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예레미야 3:23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3:5-6
심판에 따른 원인과 결과를 알게 한다. 오늘 본문은 선민의 배도와 심판에 따른 예언으로 시작한다(2:1-3:5). 일반적인 양심의 배도와 선민의 임시방편으로 드리는 회개를 허용하지 않으심을 알린다. 이를 예로 들어 본 남편을 버린 아내가 돌아와 재결합한다는 의미로 다루신다. 이에 성경은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신 24:4).”
곧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며 우상으로 얼룩진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옴은 불가하다. 단지 임시방편으로 하나님께 회개함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자기중심적인 회개에 대해 반어적으로 되물으며 본문은 사실을 직시하게 한다.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답습하는 유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이를 무마하려 위선적으로 회개하는 것을 밝히신다. 그럼에도 회개를 촉구하며 궁극적으로 실현될 회복을 약속하신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어쩜 이 정도로 어리석을까, 하고 생각하다 우리 삶이 다르지 않다는 데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교회를 가고 하나님을 부르는 덴 다 저마다 절박한 사연이 있을 때이다. 그것이 좀 해소되고 안정을 찾으면 도로 느슨해지고 타성에 젖은 신앙으로 돌아가기 일쑤다. 흐지부지하여 절박함은 그때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헌신과 순종은 안정적이어도 무뎌지지 말아야 한다. 가령 예수께서 가장 많이 권능을 행하셨던 고을이 회개는 더디었다는 사실 앞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0-21).”
고라신과 벳세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2의 고향이랄 수 있을 정도로 외진 곳이나 예수를 어디보다 잘 아는 곳이었다. 짐작하건대 저들은 자신들이 잘 아는 예수를 선입견을 가지고 대했다. 주의 권능이 전달되지 못한 이유다. 곧 우리의 형식적인, 불가피한, 임시방편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다급하게 부르짖는 것에 대한 경고다. 곧 오래된 성도들의 고질적인 문제가 타성에 젖는 것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이에,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시 132:1-5).
곧 성막을 바라는 마음으로 긴장을 늦추지 않는 다윗을 보면 새삼 ‘근신하라. 깨어 있으라.’ 하시는 성경의 경고를 알 수 있겠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이에 다윗은 성막을 발견하기까지인데, 그 안에 주의 언약궤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역사적이며 순종적인 신앙의 푯대가 된다. 길이 122Cm, 너비 76Cm, 높이 76Cm의 금으로 입힌 나무상자에 불과한 것이나 그 안에 들은 십계명돌판과 만나항아리와 아론의 싹난지팡이는 역사적이고 헌신적인 신앙의 족적을 상징한다. 하나님이 그 궤짝 안에 들어 계시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상자 안에 가둘 수 없다. 모실 수도 담을 수도 없다.
우리가 성경을 주의 말씀으로 받는 것은 하나님이 책이나 글자라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단어와 글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은, 하나님은 무궁하시되 우리가 늘 한계가 있어서 이렇듯 스스로를 낮추시고 우리에게 보이셨다 데 의미가 있다. 이에 다윗은 하나님의 성소, 그 안에 모셔지는 언약궤를 귀히 여기며 항상 그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것은 정작 성소나 언약궤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다. 하나님은 속죄소 안에 담을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말씀으로 한정되거나 책 안에 가둘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시다. 그 의미 이상의 의미를 우린 안다. 주의 임재가 말씀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132:6-9).
이 언약궤는 시내산에서 시작되어 광야를 지나 가나안을 정복한 뒤로는 실로에 모셨다가 전쟁이 터져 블레셋에 의해 빼앗겼다 돌아왔다(삼상 4-7장). 후에 이스라엘로 돌아와 기얏여아림에 모셔졌다가(7:1-2), 다윗의 예루살렘에서 솔로몬의 성전으로 모셔졌다. 이와 같은 역사는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의미로 그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지만 또한 이를 역이용하려는 우상숭배 같은 위험성도 동시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한다. 분명한 사실은 언약궤 그 상자가 하나님이 담긴 곳이 아니다! 교회가 성경이 하나님을 가둘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급할 때 교회로 달려와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은 그의 간절함의 진실성과 함께 임시방편으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산으로 교회나 말씀을 역이용하는 위험성도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로 값없이 생수를 마시게 하심은 은혜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곧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이를 생각해야 한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한데 이와 같은 은혜를 역이용하려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있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8).” 교회를 이용하려 하는 목사나 신자들이 무리지어 정치판에 끼어들고 분탕질하듯 진영논리로 성경을 이용하려는 사람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엡 5:6-7).” 두려움을 망각한 사람들. 하나님을 상자 안에 담았다고 여기는 사람들. 다급할 때나 주를 찾아 암묵적으로 간절한 듯 주께 호소하는 사람들. 이 모두는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두려움이 따른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 이를 멋대로 해석하고 그리 여기며 자기 믿음을 우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다윗의 기도는 바보 같겠다.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132:7).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10-12).
이에,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5-16).” 성경은 엄연히 경고하시고 그에 따른 때가 반드시 임할 것을 알리신다.
오늘 본문은 우리로 보게 한다.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렘 3:2).” 혹시 우리 신앙은 그러하지 않은지? 교회를 다니는 이유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의지하는 데 따른 목적이 따로 있지는 않은지? 이 땅에서의 좋은 삶을 원한다면 나는 오히려 불교나 천주교를 권한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부자로 잘 사는 사람들 보면 불교인들이 많다. 저들의 목적은 분명하다. 또는 선을 행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는 사람들 가운데는 천주교인들이 많다. 내 주변에도 착한 사람들 열에 아홉은 천주교인들이다.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 여기면서 심지어 지옥에 간 이도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여긴다. 저들의 선행에는 그와 같은 소망이 있다.
그렇게 보면 기독교인들이 가장 오합지졸로 즉흥적이며 임시적이다. 다급할 때면 헐레벌떡 뛰어와 살려달라고 외치는 응급실 같다.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안정을 찾고 병실로 옮겨지면 절실함은 사라진다. 그러다 씻은 듯 다 나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그럼에도 성경의 요구는 다소 의아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러니 누가 달가워할까? 널찍하니 평안한 길을 놔두고 좁고 협착한 길로 들어가라니!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렘 3:3).”
능청스럽게 내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떤 다급함이 사라지면 떠나거나 남거나 하는데 고통이 지속적일 때면 모를까 모든 게 정상화되면 신앙은 해이해지고 흐리멍덩해지기 마련이다. 미지근하니, 설마 하는 성도들로 어떤 이벤트를 계속 요구하는 사람들. 저들 욕구에 만족시키려는 교회들. 하나 성경은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5-7).” 이에,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32:13-14).
이를 오늘 예레미야에서는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 돌이켜 주 앞으로 오라는 것,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 이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비추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16-21).” 이와 같은 사실에도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22).”
주의 긍휼하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어찌 이러한가, 한탄하고 애통하게 된다. 아,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25).” 부디 이와 같은 말씀에 경각심을 갖고 돌이킬 수만 있다면…
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132:18).
하여,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1-2).
우리로 좌절하게 하는 것이 이보다 더할까? 이와 같은 심정은 아들에게 쫓겨 달아나며 그를 배신한 친구와 아들을 에둘러 주께 아뢰는 다윗의 심정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3-4).
저는 끝까지 주의 성소, 주의 성산을 그리워한다. 저의 이야기와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로 주의 날을 바라며 사는 이 땅에서의 갈 바를 제시한다. 그렇듯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오늘 우리로 어렵게 하는 것이 정작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깨어야 한다. 주의 언약궤를 어디에 두고 살고 있는지? 주의 성소가 실제 어느 방향이었는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게 얼마나 되었는지? 주일마다 교회는 가고 이런저런 교회 행사에 관여하기는 하면서 정작 우리 안에 참 기쁨은 있는지? 어디서 잃어버린 것인지? 그저 의무감으로 혹은 해이해진 타성에 젖어 그러려니 하는 신앙으로 하루하루를 허비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5-6).
우리로 그 마음이 든든한 것은 어떤 환경이 또는 상황이 나아져서가 아니었다. 오직,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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