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전봉석 2023. 5. 9. 05: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예레미야 5:22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편 5:3
 
 
 
유다는 북이스라엘을 답습한다. 죄는 물들고 의는 힘을 잃는다.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온전함을 선지자는 밝힌다. 심판의 불가피함을 알리는 것이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1).” 그만큼 의는 사라지고 악이 지배하는 천지가 되었다. 비통해하시며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9).” 그런 가운데서도 이 일을 알리고 증거 하는 사람이 있다. 그 한 사람이 의인으로 성읍이 살고 나라가 유지된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왕하 8:19).”
 
우리가 오늘을 사는 사명이겠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결국 우리가 사는 데 따른 저마다의 몫이 부르심의 자리에서 주의 뜻을 알고 듣고 전하는 것일 텐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는 오늘에도 같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30-31).”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저마다 내 곁에는 교회를 다니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과연 그 중심이 온전한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는 사업의 한 일환으로 교회를 생각하고 어떤 이는 응급실 정도로 여기는 듯 다급할 때만 교회를 찾는다. 마치 일반 병실로만 올라가도 살만해져 좀이 쑤신다. 들려오는 이런저런 소식을 들을 때면 나는 그런 꼴을 당하지 않아서 그런가? 설마, 하면서도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는 데 놀란다. 차라리 믿는다는 소릴 하지나 말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결국은 그 속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는 한가, 하는 것이다. 교만(驕慢)은 저 혼자 높은 곳으로 치달리는 말 같고, 겸손(謙遜)은 말씀을 새겨 겸함으로 겸손하고 겸손함이다. 어설프지만 한자로 봐도 그런 것을 알겠다. 이에 하나님의 징계가 복이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5-6).” 만일 징계가 없다면 그것이 더 큰 일이라.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그러므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1-13).”
 
늘 같은 이유지만, 보면 그게 다 돈 때문이다. 사람 좋고 신앙이 바르다 싶었던 집사가 한껏 투자하여 학원을 차리고는 목사 내외를 뭐 무시하듯 다룬다. 또는 어느 가정에 돈 좀 있는 동생이 늘 가난하고 비루한 누이의 목회하는 모습이 가소로운가보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교회에 가고 예수를 부르고 복을 구한다. 때론 마음이 상하여 그야말로 미끄러져 자빠질 것 같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2-3).
 
어떻게 저린 이가 잘 될까 싶을 정도로,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4-9).
 
이런 이들이 주변에 널렸다. 돈을 사이에 놓고 앞뒤가 다르다. 자기 이문을 위해서는 가릴 게 없는 사람들 같다. 나는 동생들이 목회현장에서 또는 일상에서 겪고 있는 이들을 들으면서 세상과 다를 게 없는 교회로 비통해한다. 모 교회는 무리하게 교육관을 짓는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이유 때문인지, 당장 교회 시설에도 학생이 없고 청년들이 떠나간 상태에서 근본적인 대책은 없이 건물을 확장하여 다른 용도로도 생각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느라 재정이 어렵고, 그 어려운 재정을 부교역자들에게 전가하는 꼴은 우습다. 교회가 담임목사 개인 소유도 아닐 텐데, 그러다 안 되면 세를 주고 학원을 해도 될 거란 소릴 버젓이 해가면서 고통을 분담하라니!
 
오늘 본문을 읽다 어제 누구와의 통화로 괜히 속상하였던 일이 떠올랐다.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4).” 그러니 북이스라엘의 타락을 보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희한하다. 결국은 말씀의 문제다. 교회가 말씀의 깊이만큼 영글어 간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나는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어! 성경?’ 하는 것을 경계한다. 성경이 읽힌다는 의미로 성경공부라기 보다 길라잡이 정도로 성경의 갈피와 그 줄기를 훑어주는 것인데 친구네 교회에서도 요즘 그걸 하는 모양이다. 나는 잘 모르면서 이런 소릴 하기는 그렇지만 친구에게도 권면한 게 그것이다. 한 문장이라도 네 손으로 짚어가며 또박또박 읽어라. 무슨 말인지 몰라도 좋다. 줄거리는 훑어도 되고 내용은 들어도 알지만 ‘한 문장’의 맛은 꼭꼭 씹어 입안에 머금어야 맛을 안다. 예전에 글쓰기를 가르칠 때 나는 절대 못하게 한 것 중에 하나가 속독법이다. 다음은 참고서나 요약해준 것을 보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 10명 중에 9명은 홍길동전을 안 읽었어도 그 내용은 안다. 대부분은 안다. 안다고 여기지만 그 의미까지는 알지 못한다.

 

빨리 많이 많은 책을 읽었다고 능사가 아니다. 논술을 위해 120권의 세계국내 명작들을 망라한 요약본이 있었다. 아이들이 하도 책을 안 읽어서 그 요약본으로 수업한 적이 있다. 뭔가 아는 듯 떠벌이기는 하는데 깊이가 없다. 오히려 그리 두어 쪽 짜리 요약으로 아는 내용으로 다 안다고 여겨 더는 그 책을 읽지 않기도 한다. 신앙을 날로 먹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적당히 교회 가고 헌금 내고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성도입네, 하고 스스로도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믿음으로 사는 경우다. 오늘 말씀도 이를 일컬어,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아니하니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12-13).”

 

적당히 아는 게 모르느니만 못하다. 나는 차라리 한 문장만 알면 된다고 늘 강조한다. 글 못 쓰는 친구에게도 좋은 글 한 문장만 여러 번 필사하고 그 뜻을 바로 알면 열 권의 책을 읽은 것보다 낫다고 했었다. 친구에게도 그리 말하였는데, 그래도 뭘 알아야지? 하면서 자신이 하는 성경공부(?)에 적당함을 말하였고, 그래서 좀 읽나? 하고 물었더니 다 배우고 읽을 건데, 문제는 앞에 들었던 정황설명도 까먹는다고 하였다. 그러게 무딘 도끼가 나무만 상하게 하고 백날 패봐야 나무 한 그루도 벨 수 없다.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레 20:23).” 이게 다 세상 좇아가는 교회 교육이다. 이미 실패한 논술법이고 작문법과 독서법을 교회에 접목시키는 꼴이다. 암기위주로 혹은 다독함으로 뭔가 승부를 볼 것 같지만…

 

오늘 본문이 유다가 북이스라엘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에서 죄가 죄를 잉태한다는 것을 알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신 12:31).” 하여 나는 누가 일 년에 성경을 몇 번 읽었네, 하는 따위로 저의 신앙을 돌아볼 수 없다. 어설픈 신자들이 안 믿는 자들보다 악랄하게 구는 이유다. 그래도 찔림이 없다. 희한하게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또 방귀 꽤나 뀐다. 이런저런 일에 관여하고 사업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려 든다.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잠 14:8-9).”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죄보다 두렵고 떨림으로 소심한 순종이 더 낫겠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어찌 이런 일이? 그건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22).” 그렇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말씀대로 살기는 싫고 말씀은 알아야 할 것 같고, 겉핥기로 알게 된 말씀으로 자기 뜻대로 이해하고 안다고 여기니까…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교회는 운영하는 게 아니다. 큰 교회일수록 시스템에 의해 유지되는데 사회가 그런 것처럼 수동적이고 별개 같아서 자발적으로 어떤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는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그리 정해진 시스템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그리 운영(?) 하시지 않는다. 오늘 본문 28-29절,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사로 있는 친구도 학교 일에서 선생으로 자신의 자발적인 관여를 자제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였다. 행여 스승으로서 뭔가 표현했을 때 이를 사방에 달리 보니, 그래서도 시스템에 의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공정할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교회가 사역자를 책임지지 못한다. 언제든 갈아치우면 되는 소모품 정도로 부교역자들을 허비한다. 성경의 가르침이 무색하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어지간한 교회 담임목회 아니면 요즘은 다른 일을 같이 하지 않고는 목회가 어렵다. 누군 대리운전을 뛴다. 택배기사로 일하는 목사들이 많다. 북이스라엘을 따라가는 남유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교회가 점점 세상 문화와 같이 변화를 꾀한다. 서로 돌볼 마음은 없는가보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오늘 시편에서 위로를 얻는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2-3).
 
말씀 앞에 나를 앉히고 한 구절을 여러 번 곱씹으며 몇 번은 옮겨 적어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이에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 8:22).” 이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4-6).
 
그러므로,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7,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