작이 간다. 환난은 우리로 교회에 모이게 한다. 시쳇말로 ‘팔자 좋은 사람’이 교회로 오지는 않는다.

 

오늘 시편은 저자가 분명하지 않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초기쯤으로 익명의 시인은 주께 탄원한다. 이를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 네 편째로 편집한 성경의 의도는 무얼까? 첫 편(120편)은 ‘회개’로 첫 발을 떼게 하고, 두 번째 노래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세 번째 시편은 ‘진정한 예배’로 순례의 길을 안내하였다면 오늘 시편은 네 번째 시편은 그러한 혼란과 고통 가운데서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23:1).” 하고 주를 찾으며 ‘은혜’를 구하게 한다. 은혜의 증거는 섬김이다.

 

‘하늘에 계신 주’ 곧 그 시공간의 의미를 통해 우린 이어지는 2-3절에서의 ‘은혜를 갈구하는 종들의 앙모함(2-3절)’과 마지막 구절에 담은 ‘안일한 자와 교만한 자들의 멸시로부터 지켜주시기’를 주께 호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4절). 순례자의 길인 우리 인생에 있어 환난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한다. 바울 사도는 이를 하나님의 공의라 하였다.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7).” 환난이 우리로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게 한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를 다시 정의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은혜이고, 은혜는 섬김으로, 이 섬김은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곧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다시 오신다. 다시 오실 때에 영원한 심판은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살후 1:8).” 이는 확실한 사실이다.

 

오늘 시편은 우리로 이를 알게 한다. 곧 우리의 호소는 ‘안일한 자들과 교만한 자들의 멸시’에 대하여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 하는 말씀을 기초로 하여 은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주어지고 이로써 우리의 섬김은 그리스도의 분명한 능력이 되는 것이다. 우린 오늘 온전한 섬김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알 것이다. 이에,

 

첫째, 하늘에 계신 우리 주의 다시 오심과 영원한 나라에 대한 언약을 살필 것이다. 둘째, 종이 상전의 뜻을 구하듯 우리의 섬김은 주의 은혜가 이루어지는 현장이고 증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셋째, 우리가 주께 바라는 것처럼 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곧 주의 은혜로 인하여 주께 모두 맡기고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 기쁨은 결국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소망은 은혜로 섬김이 되고, 주의 바람은 우리의 기쁨이 될 것이다.

 

1. 하늘에 계신 주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

 

우리 신앙의 온전함은 겸손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이 고백은 자신을 겸손히 하는 자의 것이다.

 

요즘 아침마다 아가서를 묵상하고 있는데, 오늘 주제와 연결지어 한 곳을 보면,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아 2:1-2).” 여기서 사론은 별 볼 일 없는 사막이나 황량한 들판이다. 다시 말해 척박한 들꽃으로 피어났고,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이 온갖 시련과 역경이 ‘가시나무’처럼 찌른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 주변은 온통 백합화의 향기로 진동을 한다.

 

곧 우리의 ‘섬김’이란 이와 같이 어려운 중에 행하여지는 행위로 ‘주의 은혜’로 이뤄진다. 예수님도 이를 아시고,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하고 이 땅의 삶이 어떠한지, 앞서 선지자들도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겔 2:6).” 하고 주의 말씀을 전하였다.

 

이에 우리가 취하는 ‘하늘을 우러러보는 행위’는 섬김에 있어 필연적인 마음이며 자세이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하고 우린 우리가 구하고 바라는 대상이 누구인지 각성한다. 이에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 하는 오늘 시편의 행위는 그 자체로 섬기는 자의 필수덕목이다. 이를 여러 시편은 동시다발적으로 간구한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17:8-9).”

 

예수님은 섬김의 도를 가르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섬김의 자세는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행위는 모두 종의 처신으로 섬기는 자의 기본자세이다.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러르며 우리는 역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신앙이 처음 생겼을 때는 막 찐 찐빵처럼 말랑말랑하니 순수한 마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렸다. 그러다 오래된 성도들은 다 식은 찐빵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버리기도 뭐하고 먹을 수도 없는 말씀으로 이 말씀이 별로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섬기는 자로서의 필수조건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8-9).”

 

2. 은혜를 베푸소서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2-3).”

 

섬기는 자의 겸손은 ‘은혜’를 구한다. 오늘 시편은 연거푸 은혜를 구하며 우리가 떠나지 못하고 사는 안일함과 교만함에서 발버둥친다. 세상이 악한 것을 보며 괴로워한다. 이에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사 52:11).” 하고 우리의 정결을 요구한다.

 

한데 우린 무슨 수를 쓰든지 스스로는 정결할 수 없다. 말씀을 읽기 위해 등불을 훔친다. ‘트롤리의 딜레마’처럼 다섯을 구하려 하나를 버린다. ‘본의 아니게’ 거짓을 말하고, 악한 말과 마음을 일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린 주의 은혜를 구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오늘 우리 안의 임재를 구한다. 이는 무엇인가?

 

첫째, 계시의 말씀을 알기 원한다.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7).”

 

둘째, 하늘에서 다시 오실 주를 기다린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셋째, 영원한 상벌을 기억한다.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

 

3. 주가 바라시는 것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4).”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구할 때,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곧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우러르며 바라는 것으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 25:1, 21).” 이때에 은혜란,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이는 곧 앙망함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다시 말해 은혜는 우리가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으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이는 마치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다.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주께’ “우리의 눈이…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그 이유는 주를 온전히 섬기기를 앙망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싶어서 그럼 그럴수록 나의 죄악 된 것을 탄식하는 자들로 섬김이란 이와 같이 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한 가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곧 우리가 주 앞에 ‘심령이 가나한 자’로 살 때,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사 25:9).” 하는 고백을 기뻐하신다.

 

그때에 예수님은 이르시기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하고 약속하시며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하고 우리보다 앞선 믿음의 선친들도 그와 같았음을 알리신다. 이에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나오는 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오늘 말씀의 중심은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로서 우리는 회개와 신뢰와 예배 후에 섬김으로 이 길을 걸어간다. 우린 모두 이 땅에서 종이 되어 산다.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며 사는 것 같지만 모두는 노예로 혹은 돈의,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혹은 자신의 명예와 신념으로… 개인이 개인에게 또는 사회에 속하여 살며 저들의 손길을 기다린다. 나라는 더 강한 나라의 손길에 따라 좌지우지한다. 그뿐인가? 모든 문화와 물질만능의 노예가 되어 나름은 취미에 혹은 자기만족의 노예로 산다.

 

이에 성경은 이른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온전한 섬김이다. 다시 묻는다면 우린 과연 무엇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느새 나이 들어 병들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는 이나 뜻하지 않은 일로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떠나는 이들도 허다하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의 장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때 주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에 주가 침묵하실 때,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 하나님의 침묵 앞에 우린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13:1).” 시편은 그 두려움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알려준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22:2).”

 

우리가 주를 경외함이란 이와 같이 주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라고 시편은 낱장으로 된 스냅사진을 우리 앞에 내밀어보이고 있는 것 같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30:7).” 고로 오늘 우리의 환난, 어떤 어려움이 우리로 하늘을 우러러 주를 바라고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기도하게 한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인생은 안개 같고, 눈 깜짝 할 사이의 날들 같아서 우리가 오늘 잠시 받는 환난으로, 우리의 온전한 섬김은 ‘영원한 나라’를 주목하게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이에 우린 천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 네 번째 걸음, 우리의 섬김은 환난 중에 주를 바람이다. 이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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