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3 주일
시 129편
인내
시 129:1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시 129:2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 129:3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시 129:4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시 129: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시 129:6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시 129:7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시 129:8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들어가는 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인생길이 참 어렵고 사는 날이 실로 곤궁하다. 있으면 있어서, 없으면 없어서 고달프게들 산다. 원인은 죄 때문이다. 그에 따라 우리는 인내를 배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고, 불순종은 사망으로 이어졌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저의 부활과 승천은 재림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별 수 없이 죄의 권세 아래에 있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하여 끔찍한 현실은 오늘 시편에서 기도로 드려진다.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시 129:1).” 오늘 본문의 정황이다. 죄의 결과로 다윗은 필사적으로 기도하였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51:11).”
문맥적으로 알 수 있듯이 오늘 주제는 <인내>이다. 인내는 고통 중에 나오는 생기다. 운동하는 이들이 극한 고통에서 아드레날린이 확산되고 교감신경이 흥분되어 오히려 쾌감을 맛보는 것과 같다. 인내하는 자에게는 생기발랄함이 있다. 생동감도 넘쳐난다. 노동운동가의 만족은 노사갈등을 겪으면서 더욱 고조되는 것과 같다. 인내는 우리로 꾸준하게 한다. 은근과 끈기를 유발시킨다. 가던 길을 멈추지 않게 한다. 그 걸음이 비록 완전하지 못하다 해도 무던하게 한 길을 가게 한다. 모든 분야의 장인들은 공통적으로 지속적이다. 일관된 인내심을 발판으로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일이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이라 하였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여기서도 보여주듯 고난하면 예수를 떠올리게 되고, 예수님하면 인내를 연상하게 된다. 예수께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예수님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하고 이사야는 예수를 예언하였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10-11).” 이 예언은 실현되었고, 그 목적을 이루었고, 성취하셨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앞서 127, 128편에 이은 ‘승리의 노래’와 다소 거리가 있다. 오히려 123-126편의 ‘고난과 역경’에 이어 섬김(123), 도우심(124), 안전함(125)으로 ‘눈물로 씨를 뿌릴 때’ 기쁨으로 거두는 기쁨(126)의 시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저자는 미상이다. 두 부분으로 나뉘어 1연(1-4절)은 오늘의 괴롭힘이 예전부터 계속되었다는 사실과 고통의 줄을 하나님이 끊어주심을 노래한다. 2연(5-8절)은 그 괴롭힘의 가해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존재이고, 무가치한 것인가를 밝혀준다. 한 마디로 상대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오늘 우리는 첫째, 고난이 우리로 인내하게 한다는 것과 둘째, 인내함으로 고난의 실체를 알고 찬양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인내는 고난으로 얻어지는 생기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시 129:2).”
은근 승리감이 느껴진다. 1절에서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할 때 ‘이스라엘’은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1).” 할 때 그들은 괴로움이고, 그것이 실은 죄로 인한 고난으로 의도적이고 지속적이었음을 내재한다. 실제 모든 고난은 인과관계가 없다. 맥락도 없이 ‘그냥’ 닥친다. 누구라도 예외가 아니다. 믿음으로 살면서 생이 나른하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다! 느슨하고 느긋하여 느린 걸음으로 경주하는 경주자는 없다. 바울은 늙어서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저는 노인이고, 감옥에 갇혀서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4).” 하는 이 놀라운 생기발랄함은 결국 고난으로 인한 인내에서 나왔다.
예수님은 이르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첫째,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자기부인이란 자기고집과 아집을 꺾는 일이다. 자신의 판단과 자기기준을 우선하지 않음으로 우리 신앙은 온유한 자가 되어 애통하는 마음으로 심령이 가난하여 긍휼하여진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진다. 이는 주어진 삶에 대한 순응이다.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인다. 가령 고아로 났거나 장애를 가졌을 때, 임신을 못하거나 불치의 병에 걸렸거나 혹은 나이 들어 병들고 노인이 되었다는 것 등등….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들, 이를 묵묵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그리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팔자니 운명하는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숙명이다. 이는 사명감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믿음을 지키며 세상을 산다는 일은 안 믿는 다수 속에서 믿는 소수로 산다는 일이다. 이와 같은 일은 어제오늘의 게 아닌 ‘어려서부터’, ‘여러 번 지속되는 고난’을 의미한다. 그렇게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하는 오늘 시편의 진술은 신앙고백의 진수다. 하여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3).” 이처럼 모질고 끔찍한 현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알고, 느끼는 것들이 무언가?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4).” 결국 죽어서야 놓여날 이 싸움에서 모든 육적인 괴롭힘은 영적인 괴롭힘으로 우리 영혼의 노여움을 쌓게 한다. 한데 이를 바꾸어 찬송이 되게 하신다니!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이에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126:5-6).” 이와 같은 간증이 우리 영혼을 생기발랄하게 한다.
2. 인내는 우리의 남은 생은 물론 영원토록 생기발랄하게 한다.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129:5).”
우리의 믿음은 이 땅에서의 결국으로 그치지 않는다.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즉 의도적이며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기피하고 교회를 멀리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저들은 저들 스스로 고스란히 자신들이 그와 같은 수치를 견디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떤 수치와 좌절과 모멸에서도, 이를 모두 주 앞에 내어놓음으로 발랄하다. 곧 인내는 우리로 생기 있게 하여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상대적으로 저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6-7).” 이 얼마나 처량하고 한심한 존재인지…. 자라지도 못할 것이고, 벨 것도, 묶을 것도 없을 정도로 가치 없는 것임을. 심지어는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8).” 이러한 사실을 저들은 모른다. 관심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 믿음이 있다 하고 구원의 확신도 없이 사는 성도들이다. 곧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우리는 염려와 근심도 없고, 고통과 환난도 없는 자들로 산다는 소리가 아니다. 우리도 저들과 다를 바 없는 느닷없이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 여기서 ‘밤’은 난데없이 닥친 환난이다. 그때에 우리는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여호와의 성전”으로 달려가 ‘주 앞에 선다. 그때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오히려 우린 주를 송축한다. 이는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1:1-2).”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오는 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바울의 자랑이 무엇인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와 같은 기쁨과 감사가 우리로 춤추게 한다.
인생은 고해와 같다 하나 이는 “자라기도 전에 마르는 풀”과 같고(시 129:6), “끊어진 줄”일 뿐이다(4). 이제라도 우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이러한 믿음이 우리로 고난 가운데서 생기발랄하고 기쁨에 차게 한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그러므로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138:7).” 이것이 우리의 권능이다. 하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당부하셨다.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우리는 고난을 통해 인내를 배운다. 인내는 우리로 생기 있게 한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으로 살게 한다. 그와 같은 권능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이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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