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전봉석 2023. 5. 8. 05:05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예레미야 4:19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시편 4:3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을 버린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을 제한다. 진실과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을 삶에 모시고 산다. 회개란 이와 같이 주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에 대해 물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눅 3:10, 11).” 곧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라 할 수 없다. 신앙은 생활이다. 관념이나 신념이 아니다. 이제도 이를 강조하였다. 회개도 그저 입술로만 잘못을 고하는 게 아니다. 작은 일 하나에서 그 생활이 바뀌어야 한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그러므로 우리의 근심은 다르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회개란 이와 같아서 오늘 본문은 이를 돌아보게 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렘 4:1-2).”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이에 모이기에 힘쓴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행 2:1, 5:12).” 다음은 같이 하여 권하는 것,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성령은 은둔이나 독자적인 행동에서가 아니라 함께 함으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편 3편 전문).

 

곧 우리의 회개는 자신으로 고립되어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주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뭇 나라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치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사 49:22-23).”

 

말씀 앞에 서는 일이 날마다 회개다. 돌아보아 주 앞에 나를 바로 하는 일이다. 그러할 때 남을 위하는 마음도 그 실천도 자연스럽게 따른다. 다윗이 죄를 짓고 간절하게 바라였던 것은 첫째,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는 것과 다음은 다른 이를 돌아오게 하도록 가르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51:12-13).

 

우리로 이와 같은 말씀을 받을 수 있게 하심이 귀하였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5-16).” 이는 마음의 묵은 땅을 갈아엎을 때 가능하였다. 오늘 본문 3절,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묵은 땅, 더는 아무런 수확도 기대할 수 없는 마음으로는 기대할 것이 없다. 가시덤불에 파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그 속, 묵은 땅 같은 마음으로는 항상 하던 자식 걱정에 ‘밖에 사자가 있다’ 하여 자신을 고립시킨 핑계만이 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잠 26:13).” 어쩜 그렇게 할 말이 많고 변명은 긴지…. 스스로도 같은 말을 되풀이하듯 같은 염려와 근심으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 마음이 묵은 땅과 같다는 것은 그러하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그리하여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사 32:15).”

 

그리할 때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시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대상 29:17).” 이에 오늘 본문도 이를 일깨운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 주가 더하시는 경고의 말씀에 움찔하여 두려움이 드는 것이 정상이다. 이와 같은 말씀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은 묵은 마음을 그대로 두기 때문이었다.

 

죄를 고집하면 피할 곳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오늘 본문은 요구한다.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 시온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리라(5-6).” 우리로 확신을 가지고 해야 할 일과 피해야 할 곳을 알게 하심인데, 죄 된 욕구를 버리고 파멸을 자처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 이는 회개였고 다급한 실천이 필요하였다. 보면 이를 지적하여 뭐라 할 때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타성에 젖은 삶이 있어 자신이 하던 대로 하길 바라는 관성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누구에게 뭐라 하다 듣지 않으려 할 때, 나는 하나님께 고한다. 더는 저에게 말해도 소용이 없다. 내가 그러하였듯 30여년은 족히 돌다 온 것 같다. 그때도 바른 길을 제시하던 이들이 있었다.

 

듣지 않는다. 듣지 않으려 그리 피해다녔다. 거리를 두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였다. 내가 듣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저들은 나의 영혼을 두고 뭐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들 역시 마비된 영혼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너무 늦게 알았다. 그저 같이 어울리고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다음 순위로 미루며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마다 강한 어조의 경고가 있을 때면 움찔했다가 잠시 방심하는 사이 10년씩은 훅, 훅, 지나간 것 같다. 돌아보면 늘 신기할 정도이다. 87학번으로 나는 주의 길을 갈 수 있었다. 97학번으로 신학 학부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신기한 인연으로 돕는 이를 곁에 두심인데 기어이 이를 마다하고 도로 옛생활로 돌아간 것이 09학번이 되어 그때는 심히 강권하심으로 멱살잡혀 끌려온 것 같이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하셨다. 그러하듯 최소한 30년은 허비한 셈이었으니.  

 

이제와 저들의 바보 같던 날들이 부러운 것은 나의 어리석었던 날들을 한탄하기 때문이다.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잠 2:11-12).” 안이하여 태평하게 굴다 급작스러운 일 앞에서야 다급하게 주를 찾는 것이었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되돌려 요즘은 누구를 생각하며 애통해한다. 뭐라 일러도 소용없는 일을 두고 주께 고한다. 누군가 나를 보며 그와 같은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을…. 저로 인하여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통곡의 날이 오기 전에 돌이켜 애통할 수 있는 게 복이다. 오늘 본문 8절, “이로 말미암아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이는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아직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우리가 ‘애통하는 자’로 살 수 있는 것은 주를 경외함으로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 4:9).” 그러함은 근신함으로 깨어있고자 함이고, 그리하여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다들 웃으며 살자고, 억지웃음으로나마 슬픔을 이겨내려 안간힘을 쓰는 세상에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말씀이 더하시는 교훈을 바로 알아야 한다.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을 듣기 원하는 것,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이르렀나이다(렘 4:10).” 하며 주 앞에 호소하는 기도가 필요한 시절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뉴스를 보지 않는다. 오늘의 이 정권이 훗날 어떤 결과를 맞으려 할까, 생각하면 우리 역사의 불운한 정치사가 되풀이 될 것을 안타까워한다. 우리가 믿는 자로 살며 좌로나 우로 치우지지 않고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큰길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신 5:32, 2:27).”

 

믿는 자로 살며 이 정도 줏대는 있어야 할 것이다. 왜 목사들이 강당에서 정치를 운운하고 어느 정당을 지지하거나 매도하는지 모르겠다. 왜 SNS를 하며 직접적으로 그런 일에 뛰어드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신대원을 하면서 이것들부터 없앴다. 사람의 평가나 그 기준에 휩쓸리기 잘 하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곧 멸망할 세상이다. 여기에 매임은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격이다. 오늘 본문도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전할 자가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며 이보다 더 강한 바람이 나를 위하여 오리니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행할 것이라(렘 4:11-12).” 곧 우리 육신도, 우리 생의 모든 관계도 파괴되고 결별하게 될 것이다. 그에 대해 악착같이 집착하느니 저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훈련이 필요하다.

 

늙으신 장모와 같이 살면서 내가 배우는 게 많다. 생에 대한 집념은 누구라도 악착같아서 기를 쓰고 살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우리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그러므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5-7).”

 

어쩜 우린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군다. 오늘 14절,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하고 외치는 말씀의 뜻을 알고 있다. 이에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19).” 우리 심령이 알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가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30).” 곧 다가올 날이 가깝게는 내 곁에서 내게 교훈한다. 늙음과 병듦은 생의 이치라, 혼자 있을 시간과 그 외로움을 대비해야 한다. 더 극한 고통 가운데서도 주를 생각하며 주가 예비하신 천성을 바라야 한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4:1).

 

오늘 시편은 이를 돌아본다. 그리하여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세상이 뭐라 한들, 요지경으로 돌아치는 저들에 대해서는 뭐라 한들 소용없는 일일 테고,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그러므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2).

 

하시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사 54:8, 애 3:22).” 말씀이 보증하시는 삶을 살기를 기도한다. 하여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3).

 

하여,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