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31편 / 겸손

전봉석 2023. 5. 5. 11:39

230507 주일

 

시편 131편

겸손

 

 

시 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 131: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들어가는 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 열두 번째 시편이다. 오늘 주제는 겸손이다. 앞서 열한 편의 주제를 망라하여 그 의미를 살피면, 첫 번째 시편은 120편의 시로 시작하여, ① 회개--> ② 믿음--> ③ 예배--> ④ 섬김--> ⑤ 도우심--> ⑥ 안전--> ⑦ 기쁨--> ⑧ 일--> ⑨ 복--> ⑩ 인내--> ⑪ 소망--> 그리고 오늘 열두 번째 시편에까지 이르러 ⑫ 겸손을 노래하고 있다.

 

성경의 배열은 결코 무작위로 이뤄진 게 아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쓰인 단어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뿐더러 허투루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다. 말씀을 작은 것으로 여겨 가르치면 천국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로 일컬음을 받고, 그 작은 것 하나라도 가르쳐 지켜 행하면 천국에서는 큰 자라 일컬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 열다섯 편 가운데 오늘은 전반부 중반부를 지나 후반에 이르러, <겸손>을 주제로 하였다. 앞서 ① 회개(120편)에서는 우리의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우리의 생명을 건져주시기를, ‘환난’ 중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1-2).” 다음은 ② 믿음(121편)에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있다’는 강한 믿음을 붙들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2).” 곧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3).”

 

다음은 ③ 예배(122편)로 이어지는데 ‘회개’하고 돌이켜 ‘믿는 자’로서는 당연한 은혜의 자리가 예배다. 예배는 평안을 주시는 것으로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6).” 하고 우리로 구함을 바라셨다. 이어 ④ 섬김(123편)에서는 주의 은혜를 사모함으로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 하고 오직 주만 바람으로 섬김을 다하게 하였다. 이에 ⑤ 도우심(124편)에서는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8).”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우셨다.

 

중반부에 들어 ⑥ 안전(125편)은 우리가 주를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온다는 사실을,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1)” 하며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셨다. 그러므로 ⑦ 기쁨(126편)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기쁨은 주가 일하심을 아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3).” 이에 ⑧ 일(127편)은 우리에게 맡기신 인생의 기본이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쓰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신 복이다. 일은 안식 곧 복을 소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

 

⑨ 복(128편)을 당연히 주의 길을 걸을 때 얻는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1).” 이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오늘 우리의 형통함은 주가 일하시는 것으로,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2).” 하여 ⑩ 인내(129편)는 일하는 자의 필수로 어떤 어려움이든지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2).” 우릴 굴복시킬 수 없다.

 

이에 후반부에서의 첫 걸음은 ⑪ 소망(130편)으로 시작한다. 인내하는 자는 기다릴 줄 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 하나님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심으로 오늘 우리의 삶을 조성하신다. 이를 우린 경외한다. 오늘은 열두 번째로 ⑫ 겸손(130편)이다. 일하는 자로 소망을 가지고 산다면 우린 결코 교만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의 품에서 평온함으로 이 길을 간다. 겸손은 신앙의 뿌리이고, 신앙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본문이해

 

신앙은 겸손으로 자신을 다짐한다. 믿음은 순종함으로 드러난다. 소망은 전진하게 한다. 오늘 시편은 다윗의 시다. ‘겸손을 다짐하면서 평온한 마음으로 감사의 찬송을 올린다.’ 시적 구성은 두 연으로 나누었다. 1연(1-2절)은 겸손으로 얻는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안정이다. 이 안정은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서 느끼는 고요하고 평온한 것이다. 2연(3절)은 다윗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였듯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이 겸손함으로 평온을 알게 한다.

 

1. 신앙은 지켜져야 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신앙은 보존이 필수다. 믿음은 값없이 얻되 신앙은 섬김과 누림으로 자라간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나듯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이를 돌봄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주의 일’을 이루시는 데 거침이 없으시다. 우리의 신앙은 화초 같다. 때가 되면 가지치기를 하고 분갈이도 해줘야 한다. 물도 주고 해와 바람도 들고 나게 해야 한다. 이때 겸손은 자양분이다. 하나님께 뿌리를 둔 신앙의 뿌리는 겸손이다.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에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겸손’이다. 이를 위하여 전능하신 이가 사람으로까지 낮아지셨다. 곧 우리 신앙의 해충은 교만함과 오만함이다. 교만(驕慢)은 말(馬)이 높은 곳으로 치달리는 것과 같고, 말(言)을 길게 끌다 그물에 걸리는 어리석음과 같다. 오만(傲慢)함은 거만한 것이다. 하여 시편은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않기 위하여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겠다고 한다.

 

2. 무모한 열망과 평온함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131:2).”

 

한자어를 그대로 풀어보면 교만(驕慢)과 오만(傲慢)은 ‘높은 곳으로 치달리는 말’과 같이 이를 모방하려는 마음의 일이겠다. 즉 ‘남들처럼, 남부럽지 않게’ 살려는 마음으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을 ‘무모한 열정 혹은 무모한 열망’이라 한다. 신앙에서도 ‘만일 ~하였더라면’ 하는 식의 접근이 주의 뜻을 온전히 보지 못하게 우리 눈을 가린다. 가령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 오라비 나사로가 죽자 실의에 빠져 예수님께 원망 조로 한 말처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또한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이는 가정법을 앞세워 그 이상의 것을 바라게 한다.

 

이는 베다니 연못 앞에서 만난 서른여덟 해 된 병자도 같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시면 ‘네!’ 하고 대답하면 될 일인데 저는 말이 길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구구절절 말이 길어지면서 자기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5:5-7). 그러자 거두절미하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8).” 이처럼 우리에게 겸손은 ‘네!’ 하면 그만인 것이다.

 

오늘 시편은 우리가 주신 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일에 대하여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서 얻는 평온으로 비유로 든다. 젖 뗀 아이는 간난아이가 아니다. 엄마의 품이 얼마나 안전하고 포근하고 위로가 되는지를 안다. 의지가 있고 분별이 있다. 그 품의 평온을 다른 것과 바꿀 리 없다. 만약에 아이를 엄마 품에서 떨어뜨리려하면 애는 자지러지게 울며 발버둥을 친다. 필사적으로 엄마를 끌어안는다. 세상 그 무엇도 아이에게 엄마 품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3. 평온함으로 가는 길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131:3).”

 

시편 131편은 쉽고 짧고 간단한 것 같다. 하지만 평온의 길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래서 바울도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하고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이 조성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한다.

 

이를 알려면 겸손(謙遜)해야 한다. 우리의 겸손은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우리의 생각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겸손의 겸(謙)은 말씀 언(言)자에 겸할 겸(兼)자를 써서 우리가 말씀을 겸하여 흡적해하는 것으로 겸손할 손(遜)자가 붙었다. 이 글자는 쉬엄쉬엄 갈 착(辶)자에 손자 손(孫)자가 붙었는데, 그 의미를 연상하자면 서둘지 않고 내 뜻을 앞세우지 않음으로 멀리까지 갈 수 있는 듯하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처럼 주께 말씀드린 것도 이해는 간다. 서른여덟 해 된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도 구구절절 말이 많은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것들로 주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없는 우리의 한계도 인정해야 한다. 다시 이사야서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말씀을 정리하자면 주님의 생각은 우리가 꿈꾸는 그 이상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4-25).”

 

곧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뜻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주를 경외할수록 우린 겸손해진다. 겸손은 우리 신앙의 자양분으로 하나님의 뜻에 가 닿는 뿌리와 같다. 우리가 그저 신앙이라 하지 않고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신앙은 결코 관념이나 추상적인 신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론 이 지긋지긋한 생활이다. 벗어날 수 없는 소박 같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하고 말씀하신 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그렇다면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우리의 신앙은 일상생활로 더하여져 자라가는 성장이 따라야 한다. 우리 신앙의 성장은 겸손을 뿌리로 하여 자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